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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먹을(지도 모를) 글 한번 쓰겠습니다. <조선> 시론에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쓴 김대식 교수(서울대 물리학)를 변명해 보려고 합니다.

최근에 쓴 제 기사에 "<조선>은 이런 글도 싣는다"는 덧글이 올라왔는데, 그게 바로 김교수의 글이었습니다. 그 독자분은 아마도 이 글도 한 번 비평해보는 게 어떠냐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 동안 기다렸습니다. 처음에는 비평 가치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기자들이 곧 달겨들 것이 예상됐기 때문이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오마이뉴스>에만도 서너 개의 비판 기사가 실렸고 답글까지 합하면 적지 않은 반박글이 올랐습니다.

하지만 뭔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양식 없는 사람도 글을 이렇게 쓰는 법은 없습니다. 게다가 김 교수는 양식 없는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약간의 조사 끝에 얻은 확실한 결론입니다. 그래서 김 교수 변명의 글을 써 보기로 한 것입니다.

우선 '서울대 교수들 왜 그러냐'거나 '물리학이나 잘 해라'는 식의 반박은 재반박의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건 글 자체에 대한 비평도 아닐 뿐 아니라 김교수는 그런 비난이 무색할 정도로 실력 있는 물리학자이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는 버클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생물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94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버클리대 물리학 박사라는 명함은 그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일단 보여줍니다. 서울대에 거부감이 있다 해도 갓설흔살에 그 대학 교수가 된 것을 함부로 폄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김교수는 지난해 정부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으로부터 '올해의 젊은 과학자상' 수상자 4명 중의 한 명으로 선정됐습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반도체 내부에서 매우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초고속 현상을 연구한 업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교수는 또 2001년 말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극한물성연구팀(팀장 이형철 박사)과 공동으로 '10W급 고출력 다이오드 레이저를 이용한 펨토초(fs: 10조분의 1초) 레이저인 타이타늄 사파이어(Ti-Sappire) 펄스 레이저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전 사실 이런 물리학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자기 학문 분야에서 이 정도의 연구업적과 지명도를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임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사십도 안된 젊은 나이에 말이지요.

김 교수의 경력은 물리학 연구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난해 말 한국 사회가 비정상적으로 포경에 집착하는 현상을 파헤쳐서 '우멍거지('포경'의 순 한국말)'라는 저서를 냈고, 영국 비뇨기과 학회지에 논문도 실었습니다. 한국인 60퍼센트가 포경을 했는데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랍니다. 참고로 서유럽이나 북유럽, 그리고 일본의 포경률은 1-2퍼센트 남짓이라는군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의 포경 이유라는 게 하나같이 근거 없는 것이어서 '남성의 인권 침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김 교수는 인터넷에 웹사이트까지 열어 '포경 남용'을 고발하고 저지하는 운동을 벌였는데, 그 운동을 평가받아 국제인권상을 수상했습니다.

김 교수는 글솜씨도 좋습니다. 그는 2002년 10월22일자 교수신문에 "공무원들이여, 연구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시라"는 글을 썼는데 공무원들에게 시달리는 연구자의 애환을 공격적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특히 그의 결론을 한번 보십시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공무원들의 창의력을 좀 줄이고 연구자들을 가만히 좀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필요 없는 형식을 없애는 공무원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국회로 보내면 되는 것이다.'

