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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의 계절은 왔는가? '돌아온 장고'의 등장. <조선일보> 4월 18일 1면에 실린 '후보검증위원회 출범' 사고 기사.
'돌아온 장고'인가 '작년에 왔던 각설이'인가.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색깔론'을 전면에 내건 채 편파·왜곡보도에 몰두했던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수구언론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대선 후보에 대한 '사상검증 감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조선일보>의 '후보검증위원회' 출범과 <중앙일보>의 '대선주자 정책·이념 조사' 실시가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물론 선거를 앞두고 후보에 대한 검증을 시도하는 것은 언론의 기본적 사명에 속한다. 그러나 대선 후보의 정책과 이념에 대한 검증과 조사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특정 후보에 대해 편파적인 색깔론 공세를 펼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한마디로 수구언론들이 그 '못된 버릇'을 과연 버릴 수 있겠냐는 것이 그들의 과거 행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대다수 국민들의 우려 섞인 지적이다.

특히 "대선 후보들이 출마를 선언하기 훨씬 이전에 행했던 각종 발언과 행적은 물론, 그들의 사상과 경험을 담은 저서와 기록물 등"을 일일이 추적하겠다는 조선일보의 선언은 '사상검증'으로 얼룩졌던 과거 대선을 연상케 해 섬뜩하기조차 하다.

사실 과거의 발언, 행적, 기록 등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해석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거나 전후 맥락을 생략한 채 일부 발언이나 기록만을 끄집어내 현재적 시점에서 문제삼을 때 유권자에게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구언론은 그런 지적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갈 길을 가겠다는 태세다. 우리는 그러한 징후를 <중앙일보> 5월 1일자에 실린 '김영희 칼럼'에서 읽을 수 있다.

<중앙일보>의 대기자(大記者)로 알려져 있는 김 씨는 이 칼럼에서 예의 '대선 후보 사상검증'에 나섰거니와, "재벌들의 주식을 정부가 사서 노동자·농민·도시서민들에게 나눠주자든가(88년 국회 대정부 질문) 특정신문의 폐간을 고려한다는 발언(2001년)은 너무 가볍게 들린다.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말부터 무거워야겠다"고 경고하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물론 김 씨가 문제삼은 발언에 대해 노무현 후보는 지난 경선 과정에서 충분히 해명을 한 바 있다. 노 후보는 두 발언에 대해 각각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같은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기업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 "언론은 언론의 정도를 가고, 정치는 정치의 정도를 가면 된다"는 요지의 해명을 했고, 대다수 국민들은 그것을 TV와 라디오를 통해 보거나 들었다.

그러나 김 씨는 이러한 해명은 애써 무시한 듯 다시 이렇게 시비를 걸었다.

"노 후보는 장(場)의 논리를 가지고 그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지금부터 과거의 발언 하나 하나를 해명하고 설명하고 확인해 나가야 한다."

말인즉슨, 이른바 '장의 논리'(상황론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를 가지고 '말 바꾸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생각해 보라. 한 정치인이 과거 발언에 대해 해명을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래서 열심히 해명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장의 논리'를 가지고 '말 바꾸기'를 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다시 해명하라고 한다.

이미 질문과 답변을 듣고 그 발언의 전후 과정과 상황적 맥락을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리플레이(REPLAY)'만을 외치는 이런 칼럼을 읽어야 하는 독자는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 칼럼을 쓴 사람은 그냥 '기자'도 아니고 말끝마다 '미래지향적 국제화'를 주창하는 '대기자'가 아닌가. 곁길로 빠져서 한마디하고 싶지만 갈 길이 바빠 꾹 참는다. 재생(PLAY).

▲ 수구언론은 검증하기 이전에 이중 잣대부터 바꿔라. "잘못된 면만 부각시키지 말고 과거를 덮어주자?"(이승만, 박정희) vs "당신 말은 콩으로 메주 쑨다 해도 안 믿는다?"(노무현)
그러나 이것만은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인물에 대한 취향과 호오(好惡)에 따라 전혀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수구언론들의 못된 버릇 중 하나다. 실제로 <중앙일보>는 '김영희 칼럼'이 실리기 이틀 전인 4월 29일자 '중앙시평'(필자 정구현 연세대 교수)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자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한 바 있다.

