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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전 세종대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동우 교수. ⓒ 오마이뉴스


글/정지환 기자 사진/이종호 기자

"박수근과 이중섭, 권진규와 오윤이 그랬듯이 그도 자신의 사람을 만든 것이다. 박수근과 이중섭, 권진규와 오윤의 자식을 알아보듯 김동우의 자식도 계보를 갖게 됐다."

조각가 김동우 교수(세종대 회화과. 52)의 작품세계에 대한 미술평론가 강성원 씨의 비평이다.

권진규에게 사사 받은 김 교수는 파리 8대학 조형미술학과와 이태리 까라라 국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한 뒤 유럽에서 활동하다 4년 전 귀국했다. 그는 조각가들에겐 꿈의 무대로 알려진 파리 FIAC 초대전(가나화랑)을 비롯해 프랑크푸르트 초대전(슈빈드화랑), 바젤 아트페어 초대전(샤롯데화랑), 퀼른 아트페어 초대전(샤롯데화랑), 니스 국제화랑제 초대전(가나화랑), 오사카 한국문화원 개관전, 제7회 국제조각심포지엄 등 기라성 같은 국제전에 참여해온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박수근, 이중섭, 권진규, 오윤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에게 비견될 만큼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인정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한국 조각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평가받아온 김동우 교수. 더욱이 그는 세종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실력파 교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최근 세종대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지금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한 조각가가 지난 3월 12일 세종대 교정에서 작심하고 털어놓은, '족벌사학 교수로서 4년간 겪은 참담한 고백'을 들어보자.

▲조각가 김동우 교수와 그가 조각한 모자입상. ⓒ 오마이뉴스 이종호


―유럽에서 활동하다 귀국했다고 들었습니다. 교수님이 세종대에 부임한 것은 언제입니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그곳에서 조각가로 작품활동을 하다 1996년에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유학을 떠난 것이 1981년이었으니 15년만의 귀국이었죠. 세종대학교 회화과 조교수로 임용된 것은 1998년 3월이었습니다."

―임용 당시 학교측으로부터 '특별한 제안'이 있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학교측으로부터 '조소 전공이 아직 없어 전임 시간 12시간을 다 채울 수 없을 것 같다. 부족한 시간 분은 1년에 한 점의 야외조각 작품을 제작하는 것으로 충당하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물론 석재, 공구 등 제작비는 학교에서 부담한다는 조건이었지요."

―첫 번째 작품 때문에 예술가로서 치욕적인 수모를 당했다고 하셨는데, 그 전말을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임용 첫해인 1998년 1년 동안 학교측의 제의에 따라 강의를 제외한 모든 시간과 정성을 다하여 작품 제작에 몰두했습니다. 여러 개의 저의 모형작품 중에서 주명건 이사장이 선택한 모자입상(母子立像)을 거대한 석상으로 입체화시키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죠. 그리고 약속대로 1년 후인 1999년 2월 초 작품을 완성하여 마무리 손질을 하고 있던 무렵이었습니다. 작품을 설치하기 전에 이사장이 사진을 보고싶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래서 이중화 총장, 류○○ 교수와 함께 이사장을 찾아가서 제 작품 사진을 보여드리게 되었습니다."

▲99년에 제작한 첫번째 작품과 함께 한 김동우 교수. ⓒ 오마이뉴스 이종호
김동우 교수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재연해보면 다음과 같다.

김동우 교수가 건넨 작품 사진을 보자마자 주명건 이사장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그러더니 이 족벌사학의 '이사장님'은 한국의 대표적인 조각가에게 감히 예술지도(?)를 하기 시작했다.

"김 교수의 작품은 여인의 인체 비례가 5등신 정도로밖에 안 보여. 그리고 머리가 너무 크잖아. 옛날에는 여자가 머리가 크면 시집도 못 갔다구. 그러니까 머리를 작게 바꾸고, 밑 부분 좌대(座臺)도 없애 버려요. 그대신에 다리를 좀 길게 늘려서 8등신 정도의 늘씬한 여인으로 고치라구."

김 교수는 주명건 이사장의 그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발언에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작품을 직접 만든 예술가로서 최소한의 소견을 밝혀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껴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의견을 피력했다.

"강인한 한국의 어머니 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날씬한 여체의 비례가 아닌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를 상징하는 건강한 인체 비례를 도입한 겁니다. 그리고 저의 작품 경향은 전반적으로 서구적 인체미(人體美)보다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미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와 관련 미술비평가 강성원 씨는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한 바 있다.