화끈하면서도 옳은 말이잖습니까? 물론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공무원들에게 시달림을 받아도 마땅할 만큼 연구비를 전용 혹은 남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김 교수는 그런 부류의 연구자들과는 달리 공무원들에게 큰 소리를 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김 교수는 실력 있는 물리학자이고, '안락의자형 학자'가 아니라 행동가이며,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할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글솜씨까지 괜찮습니다. 그러니 이런 김 교수더러 '물리학이나 제대로 하라'든지 '서울대 교수가 그렇지 뭐'하는 비난은 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그의 공개 편지는 좀 이상합니다. 수신인이 주한 미군 사령관이어서가 아닙니다. 김 교수는 누구에게나, 공개든 비공개든, 편지를 쓸 수 있으니까요. 혹은 그가 '나는 친미파이고 반김정일파'라고 공개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누구라도 미국이든 김정일이든 좋아하거나 싫어할 자유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흉내내자면 '그의 그런 자유로운 말하기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걸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우선 그의 이번 글이 다른 글과 아귀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포경'이야기를 해 보지요. 그가 한국인의 포경 남용을 비난했던 이유는 맹목적인 미국 추종 때문입니다. 19세기말부터 무지와 편견 때문에 포경 수술을 권장했던 미국을 한국인들이 맹목적으로 추종할 까닭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렇게 높은 포경률을 보이는 나라는 세계에서도 미국과 한국, 그리고 필리핀뿐이랍니다. 포경 남용에 관한 한 '바보의 축(axis of fool)'을 이룬 것이지요. 필리핀은 한때 (미국의 식민지였을 때) 미국의 정책 아래 있었으므로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도대체 왜 그러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보낸 그의 공개편지에서는 오히려 포경률 높은 한국과 미국은 서로 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상대를 비하하는 영화가 나와도 너그러운 유머감각으로 이해해야 한답니다. 군중심리적으로 미국을 좇아 포경을 한 젊은 세대가 반미운동을 하는 게 앞뒤가 맞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그는 글의 말미에서 포경률 높은 '미국이 마지막 수단으로' 포경률 낮은 '북한의 핵시설을 재래식 무기로 폭격하려 한다면' 군중심리적으로 포경률 높은 남한 국민의 적어도 한 사람, 즉 김교수는 찬성하겠답니다(전 개인적으로 김 교수가 포경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얼토당토않은 포경을 한 것이 그들 책임이 아니잖습니까? 그 세대가 태어났을 때 혹은 12-3살 시절에 그들에게 포경을 시킨 것은 그 부모 세대입니다. 지금 40대나 50대 이상이라는 말이지요.

맹목적 추종, 혹은 그의 표현대로 "남들이 주입해준 생각을 자기의 것이라고 믿"고 그걸 행동으로 옮긴 것은 젊은 세대가 아닙니다. "군중심리적으로 미국을 잘못 모방한 것"은 기성 세대입니다. 적어도 포경에 관한 한은 말입니다. 그러니 김 교수의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포경을 한 젊은 세대가 아니라 그들에게 포경을 시킨 부모 세대란 말입니다.

게다가 포경을 하지 않은, 아니 포경을 할 수가 없는 절반의 여성 인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들의 반미 혹은 친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젊은 여성들이 '남이 주입한 생각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다른 증거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그의 글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김 교수의 공개편지는 그의 다른 글과 비교해 보아도 이상한 글이지만, 그 글 안에도 앞뒤 안 맞는 구절이 나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지요. 그가 후반부에 서술한 한 문단을 따와 보겠습니다.

"불법은 아니지만 영어 연수한다는 명목으로 반(半) 영구적으로 체재하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엄마들도 늘고 있습니다. 불법 체류 엄마가 아이한테‘흑인, 라티노’들과 놀지 말라고 하는 것을 들을 때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불법 체류자가 미국인들을 차별한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김교수에게는 불법 체류자의 인종 차별이 아이러니로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자꾸 불법 체류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그는 그 문단 맨 처음에서 그런 엄마들의 체류가 '불법은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물론 저는 김 교수보다 더한 인종차별 반대자입니다. 불법 체류자든 합법 체류자든 인종차별하는 것은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미국서는 그게 심각한 위헙행위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글을 쓸 때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에서 '합법 체류'라고 해 놓고서 바로 다음 문장에 '불법 체류'라고 바꿔 버리면 읽는 독자들이 얼마나 헷갈리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 글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똑똑하고 양식 있고 글 잘쓰는 김 교수가 어째서 이런 비논리적이고 앞 뒤 안 맞는 글을 쓴 것일까요? 글의 주장은 제쳐놓더라도 말입니다. 그가 국제 학회에 낸 논문이나 공무원을 질타하는 기고문에서는 그런 비논리와 비정합성이 발견될 리가 없습니다. 유독 <조선>에 실린 '주한 미군사령관에게'만 그렇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글에 나타난 정황증거로 살피건대, 추측임을 전제한 제 결론은 그렇습니다. 김 교수가 이 글을 썼을 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글을 김 교수 이름으로 잘 못 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듭니다.

그럼 어째서 김 교수의 이름을 빈 것일까요? 그것은 김 교수가 똑똑하고, 젊고, 유능하며, 미신타파에 앞장서는 활동가이며, 할 말을 하는 소신파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경 남용'에 관한 책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는 유명인이라는 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 쓴 글이라면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 줄 것이고 수긍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번에는 김 교수가 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남들이 주입해준 생각을 자기의 것이라고 믿"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너무 그런 주입의 냄새를 피우면 저의를 의심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론에 난 이름 때문에 김 교수는 이참에 점수를 좀 잃을 것 같습니다. <조선>으로서는 입맛에 맞는 젊은 필자를 한 사람 발굴했는지 몰라도 김 교수로서는 앞으로 자기 글 무게를 좌우할 선택을 해 버린 셈입니다. 물론 <조선>이 김 교수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 주리라고 믿어 의심치는 않습니다.

