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동물들의 세계에 천착했던 EBS <다큐프라임>이 모처럼 야심차게 시사 다큐 시리즈로 컴백했다. 바로 4월 15일부터 30일까지 방영되는 6부작 돈의 얼굴을 통해서다. 지난 15일 방송된 '1부- 돈을 믿습니까'는 연기파 배우 염혜란이 다양한 캐릭터로 등장해 돈의 민낯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사람? 나르시시스트? 여러분이 생각하는 돈의 얼굴은? 새삼스레 왜 돈의 얼굴을 묻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이 시대에 신이 있다면 그게 누굴까'라고 생각해 보면, 다큐의 물음에 끄덕이게 될 것이다.

신이 호령하던 세상은 돈이 호령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전세계가 유일신 '돈'에 경배하고, 그 신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거기에선 이념도, 인종도, 무색하다. 돈을 중심으로 도는 세상, 어쩌면 돈의 얼굴을 묻는 게 늦었다 싶기도 하다.  

위기에 빠진 레바논, 유동성이 뭐길래? 
 
  <다큐프라임> 돈의 얼굴- '1부, 돈을 믿습니까' 관련 이미지.

<다큐프라임> 돈의 얼굴- '1부, 돈을 믿습니까' 관련 이미지. ⓒ EBS

 
다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2023년 7월 베이루트로 달려갔다. GDP도, 인구도, 우리나라의 1/10인 수준인 국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2023년 베이루트 사람들은 은행으로 달려갔다. 은행문을 발로 차는가 하면 화염병을 던졌다. 웬 폭도들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들이 은행에 돈을 예치했던 '예금자들'이라면 생각은 달라진다.  

'한 푼 두 푼 모아 은퇴 자금을 만들었다'거나 '치료를 받지 못하면 죽을 지도 모를 동생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 심지어 심지어 백만 달러 이상을 예금했다는 '큰 예금자'들의 시간과 인생을 잃었다는 절규와 토로는 남일 같지 않다. 

도대체 레바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현재 레바논의 돈 5백만 리라는 미 달러화로 환산하면 50달러가 채 되지 못한다. 즉, 레바논의 돈은 돈으로써 가치를 보장받지 못했고, 당연히 교환 가치를 잃었다. 즉 레바논의 돈은 이제 종잇조각에 불과하단 소리다. 그 종잇조각이라도 달라는데, 그 마저도 은행은 돈이 없다고 돌려주지 않는다.  

물론 그 배경에는 레바논의 현대사적 고충이 있다. 2006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발발했으며, 2014~2016년에는 국정 최고 지도자 자리가 공백상태였다. 그 와중에 부패는 심화됐고, 2020년 베이루트 항 폭발 사고까지 벌어지며 말 그대로 엎친 데 덮친 격인 상황을 맞이했다. 이 과정에서 경제는 붕괴됐고, 고객들에게 돌려줄 은행의 돈이 사라졌다. 이른바 '유동성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유동성 위기'라는 건 경제 뉴스만 좀 봤어도 낯설은 단어가 아니다. 우리 경제가 위기에 내몰릴 때마다 등장했던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유동성이 뭘까.  
 
  <다큐프라임> 돈의 얼굴- '1부, 돈을 믿습니까' 관련 이미지.

<다큐프라임> 돈의 얼굴- '1부, 돈을 믿습니까' 관련 이미지. ⓒ EBS

 
은행에서는 고객에게 돌려줄 돈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애초에 은행에는 고객에 돌려줄 돈이 없었다. 은행에 돈이 없다면 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다큐는 이에 대해 A, B, C, D 네 은행을 예로 들어 명쾌하게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A은행에 100만 원을 맡겼다. 하지만 A은행은 이 돈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정한 '지급준비금', 즉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준비금 10%(10만 원)만을 남기고 나머지 90%(90만 원)를 다른 고객에게 빌려준다. 만약 이 고객이 그 돈을 다시 B은행에 맡기면 B은행 역시 마찬가지로 10%(9만 원)를 남기고 나머지(81만 원)를 대출해 준다.

이런 식으로 A, B, C, D 은행으로 돈이 돌고 돌면, 처음 100만 원이던 돈은 343만9천원으로 불어난다. 무(無)에서 유(有)로, 돈을 빌려주며 돈이 돈을 만드는 마법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예금을 인출하려 들면 당연히 레바논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명목 화폐의 특징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는 돈을 '물'과 같다고 정의한다. 마치 물이 흐르듯 돈도 그렇게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휘감아 흐르며 자신의 몸을 불려가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돈이 오가는 것, 그리고 그걸 사람들이 믿고 거래를 하는 그 '배후'에는 국가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통화 발행을 담당하고, 그와 함께 국가가 돈의 가치를 보장한다. 그저 종잇장, 더 나아가 '가상의 신용'으로 오가는 화폐에 대한 믿음, 그 근저에는 국가에 대한 신뢰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그러기에 레바논처럼 국가가 위기에 몰리면 국민 경제도 함께 흔들리게 된다.  

종잇장에 대한 믿음

물론 처음부터 그 종잇장에 대한 믿음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다큐는 거슬러 중국의 송 왕조로 간다. 2023년은 최초의 지폐가 나온 지 1000년이 되는 해였다. 바로 천년 전 송나라는 교자(交子, 세계 최초의 종이 돈)라는 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를 발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송나라에는 돈을 훔치는 도둑이 없었다는데 그 이유가 돈으로 통용되던 철전이 너무 무거워서였단다. 쌀 한 말을 사려면 15kg의 철전이 필요했다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지폐의 탄생과 함께, 이른바 유동성의 위기가 배태됐다. 송나라에서는 교자를 철전과 교환시켜 주었다고 한다. 교자 한 장을 철전 770개로. 교자의 발행을 일정한 수로 유지하고자 했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교자를 마구 찍어냈고, 바꿔줄 철전이 떨어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교자의 가치는 떨어졌고 왕조도 그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어디 송나라뿐인가, 금나라도, 원나라도 과도한 지폐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로 국가 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몇 년 전,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각국은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많은 돈을 풀었다. 하지만 그 돈은 주식시장, 가상 화폐 시장, 부동산 시장이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고, 오늘날 세계 경제는 아슬아슬한 유동성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1944년 당시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국 뉴햄프셔 주에서 브레턴우즈 회의가 열렸다. 미 달러(USD)를 기축통화로 하여 금 1온스를 35달러에 고정하자는 이른바 금본위제도를 만든 것이다. 이로써 다른 국가들의 화폐는 미 달러와의 환산 가치에 묶이게 됐다. 하지만 1971년 미 닉슨 대통령은 자국의 경제적 침체를 돌파하기 위해 달러와 금의 교환을 더는 하지 않겠다며 금본위제를 폭파해 버렸다.

그 이후, 세계는 '신용'이라는 이 아슬아슬한 믿음의 제국 안에 자국의 경제와 화폐를 묶어 놓았다. 그래서 레바논에서 보듯이, 그리고 지난 몇 십년 간 경제 위기 때마다 우리 나라가 그러했듯 국가적 신용이 위태로워질 때 국민 경제도 동시에 널뛰게 되는 어려움을 자초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다큐가 첫 번째로 보여준 돈의 민낯이다. 
EBS다큐프라임 돈의얼굴 돈을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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