"잘못된 면만을 부각시켜 이 분들을 부정해 버린다면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훌륭한 지도자는 찾기 힘들 것이다. …(중략)… 바람직하지 않은 과거가 있었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과거이며, 따라서 이를 통째로 부정할 수는 없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문제는 누구는 '잘못된 면'과 '바람직하지 않은 과거'가 있어도 덮어주고, 누구는 없는 것마저 까발리거나 작은 것을 왕창 키우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중앙시평'의 다음과 같은 외침은 우리 모두가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나에 대한 평가와 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물론 공인이 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보다 더 높은 도덕적인 기준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식의 이중 잣대로, 그것도 사적인 영역을 너무 확대해 공인을 평가한다면 살아남을 지도자가 많지 않을 것이다."

구구절절 지당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에 감복한 필자는 '사상검증의 감별사'를 자처한 수구언론들의 사상을 감히 검증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이 과연 사상검증을 벌일 자격은 가지고 있는 것인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그들이 들이댄 잣대를 가져다가 그들에게 한번 거꾸로 대보자는 것이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대상? 지면관계상 이번에는 '수구언론 트리오'의 맏형인 <조선일보>를 집중적으로 다룰 생각이다. 방법? "<조선일보>가 사상검증에 맛을 들이기 훨씬 이전부터 행했던 각종 발언과 행적은 물론, 그들의 사상과 경험을 담은 저서와 기록물 등"을 일일이 추적하는 방식을 취하겠다.

물론 그들도 이의는 없을 줄 안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을 사시로 내건 그 신문이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식의 이중 잣대를 고집하지는 않으리란 믿음 때문이다.

(1) <조선일보>는 '미군철수'를 주장했다.

<조선일보>가 '미군철수'를 주장했다면 독자들은 믿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노일환 의원 등 한민당 소속의 개혁소장파가 주도한 '미군철수 결의안'이 부결되고 그대신 '미군주둔 결의안'이 통과되자, <조선일보>는 그해 9월 16일자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군주둔이 장기화한다면 소련도 그대로 물러나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고, 정국의 불안정 운운을 이유로 외군을 끌어들여다가 이 땅이 전장화한 예는 한말의 갑오청일전쟁을 생각할 것이다. …(중략)… 통일의 방법을 평화적으로 추진시켜야 할 것은 우리 민족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지고한 사명일 뿐 아니라 유엔이 한국정부에 기대하고 있는 바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그뿐인가. 이 땅의 대중은 (미군주둔에 대하여) 그대로 화응하여 '고맙소' 할 줄 아는가. 정부는 마땅히 적당한 시기에 빨리 (미군의) 철퇴가 있고 평화한 통일국가를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는 그것을 먼저 말해 주어야 한다."

해방정국 당시 국민들이 미군주둔에 결코 동조하지 않았으며, 정부는 '미군철수'와 '평화통일'의 대안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 <조선일보>의 확신에 찬 주장이었다.

(2) <조선일보>는 '북진통일'을 반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48년 정부 수립을 앞둔 7월 말경에 이승만의 측근인 백성욱(이승만에게 이화장을 제공한 '상당한 재산가'로서 나중에 내무부장관에 오름)이 "최소한 30만의 우수군을 양성해 놓은 뒤에 북한에 대한 정치공작을 적극 추진하자"고 호전적인 주장을 펼치자, <조선일보>는 1948년 8월 1일자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준열하게 '호전주의자들'을 꾸짖었다.