그나저나 김 교수의 '포경 남용' 고발을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이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비난받고 있는 마당에, 이번에는 남한마저 바보의 축(axis of fool)으로 드러나 버렸으니까요. 이런 저런 축들이 마구 교차하는 한반도는 아무래도 지금 위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 아래는 2월20일자 시론 전문입니다.

[시론]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 金大植 

우선 기성 세대에 간신히 입성한 사람으로서 한국인의 절대 다수는 미군의 주둔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 을 밝히고 싶습니다. 또한 김정일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미군의 주둔 여부와 관계없이, SOFA(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의 개정과 무관하게 우리는 김정일의 북한군과 싸울 것입니다.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대부분이 젊은 세대입니다. 우리는 젊은 세대 일부에게 생각하는 방법, 스스로 여유를 가지고 바라보는 방법, 진정한 유머 감각을 전혀 가르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최근 상영된 007영화를 가지고 젊은 세대가 보이콧 운동을 하는 것 을 보고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항상 외국 미디어에 좋게 나오기를 바라 는 유아적인 발상이 눈에 띕니다.

이처럼 우리의 이미지에는 극도로 민감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한국인들을, 연변 동포들을, 외국인들을, 특히 피부가 우리보다 어두운 사람 들을 어떻게 대하고 표현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을 유머스럽게 바보로 표현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웃어넘길 것입니다. 

007영화에 대해 반대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미국에 사는 어글리 코리안에 대한‘반한 (反韓)’영화를 우리가 만들 때, 세계는 우리가 성숙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젊은 세대의 반미는 약간은 코믹하며 군중심리적 요소가 다분합 니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에 있는 동포들과는 달리 포경수술을 받았습니 다. 필리핀과 남한만이 군중심리적 으로 미국을 잘못 모방한 것이지요. 미(美)의 기준 역시 군중심리적인 왜곡된 미국 모방이라고 생각합니 다. 좁은 얼굴(미국에서는 이런 사 람들을 범죄자의 전형이라고 생각하 지요), 좁은 코(영국인들이 좁은 코 를 가져서 성격이 더럽다는 농담도 있지요. 콧구멍을 잘 쑤실 수가 없어 서요), 그리고 흰 피부입니다(미국 에서는 지나치게 흰 피부를 가지면 열등감에 시달리지요). 

반미 아니면 친구들에게 욕먹을 것 같아서 모두 반미하는 것, 남들이 주입해 준 생각 을 자기의 것이라고 믿는 것, 슬프지 만 현재 우리 수준이 아닐까 합니다. 젊은이들을 부추기는 미국 전문가 교수는 어떤가요? 

미 명문대 박사지만 영어를 못해서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시키려면 헤매고, 물론 미국 친구 한 명 없습니다. 오직 한국에서 교수하려는 일념으로 도서관에서만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밤에는 비슷한 한국인들과 모여 미국을 욕하고요. 그러니 미국을 모르면서 싫어할 수밖에요. 

김정일이 적화통일을 한다고 해서 미국이 망하지는 않겠지만 조심 할 게 있습니다. 미국에서 불법으로, 공짜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한국 엄마들과 미국 내의 어글리 코리안들입니다. 이것 때문에 미국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진짜 김정일이 바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지요. 미국 공립학교에 가서“여기 살러 왔다”고 거짓말 하고 방학 동안 영어 배우게 하는 한국 엄마들이 늘고 있습니다. 세금을 낸 것도, 조상이 미국 독립전쟁 때 싸운 것도 아닌데 불법으로, 공짜로 상당히 억제될 수 있을 것이다. 당당히 다니다가 의아해 하는 순진한 미국인 선생님들을 뒤로하고는 유유히 돌아옵니다. 

불법은 아니지만 영어연수한다는 명목으로 반(半) 영구적으로 체재하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엄마들도 늘고 있습니다. 불법 체류 엄마가 아이한테‘흑인, 라티노’들과 놀지 말라고 하는 것을 들을 때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불법 체류자가 미국 인들을 차별한다…. 이런 아이러니 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저는 김정일이 부시보다 머리는 확실히 좋고, 한국인이지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역사상 ‘유례가 적은’독재자입니다. 자기 국민을 굶겨 죽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수용소에 넣었습니다. 