"김동우 여인좌상의 규모감은 적정한 불사의 낙인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대단하다. 규모감이 단순히 크기를 말하지 않듯, 김동우 여인좌상의 규모감은 크거나 작은 작품 규모 문제거나 작품의 인체 비례 문제가 아니다. 규모감은 오히려 인체 비례의 과장에서 돈독해지고 있다. 규모감은 형태의 의미를 해석하고 구성하는 작가의 미적 가치관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한 예술가의 '미적 가치관'조차 주명건 이사장에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했다. 김 교수의 '울분에 찬 증언'에 따르면 한마디로 그는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결국 주명건 이사장의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대화는 끝났다.

"그래도 너무하니 고치시오."

작업장으로 돌아온 김 교수는 며칠을 고민했다. 자신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사장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실 IMF 시절의 가난한 예술가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각한 갈등에 빠진 그는 인생과 예술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김 교수와 대화를 나눠보자.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결국 저는 인생과 예술의 본질은 진실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사장의 지도(?)를 감히 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예술가로서의 양심과 자존심마저 저버릴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소신껏 작품을 완성하여 학교에서 미리 지정해놓은 본관 정원에 작품을 설치했던 겁니다."

―교수라는 직장보다 예술가의 양심을 앞세우신 셈인데, 주명건 이사장과 학교측의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군요.
"이사장이 직접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학교측이 먼저 반응을 보였지요. 그러니까 작품을 설치하고 며칠 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양평에서 열린 교수 연수회에 가 있었어요. 그런데 학과장 허○ 교수가 저보고 학교에서 긴급 호출이 왔다고 같이 가야 한다고 재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문도 모르고 음악과 현○○ 교수의 차를 얻어 타고 허 교수와 함께 학교에 돌아왔습니다. 허 교수는 저를 박흥식 교무처장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박흥식 교무처장이 김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 처장은 그에게 다짜고짜 "작년에 임용될 당시 서류 한 장이 빠졌으니 부르는 대로 몇 자 적으라"고 했다. 그는 부족한 서류를 보충하는 것이라기에 별 생각 없이 받아썼는데, 내용인즉 "1998년 3월부터 2001년 2월말까지 3년간 세종대 회화과 조교수로 성실하게 근무하겠다"는 서약서였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박 처장이 서약 날짜를 임용 당시인 1998년으로 쓰라고 요구한 것이다. 김 교수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박 처장은 모든 신임 교수들이 다 쓰는 형식적인 문서라 하였고, 옆에 있던 허○ 교수도 "나도 썼어요"하며 거드는 것이 아닌가. 그런 분위기에서 그는 1년 전으로 소급한 날짜의 서약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며칠 후인 1999년 3월 초였다. 김 교수는 주명건 이사장으로부터 조교수 3년(1999년 3월 1일∼2002년 2월 28일) 재임용장을 받았다. 임명장 수여식에서 주 이사장과 악수까지 나눴기에 김 교수는 이제 모든 일이 끝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며칠 후 이번에는 교무처 장○○ 주임이 김 교수를 불렀다. 가보니 2001년 2월 28일까지 임용기간이 1년 줄어든 서약서에 서명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얼토당토않은 요구이기에 응하지 않고 박 교무처장을 찾아가 "임명장까지 주고 나서 내용이 다른 서류에 서명을 하라는 것이 무슨 경우인가"라고 따졌다.

그러자 박 처장은 거꾸로 "당신은 3년간만 있기로 하고 임용된 것이 아니냐"고 답했다. 김 교수는 박 처장에게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하느냐"고 했더니 "다들 그렇게 했다"는 답변이 전부였다. 김 교수의 입장에서 볼 때, 사실 "다들 그렇게 했다"는 답변은 전혀 논리성과 합리성을 갖추지 못한 근거가 아닐 수 없었다. 다시 김 교수와 대화를 나눠보자.

―그런데 학교측이 왜 뒤늦게 서약서를 쓰라고 했을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 1999년부터 신규 임용 교수들은 모두 서약서를 썼다고 합니다. 같은 과 동료인 김○○ 교수도 썼다고 본인에게 진술했지요. 그러니까 1년 전에 임용된 저는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학교측이 저에게만 강요를 했던 겁니다. 사실 주명건 이사장은 자신의 지시를 거부하고 세워진 내 작품을 보고 '당장 김동우 사표를 받아 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건의하여 3년이라는 기간으로 서약서를 쓰게 하는 것으로 '양보 아닌 양보'를 했던 것이었지요."

―처음 임용될 당시 다른 조건은 없었습니까.
"저는 1998년 임용 당시 '수업시간 부족분을 작품 제작으로 충당한다'는 것 이외의 어떠한 조건도 들은 바가 없으며 어떤 서류에도 서명한 바가 없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서야 제가 주 이사장의 '명령 불복종 괘씸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마 신성한 대학에서, 그것도 지성인으로 불리는 대학 교수를 상대로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리라고는 미처 몰랐습니다."