"도대체 국방군이란 무엇하는 것이냐. 백 씨가 말하는 바는 남북통일을 미소전의 앞잡이로 북조선을 쳐들어가던가 그렇지 않으면 남조선에서 단독으로 북조선을 쳐들어가자는 것인데 이 결론은 남북동족전을 위하여 국방군 30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망상도 개인의 자유라 하겠지만 피폐한 국민과 국력으로 30만 대병을 무엇으로써 먹이고 무슨 생산으로 병비를 갖추겠으며 또 누구가 그런 동족전을 하자던가.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내전상태에서 어떻게 평화적으로 통일할 것인가 염려하고 있거던, 국방군이라 해야 남북동족전을 전목적으로 하는 듯한 이런 언론은 가히 귀에 담아들 수 없는 바이다."

▲ 선배들은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북진통일 주창론자 조갑제 <월간조선> 사장. ⓒ 참여사회 윤정은
당시 <조선일보>는 이승만 세력의 이른바 '북진통일론'과 '30만양병론'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주석궁 앞으로 탱크를 밀고 들어갈 때 비로소 통일은 완수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조갑제 <월간조선> 사장에겐 정말이지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겠지만, <조선일보> 선배 기자들은 당시에도 존재했을 조갑제 사장 같은 '호전주의자'들을 향해 "망상을 버리라"고 호통을 쳤던 것이다.

물론 "망상도 개인의 자유라 하겠지만"이라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말이다.

(3) 편집국은 '좌익' 표창 받고, 공무국엔 '적기가' 울렸다.

"문학가동맹(文學家同盟)에서 상(賞)이 왔습니다."

해방 이후 복간된 뒤 얼마 후 <조선일보> 편집국으로 문학가동맹 이원조 사무국장이 알려온 낭보가 전해졌다. 문학가동맹은 당시 남노당 계열의 좌파 성향의 문학인단체. 그렇다면 그들이 <조선일보>에 상을 보내온 이유는 무엇일까.

방우영 회장의 형이자 방상훈 사장의 부친인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은 1983년에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태평로 1가>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공산주의(共産主義)를 옹호(擁護)하는 빨갱이 대변(代辯)의 사설(社說)이 게재된 것에 대한 대가(代價)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고백은 이후에 나온 <조선일보> 관련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것이 좋든 싫든 역사는 그대로 기록되는 것이 마땅하건만 이후 <조선일보>는 이런 과거를 철저히 감추기에 급급했다(역사가들은 이러한 행태를 가리켜 '역사의 은폐'라고 부른다).

지식인이 몰려있는 편집국은 물론이고 노동자들이 모여있는 공무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미국과 소련 등 외세에 의해 갈라진 조국의 현실에 분노하는 한편 그런 외세에 빌붙어 권력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이승만과 친일파를 증오하는 성향을 보였다. 당시 <조선일보> 공무국 내부의 정황은 방일영 회고록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 조선일보사에도 공장에 내려가 보면, 공무국 직원들이 '적기가(赤旗歌)'를 불렀다."

적기가? "인민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피로 얼룩져"로 시작되는 혁명가이다. 이런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이 일제 말기 가장 치열하게 항일을 했다는 것은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아무튼 당시 <조선일보> 공무국 노동자들이 분단을 강요한 외세와 그들에게 결탁한 매판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라면 전사(戰士)가 되어 피를 흘릴 태세가 되어 있다고 노래한 것이다.

(4) <조선일보>는 '빨갱이 소굴'이었다.

▲ '빨갱이'를 장학생으로 키운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 북한을 선택한 이갑섭, 정근양(오른쪽부터), 백석(한 사람 건너).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방일영 씨의 부친 방재윤 씨. 출전: <계초 방응모>
"몇 년 뒤에 6·25가 터지자, '아, 저 사람도 빨갱이였나?' '저 사람이 그런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나올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총무부장 직책에 있던 김석택마저도 공산당원이었음이 드러나는 그런 판국이었다."