미국이 마지막 수단으로 북한의 핵시설을 재래식 무기로 폭격하려 한다면 적어도 남한인 한 명은 찬성 합니다. 김정일의 정신상태에 모든 것을 걸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할 각오가 없다면 오히려 전쟁 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 쟁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김정일과 싸울 의사가 있는 남한군에 자원입대 할 것입니다. 나는 한국을 사랑 하며, 미국에 호의적이고, 반(反) 김정일주의자입니다(I am pro- South Korea, pro-America, and anti-Kim Jong Il). 

(金大植/서울대 교수·물리학)  
 

2002년 10월22일 교수신문에 낸
김대식 교수 기고문

공무원들이여, 연구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시라!

과학 기술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연구비다. 대부분의 실험 과학 기술자들에게 있어서 연구비는 가히 생존에 관련된 문제다. 이제는 진정으로 국제적으로 경쟁해야 하는 시대이고 국내의 동료들도 그렇지만 학회 때면 만나는 외국 친구들의 눈은 더 따갑다. 

아무리 한국의 인프라가 어떻고 개시비용이 없어서 몇 년을 날렸고, 연구비 액수가 너희들보다도 적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밖에 못하고 있다고 해봤자 전혀 통하지가 않는다. 그들이 볼 때 한국은 산성, 현대, LG, 기아가 포진해 있는 나라이다. 입으로는 동정의 소리를 낼망정 눈빛으로는 '변명하지 마라'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러한 국제 경쟁 시대에 과학 기술자들이 연구비에 목매달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러다 보니 대부분의 연구비를 정부에게서 받아야 하는 기초과학기술자들의 경우 정부 각 부처의 공무원들과 연구비 지급 기관의 요구에 약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요구들과 각종 양식이 많은 경우 귀찮은 정도를 떠나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구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된다면 국민의 세금으로 연구를 하는 연구자나, 국민에 대해 연구자를 잘 관리하고 북돋아줘야 할 의무가 있는 공무원 모두 자기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지엽적일지 모르나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이에 대한 개선책도 함께 논하고자 한다. 
(1) '창의적' 이면서도 진부한 연구 신청서 양식. 연구비 신청서 양식을 보면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표'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 포복절도하다가 울음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말도 안되는 표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아래의 표가 얼마나 어리석은 머리에서 나왔는가는 연구를 해본 사람만이 안다. 석달 별로 돈이 얼마나 쓰일까를 예상하라는 것은 연구를 웬만큼 몰라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정도면 눈물이 나온다. 웃음도 나온다. 냉소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충 하고 때운다. 
공무원들은 창의력을 더 발휘해서 이런 표의 무한한 변종을 만들어낸다. 진정한 창의력은 이런 바보스러운 표를 아예 없애는 것인데 말이다. 신청서의 항목 또한 마찬가지다. 간단할수록 더 평가하기가 좋은데도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난다. 목표 및 내용, 방법, 체계, 기대성과, 활용방안.... 이렇게 20가지 정도의 항목이 있는데 그 내용이 그 내용이다. 사실은 두세 가지 항목만이 필요한데 말이다. 

(2)결과 발표 예상 학술지. 이것도 내가 아는 한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바보짓이다. 연구자들은 모두 충분히 압력을 느끼고 있다. 거기에다 이런 식으로 더 압력을 가하는 것은 연구자를 믿지 못하는 발상이라는 것 뿐 아니라, 덜떨어진 잘못된 의욕의 반영이다. 

(3)소명자료. 말도 안되는 짓을 해가면서 이렇게 어렵게 연구비를 따도 겨우 시작이다. 연구비를 다 집행하고 몇 달 후에 '소명자료 요청' 이라는 공문이 날아온다. '소명' 이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죄인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연구자들은 요즘 일년에 한번은 죄인이 된다. 모든 사람을 다 죄인으로 가정하고 감사를 하는 지금의 행정체계는 연구 능률의 저하와 연구자 사기 저하에 큰 몫을 하고 있다. 

(4)자료요청, 중복입력. 좀 머리를 식히려고 하면 모모 과장이 요청해서 그러니 18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부탁한다는 이 메일이 수 백명의 연구자에게 날아온다. 이 베일을 보내는 사람은 과장에게서 한참 떨어진 말단 공무원이다. 그게 그 내용이고 자기네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집주소를 부탁한다는 내용의 이메일도 온다. 그래서 집에 뭐가 온 적은 한번도 없는데 말이다. 이 메일이 오히려 연구능률을 엄청 떨어뜨리는 좋은 예이다. 

더욱이 누가 인터넷 시대에 뒤진다고 할까봐 같은 내용을 5번 정도 계속 업데이트시키라고 요구하는 공무원은 잘라야 한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공무원들이 창의력을 좀 줄이고, 연구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필요 없는 형식 양식을 없애는 공무원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국회로 보내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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