―학교측에 왜 서약서를 강요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습니까.
"물론 여러 차례 항의를 했지요. 저는 이중화 총장과 이덕분 학장을 찾아가 '무슨 대학이라는 곳에서 다들 그러더라는 막연한 근거로 인사 행정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들어올 때 전혀 없던 말이 지금 나오는 것은 결국 이사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괘씸죄가 적용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그 분들과의 대화를 지금 모두 공개할 수는 없지만, 어느 분께선 농담반 진담반으로 '다음엔 이거 내 작품 아니다 생각하고 이사장님 원하는 대로 해 주라'고 하시며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여 학교의 명예를 높이면 다 잘 될 것이라며 위로해주었습니다."

지금 세종대 교정에는 김동우 교수가 3년간(1998년∼2000년) 매년 1점씩 제작한 3점의 작품이 서 있다. 물론 수업시간 부족분을 보충한다는 명분으로 제작한 작품들이다. 주명건 이사장의 예술지도(?)를 받았던 첫 번째 작품인 '모자입상'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김동우 교수의 두번째 작품인 '가족상'. 이 가족상은 김동우 교수가 아닌 돌공장의 석공들에 의해 제작됐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런데 두 번째 작품과 세 번째 작품에서 상식적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두 번째 작품 '가족상'과 세 번째 작품 '모자좌상'은 사실 김동우 교수가 아닌 돌 공장의 석공들에 의해 제작됐다. 학교측에서 제작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김 교수에게 모형만 만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도 김 교수가 제작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름만 빌려주고 정작 작품 제작에 참여하지 못한 김 교수는 당시 예술가로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세 번째 작품 때는 제작비도 안 받고 돌 공장에 가서 마지막 손질을 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한편 김 교수에 대한 학교측의 모욕은 계속됐다. 김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1999년 학교측은 매월 27만원씩을 봉급에서 공제했습니다. 수업시간이 부족하니 그랬다는 것이 학교측의 설명이었지요. 물론 저는 나머지 2년간(1999년∼2000년)은 법정시간인 12시간 수업을 다 채웠습니다."

―수업시간 부족분을 작품 제작으로 보충하기로 했다면, 나머지 두 작품은 제작하지 않아도 됐던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따라서 저는 저의 대작 3점을 고스란히 세종대에게 강탈당한 셈이 됩니다. 다시 말해 '점잖은 사기'를 당한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혹시 사람들은 저에게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당장 교수직을 때려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그때는 그 어려운 IMF 시절에 저를 교수로 뽑아준 학교에 헌신하는 마음으로, 즉 기부금을 낸다는 심정으로 참았던 것이었지 기만당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재임용 계약기간인 3년이 지났다. 김동우 교수는 재임용 평가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됐다. 재임용 평가기준은 연구업적, 강의평가 등이다. 김 교수는 자신이 있었다. 누구보다 많은 국제전을 치렀고, 학생들의 강의평가도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다시 김 교수의 증언이다.

"지난 2001년 11월 14일 저는 재임용 대상자로서 교수업적 평가자료를 교무처에 제출했습니다. 1999년 3월 2일부터 2001년 2월 28일까지 조교수에 재임하는 3년 동안 가졌던 현대화랑 개인전 등 10건의 대외활동 자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과정에서 또 다시 기억하기도 싫은 악몽 같은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교수업적 평가자료를 제출하고 얼마 후인 작년 12월 초의 일이었습니다. 교무처 장 주임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는 제가 제출한 자료 중 1999년 3월∼6월경 발표한 작품의 제작연도를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1999년 3월∼6월경에 발표했으니 아마 제작은 1998년 말에서 1999년 초까지의 겨울에 했을 것'이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다음날 장 주임은 다시 2001년 11월 현대화랑 개인전에 출품하였으나 도록(圖錄)에 실리지 않은 5점의 작품 사진에 제작연도를 표기하여 제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솔직하게 답해주었습니다."

▲세종대 교정에 있는 김동우 교수의 세 작품 중 99년에 제작한 것에만 김교수의 사인이 새겨져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왜 학교측에서 제작연도를 물었을까요?
"저도 장 주임이 자꾸 제작연도를 일일이 점검하는 것이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었지요. 그랬더니 '1998년에 제작한 작품은 연구업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은 직원의 권한을 뛰어넘는 월권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당신이 교수업적을 마음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기초자료는 자기가 평가한다'고 하더군요."

―세종대는 교수의 전문영역인 연구업적에 대한 평가마저 일개 교무처 직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모양이지요.
"결국 이사장의 심기를 읽고 저를 어떻게 해서든지 재임용에서 탈락시키려고 하다 보니 그런 무리수를 두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연구업적을 평가하면서 제작연도를 따지는 것도 참으로 우스운 일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한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교수가 수년의 연구과정을 거친 끝에 역작의 논문을 발표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당연히 그 교수의 연구업적은 그 논문이 발표된 해가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세종대는 지금 일개 교무처 직원이 그런 상식적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합니다. 결국 학교측은 발표연도와 연구(제작)연도가 같아야 업적평가 대상이 된다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기발한 기준을 저에게 적용한 것이죠."

