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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랑도는 순국무사도를 표상한다. 신라 왕실과 신라 '국민'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 멸사봉공 집단이 화랑도라고 한다. 이러한 화랑상은 어디에서 말미암으며 얼마나 타당할까.

순국무사 화랑은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 과정의 부산물이며 이제는 폐기물이다. 근대 국민국가는 그 구성원인 '국민'에게 신분해방과 신앙의 자유, 기회균등의 이름으로 각종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대신 납세·군역·교육 따위의 의무를 부여한다.

▲순국 무사로 상징된 신라시대 화랑도. 육군사관학교 산하 화랑도 연구소 상징물ⓒ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또 근대 국민국가는 자칫 모래알과 같아지기 쉬운 국민을 하나로 통합키 위해 장 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표명한 '시민종교'(civil religion)와 같은 사회통합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게 된다. 사회통합이데올로기는 어떤 집단의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하는 장치이자 창구가 된다. 국가는 이러한 '시민종교'라는 신앙을 매개로 국가에 대한 국민의 자발적이며 맹목적인 충성을 유발하게 된다. 이른바 애국심(patriotism)이 그것이다.

'순국무사 화랑'이라는 시민종교도 이런 목적에 따라 '창시'되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일제 식민강점기 단재 신채호와 해방 이후 이선근이었다. 이들은 각기 그 시대 상황에 걸맞는 국민의 이상형, 다시 말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바칠" 국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화랑도에서 찾았다.

단재는 독립쟁취를 위한 진취적인 기상을 한국고대사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신라의 모든 것을 증오한 단재지만 그가 사랑한 유일한 신라는 화랑도였다. 그러한 까닭은 단재가 본 신라는 중국에 굴종만 일삼는 사대주의 국가였으나 오직 화랑도만은 순국무사, 맹렬 진취적 기상을 갖춘 20세기 한민족 '국민'의 표상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재가 구축한 이런 화랑도는 해방 직후 근대국민국가 구축단계에 접어들면서 다시 재발견된다. 이러한 작업을 앞장서 주창한 이가 이선근이었다. 이선근은 나라를 위하고 공산주의 박멸을 위해 기꺼이 총칼을 들고 전장으로 돌진할 '국민'의 이상형을 역시 신라 화랑과 그 정신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들이 화랑을 순국무사라고 본 근거는 고려 중기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였다. <삼국사기>는 신라인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나오는 구절이라면서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賢佐忠臣. 현좌충신)가 여기(화랑도)에서 우뚝 솟았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사(良將勇卒. 양장용졸)가 여기(화랑도)에서 말미암아 생겨났다"는 똑같은 말을 두 군데서 되풀이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모든 화랑도가 현좌충신이고 양장용졸이라는 뜻이 아니다. 화랑도 출신 중에 그러한 인물이 많았다는 뜻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구절을 근거로 학계는 순국무사 화랑상을 창출해냈다.

그것은 첫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고려시대의 '기념비'(monument)임을 알지 못했고, 둘째,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인용한 <화랑세기> 구절을 김대문의 말로 오해한 데서 비롯됐다. '현좌충신 양장용졸' 운운은 설혹 그 뿌리가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있다고 해도 <삼국사기>에 인용되는 순간 김부식의 말과 논리로 둔갑할 뿐이며 결코 김대문의 텍스트가 아니다.

김부식이 <화랑세기>에서 유독 '현좌충신, 양장용졸'이라는 구절을 인용한 까닭은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이상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현좌충신…'은 김부식이 <삼국사기> 열전에 올릴 인물을 판별하는 잣대가 되었다. 다시 말해, 현좌충신 양장용졸에 해당하는 인물을 골라 열전이라는 곳에다가 전기물을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을 결코 김대문의 텍스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의 텍스트가 아니라 김부식 및 고려시대의 '기념비'(monument)일 뿐이다. 기념비는 이데올로기성이 짙기 때문에 그것을 둘러싼 신화성과 선전성, 설화성을 도려내지 않는 한 '기록물'(document)로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다. 그러한 선전성, 신화성을 두들겨 부수어낸 다음 살을 발라낸 다음 뼈대를 추려야 한다. 이것이 기념비의 탈구축(deconstruction) 과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념비성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20세기 한국사학계는 "현좌충신…"이 김부식의 말임에도 그것이 신라인 김대문의 텍스트라고 해석함으로써 화랑도가 순국무사도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런데 이러한 화랑도는 국가권력과 여기에 야합한 역사학계의 합작에 의해 순국무사 집단으로 설정됨으로써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국민표상'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실제 역대 정권에서 화랑도는 그렇게 활용됐다. 특히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화랑정신은 곧 국민정신과 동의어였다.