위에 소개한 것은 방일영 회고록 <태평로 1가> 53쪽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해방 정국 당시 <조선일보>는 한마디로 '빨갱이 소굴'이었다. 방일영 전 회장이 회고록에서 <조선일보> 근무자나 서중회 회원(방응모 장학생)으로 <조선일보>와 직접 간접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 중에서 이른바 '빨갱이'로 지목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박치우(해방 직후 <조선일보> 속간 당시 주필이자 논설위원장, 경성제대 졸업, 숭실전문학교 철학교수, 나중에 빨치산이 됨) △김병렬(논설위원, 동경제대 불문과 졸업, 문학가동맹 표창을 받게 된 사설 집필) △이원조(문학가동맹 사무국장, 방응모 장학생) △김기림(시인, 납북, 방응모 장학생) △문동표(논설위원, 경성제대 졸업, 6·25 당시까지 서울에 남아 있다가 1·4후퇴 당시 가족 동반 월북) △이갑섭(논설위원, 월북) △홍기문(논설위원, 홍명희의 아들, 월북, <조선일보>는 방응모의 친일 이야기만 나오면 홍명희와의 친분을 내세워 자신도 '민족지사'라고 강변) △김석택(총무부장) △김병덕(남노당 당원, 방일영과 같이 일본 유학) △백석(시인, 북한에 남아) △이상호(일제 당시 편집부장, 월북) △정근양(동경제대 졸업, 의사, 북한 정부 보건성 부상 역임) △정준택(공업전문 졸업, 북한 정부 도시계획성 부상 역임) △최석복(기자, 월북)

물론 그들은 지금 방일영 전 회장에 의해 '빨갱이' 취급을 받고 있지만, 내로라 하는 당대의 지식인이자 '애국자'들이었다.

(5) <조선일보>는 '빨갱이' 기자들의 덕을 봤다.

그렇다면 이들은 당시 <조선일보>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사세(社勢)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방일영 전 회장의 고백에 따르면, 해방 당시 그들의 활약으로 <조선일보> 부수가 확장되는 긍정적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방일영 전 회장의 증언을 직접 들어보자.

"그런데 이 때엔 이런 사설(공산주의 옹호와 대변)로 하여서 <조선일보>의 발행부수가 상당히 올라갔던 일이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태평로 1가> 55쪽)

▲ 맥아더와 만나는 이승만 전 대통령. 해방정국 당시 상식을 갖춘 다수의 <조선일보> 기자와 직원들은 남한의 지배세력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독자는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사실 방일영 전 회장의 고백은 솔직한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미군정(美軍政)이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약 70%의 국민이 '사회주의'를 지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앞에서 거명된 '빨갱이 논설위원과 기자'들의 활약에 힘입어 민심(民心)을 비교적 올바르게 전달하는 신문으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덩달아 발행부수가 늘어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방일영 전 회장이 "이것은 사실이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증언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것은 명확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미군정 당국과 <조선일보>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당시 미군정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중립'으로 평가된 반면, <동아일보>는 '극우'(조선사정협회)로 분석된 것이다. 아울러 <조선일보70년사> 77∼78쪽에는 당시 <조선일보>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적 지지'가 아닌 '중립적 태도'를 보였으며, 여순사건에 대해서도 '감정적 보도'를 자제하고 '신중한 보도'를 했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강조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시 활약했던 논설위원과 기자들이 <조선일보>의 정통 주류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전쟁 이후 <조선일보>가 '홍박(洪博)'이라고 추켜세우며 가장 자랑스러워 한 논객 중의 한 명인 홍종인 씨의 입사비사(入社秘史)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방일영의 회고에 따르면, 홍종인이 해방 이후 <조선일보>에 입사할 당시 주필이던 박치우는 홍종인이 친일지인 <매일신보> 출신이라는 이유로 적극 반대했다고 한다.

물론 홍종인 씨는 현재의 시각에서 보자면 훌륭한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그는 '좌익' 성향 때문에 독재정권에 의해 갖은 고초를 당한 바 있는 송지영(<민족일보> 사건으로 사형선고), 조덕송 씨(좌익사건으로 옥고 치름) 등과 함께 그나마 <조선일보>의 양심을 상징하는 언론인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조선일보>가 한국전쟁 이후에 얼마나 인물난을 겪었으면 '친일지' 출신의 인물을 자사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자랑할 수밖에 없었던가라고.