―결국 명령 불복종에 대한 이사장의 노여움이 3년이 지나서도 풀리지 않았던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비상식적 주장에 그들과 한바탕 고성이 오가는 격전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 순간 저의 심정은 참담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무처 직원들 앞에서 저는 마치 사냥꾼들에 쫓기다 포위되어 씩씩거리며 자포자기 직전 마지막 발악을 해보려는 가련한 짐승의 신세에 불과했던 겁니다."

―제작연도 기준을 적용해서 연구업적이 상당히 줄었습니까.
"1999년 발표했지만 1998년에 제작한 작품은 불인정함으로써 10건의 전시가 5건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기가 막힌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박 처장이 저를 불렀습니다. 가보니 연구처에서 올라온 교수업적 평가점수가 부족하여 좀 도와주려고 하니 학교에 있는 3점의 조각작품을 기증했다고 기증서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솔직히 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더 물러섰다가는 예술인과 지식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인간성 말살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평가하시라'고 했습니다. 물론 기증서 작성은 단호하게 거부했지요."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렇다면 연구업적 부족으로 재임용에서 탈락하게 된 겁니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학교측의 조각품 기증을 거부하고 얼마 후의 일이었습니다. '세종인의 밤' 행사에 참석했던 이중화 전 총장께서 저의 재임용 탈락 사실을 아시고 김○○ 교수를 통하여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그 분을 만나뵙고 1998년도에 제작한 작품을 연구업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선처를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이틀 후 아침 이중화 전 총장께서 전화로 제작연도 시비는 다시 안 나올 것이라 하더군요."

―재임용 여부를 평가하는 근거 중의 또 하나가 학생들의 강의평가인데, 그것은 어땠습니까.
"제가 직접 자랑하긴 쑥스럽긴 하지만, 저에 대한 학생들의 강의평가는 매우 우수했습니다. 2001년 1학기의 경우 강의 전반에 대한 평가를 보면, 5점 만점에 4.36이었지요. 전체 교수 평균인 3.85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2001년 2학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5점 만점에 4.44를 기록했는데, 당시 전체 교수 평균은 3.91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이사장의 '괘씸죄'에 걸렸다고 해도 재임용에서 탈락할 이유는 사라진 것 아닙니까.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더군요. 작년 12월 28일 저에게 재임용 탈락이라는 통보가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밀고 당기며 논란이 됐던 이른바 '제작연도 시비'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재임용 탈락의 사유는 전혀 엉뚱한 것으로 제시됐습니다."

―학교측에서 제시한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김동우 교수는 조소를 활성화한다는 조건으로 임용되었으나 그것이 충족되지 못하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죠."

―'조소 활성화'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세종대에도 '교수업적 평가기준'이나 '교원 재임용 규정' 같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학교에 있는 어떤 법적 규정이나 기준에도 '조소 활성화'라는 말은 당연히 없지요. 저는 물론 과 교수들도 당연히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기준이었다면 애초에 '조소 활성화'에 관한 자료를 제출하라고 했어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의를 제기하셨습니까.
"물론이지요. 저는 당장 이의서를 제출하고 '조소 활성화'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도 제출했습니다. 석사논문 6편 지도, 회화과임에도 졸업생 40명 중 7∼8명이 입체작품 발표, 우수한 강의평가, 국내 최고화랑 초대 개인전 및 중요 전시활동, 전시회 관련 신문보도 자료 등을 첨부하여 제가 무능 교수가 아님을 주장했던 겁니다."

―제출한 자료가 받아들여졌습니까.
"학교측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김동우 재임용 탈락'이라는 시나리오는 이미 짜여져 있었고, 제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론은 진작 나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결국 학교측은 이사장에 명령을 거부한 저 하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키기 위해 학교의 모든 규정마저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셈입니다."

―재임용에서 탈락한 순간 들었던 생각은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주명건 이사장과 세종대는 한 조각가를 교수로 4년간 임용하고서 조각 작품 대작 3점을 무상으로 제작하게 하고 이제 그만 나가라고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대화가 끝나자 김동우 교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세종대 교정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몇몇 예술대 학생들만이 김 교수를 알아보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현재 김동우 교수는 교육부에 '재임용 탈락 부당 이유서'를 제출하고 '강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교수직에 대한 애착은 이미 포기했다"는 김동우 교수. 그는 "예술가마저 한낱 노예처럼 여기는 족벌사학의 정체를 밝히는 일에 내가 나서는 것이 짧은 4년간의 대학 생활에서 얻은 최종 결론"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세종대 교수직은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어도 진실의 왜곡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김동우 교수가 조각한 모자좌상.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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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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