화랑정신을 외치며 경주에 화랑교육원을 만들고 보이스카우트를 결합시켜 국민정신과 국가를 위한 충성 이데올로기를 창출한 인물이 앞서 말한 이선근이었다.

▲화랑도를 유신정권을 위한 국민강령으로 채택하는데 앞장선 이선근 전 문교부장관. 사진은 이 전 장관이 지난 1967년 6월 동국대 총장시절 고려대장경 영인본을 들고 청와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방문,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이선근은 1949년 <신라화랑도의 신연구>를 출간했으니 그 서문을 보면 화랑 부활을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청년단 강령으로 만들었다. 이 단행본이 더욱 주목되는 까닭은 이선근이 순국무사 화랑상을 설정하면서 곳곳에 단재 신채호를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채호와 이선근, 겉으로는 물과 기름일 것 같은 독립투사와 이른바 친일부역배는 화랑을 통해 극적인 '화학 결합'을 이루고 있다.

이선근은 박정희 유신정권에 접어들어서는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에서 출간된 <신라 화랑도>를 다시 발간하거니와, 여기서는 신라 화랑도를 유신정권을 위한 국민강령으로 다시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선근은 더 나아가 1971년에는 경주 남산 기슭에다가 화랑교육원과 '통일의 집'을 만들고 그 안에다가는 김춘추 김유신, 문무왕의 통일 3대 성웅을 창출했으며 그 이전에는 박종홍과 함께 국민교육헌장을 기초, 완성했다.

이선근 스스로가 남긴 글을 보면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 첫 구절에서 "이 땅"을 집어넣은 인물이 자신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화랑정신은 지금도 군대(예, 화랑대), 국가훈장(예, 화랑훈장) 등의 형태로 끊임없이 국가권력에 의해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의 표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이처럼 '순국무사 화랑'이란 거대한 그림은 국민통합을 이룩하려는 국가권력과 여기에 역사학이 야합해 그려낸 날조품(invention)이었다.

이제 의심할 바 없이 순국무사단으로 '규정'된 화랑도는 1989년과 1995년 두 종류가 각각 공개된 <화랑세기> 필사본이 김대문의 작품을 베낀 진본인지, 아니면 20세기 소설적 창작품인지를 판단하는 가장 유력한 근거로까지 활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고대사학계가 구축한 화랑상은 고려시대 텍스트인 <삼국사기>를 토대로 구축한 화랑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아주 틀린 말이요, 정확히는 그들이 속한 근현대 역사학이 만들어낸 화랑상일 뿐이다

더불어 이런 화랑상은 더욱 확대되어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대해서도 근현대 역사학이 구축한 것과 같은 화랑상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런 요구가 필사본 <화랑세기>의 화랑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필사본은 가짜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요컨대 지금껏 학계가 구축한 화랑도상과 필사본 <화랑세기>에 묘사된 화랑도의 모습이 너무나 판이하기 때문에 필사본은 가짜라는 것이다.

국민국가 창출이라는 같은 깃발 아래 국가권력과 역사학이 야합해 날조해낸 화랑도상을 잣대 삼아 필사본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려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졸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김영사. 2002) 중의 프롤로그 '순국무사 화랑을 해체하며'를 압축하는 한편 새로운 내용을 보충해 재정리한 것이다.

<화랑세기>란 신라 성덕왕 3년(704년) 한산주 도독(지금의 경기도지사에 해당)을 지낸 신라인 김대문이 썼다는 책으로 이름과, 여기에서 인용된 몇 구절이 <삼국사기>를 비롯한 후대 다른 기록에 간헐적으로 전해질 뿐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과 1995년에 <화랑세기>를 붓으로 베껴쓴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 두 종료가 잇따라 발견됐다. 이 필사본은 화랑 중의 화랑, 우두머리 화랑인 역대 풍월주 32명의 전기물로서 그들의 가계와 활동 등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필사본이 과연 김대문의 바로 그 <화랑세기>인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10여년째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 화랑도, 즉 순국무사적인 화랑도 모습이 거의 없고 혼잡한 남녀관계만을 기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진짜라는 측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말로 몰랐던 진짜 신라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기자는 이 중에서도 필사본이 진본이라는 확고부동한 견해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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