(6) <조선일보>는 '무산계급의 단결과 투쟁'을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는 일제시대에도 있었는데, 그것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가 친일을 했다면 어떻게 기사가 압수되고 정간과 폐간을 당했겠느냐?"

1988년 12월 13일 언론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에 대한 이철 의원의 질문을 받고 내뱉은 말이다. 다시 말해 <조선일보>는 '친일'을 한 것이 아니라 '반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과연 정당한 항변인가. 물론 <조선일보>의 기사압수 건수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사압수 과정의 내막과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조선일보 70년사> 뒤쪽에는 '해방전 조선일보 압수기사' 목록이 자랑스럽게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조선일보>는 압수기사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가 그것을 찾아보았다. 우선 조선총독부의 기사압수 조치가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던 1924∼25년 당시의 압수기사 중 하나를 보자.

"언제나 투쟁이란 다수자(多數者)가 승리를 얻는 것이다. 사회의 절대 다수를 점한 무산계급(無産階級)의 단결된 조직만 완성하면 최후 승리는 다반사(茶飯事)일 것이다."(<조선일보> 1924년 11월 21일자)

최근 노무현 후보의 발언 중 문제가 됐던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급진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잠시 옆길로 새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발언을 '색깔론'으로 공격하는 것은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생각해 보라.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지 그러면 '노예'란 말인가? 그리고 "노동자(근로자)가 주인이다"라는 말은 박정희 전 대통령 연설집만 봐도 셀 수 없이 많이 등장한다. 이 발언을 문제삼는 자들이야말로 노동을 신성시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셈이거나와, 일단 한번 사상을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내 말이 틀렸나?)

(7) <조선일보>는 '붉은 러시아'와의 연대를 통한 공산혁명을 촉구했다.

이번에는 <조선일보>의 정간(停刊) 조치를 부른 기사를 보자.

"(조선은 현상 타개를 필요로 하는데) 요체는 정치적인 제국주의와 경제적인 자본주의를 합리적인 제도로 바꾸는 데 있는데 이에는 반드시 적로(赤露)의 세계혁신운동과 그 보조는 일치하는 것이다."(1925년 9월 8일자)

정치적인 제국주의와 경제적인 자본주의를 합리적인 제도로 바꾸자? 쉬운 말로 바꾸면, 바로 공산주의 혁명을 하자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적로'란 '붉은 러시아', 즉 레닌의 소련을 지칭한다. 한마디로 <조선일보>는 소련과 연대해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서 일제로부터 해방되자고 부르짖은 것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주장'(그러나 우리 입장에선 당시 상황에서 충분히 제기할 만한 주장)을 했기에 총독부는 <조선일보>에 정간 조치를 내린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우영 사장이 말한 혁혁한 항일의 표상인 '압수'와 '정간'은 결국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성향의 기자들과 그들이 쓴 기사들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활약했던 기자들이 바로 그 유명한 '빨갱이'의 대명사인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씨 등이었다.

▲ '빨갱이의 대명사' 박헌영 남노당 당수가 기자로 활동하던 당시 <조선일보>의 '반일'은 극치를 이뤘다. 여운형 건준 위원장과 함께 한 박헌영.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총독부의 비위를 맞춰 정간 조치를 면하려는 이상재 사장 등 경영진에 의해 1925년 9월 박헌영 씨 등 17명의 젊은 기자들은 강제 해직되고 말았다.

더욱이 현 <조선일보> 사주 일가의 조상인 방응모가 경영권을 인수한 1933년 이후에는 기사압수나 정간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당시부터 자진 폐간한 1940년 8월까지 <조선일보>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조금도 논조가 다를 바 없는 '황국신문'이었을 뿐이다.

'강제 폐간'이 아니라 '자진 폐간'이었다고? 학창시절 국사 시간엔 분명히 '강제 폐간'이라 배웠다고? 필자도 참으로 안타깝지만 '자진 폐간'이 정답이다. 그것은 1940년 8월 10일자 <조선일보> 폐간사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 한번 함께 읽어볼까?

"<조선일보>는 신문통제의 국책(國策)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 방침(方針)에 순응(順應)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

지금 <조선일보> 스스로 일제의 국책과 총독부의 방침에 '순응'하여 폐간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다고? 그러면 우리가 여지껏 잘못된 역사를 배운 것이 아니냐고? 필자도 참으로 안타깝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인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럼 폐간사를 조금만 더 읽어보자.

"지나사변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고 더욱이 동아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한 것은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지금 <조선일보> 스스로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낮밤을 가리지 않고 충성을 다했다고 자백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당시 일반 국민도 모두 잘 알고 있던 사실이라고 토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계속 도저히 못 믿겠다는 말씀만 연발하시면 필자도 더 이상 설명 드릴 의욕이 없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결국 <조선일보>는 반일 성향이 강했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기자들 덕분에 그나마 지금 '민족지'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제 와서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이 어쩌니 너스레를 떨면서 '사상검증'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웃기고 자빠진' 코미디가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8) <조선일보>는 '언론검열' 조치가 포함된 쿠데타를 '구국의 영단'이라고 찬양했다.

일부 독자 중에는 혹시 "다 지난 옛날 일 가지고 왜 그러냐"고 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탓할 수 없다. 그것도 '다 지난 옛날 일' 아닌가. 절대 오해는 하지 마시라. 우리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바로 잡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과거' 없는 '현재'와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요지는 <조선일보> 문제도 그런 식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듯이 그 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조선일보>는 해방된 나라에서도 또다시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다.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가 포함된 군사쿠데타를 '구국의 영단'이라고 찬양한 것이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 <조선일보>는 유신쿠데타를 '구국의 영단'으로 찬양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배신했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이경재 의원(한나라당)의 저서 <유신쿠데타> 표지.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국회해산, 대학휴교, 언론검열 조치 등을 포함한, 즉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 원칙을 처참하게 유린하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그것이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의 사전포석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그해 12월 28일자 사설에서 이 조치를 '구국의 영단'이라고 찬양했다.

생각해 보라.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가 포함된 쿠데타를 '구국의 영단'이라고 찬양한 신문이 과연 신문인가. 솔직히 그건 신문이기를 이미 포기한 것이다. 아마도 히틀러 시대에도 이렇게 보도한 신문은 없지 않았을까.

1998년 당시 필자가 최장집 교수를 마녀사냥한 <조선일보>를 가리켜 "마조히즘적 정신분열 증세가 감지된다"고 비판한 이유도 바로 이 기사 때문이었다.

(바로 이렇게 '불법적인' 쿠데타를 '구국의 영단'이라고 찬양했던 <조선일보>가 작년에는 모든 지면과 기자를 총동원해 정부의 '합법적인' 언론사 세무조사에 극렬 저항하며 '언론자유'를 외쳤던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 작태인가를 방증해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민주주의란 대의를 위하여 움직인"(AFP 5월 25일자에 등장한 표현) 광주시민을 "난동자"(<조선일보> 5월 25일자, 전 주필 김대중 씨가 작성한 기사)라고 보도한 그들이 아닌가.

(9) "야, <조선일보> 니네나 잘 해!"

자, 할 말은 많지만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왔다.

물론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다음에 소개하는 발언만을 꼭 참조하기 바란다. 필자가 광화문 사거리에서 지나가던 한 시민을 붙잡고 기사 내용을 간략히 설명한 뒤 총평을 부탁하자 그는 <조선일보>라는 제호가 붙어 있는 코리아나호텔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뭐? 대선후보 검증이라고? 웃기는 작자들이구만. 야, <조선일보> 니네들이나 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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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