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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갔던 취미 수영, 그런데 수영 후 샤워를 마치고 몸무게를 달아본 한 할머니가 "또 1킬로 늘었네" 한다. 족히 일흔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여전히 몸무게에 신경을 쓰는 게 기이하다 생각했다가, 내 주변의 여자들을 생각해 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싶었다. 

중장년의 친구들이나 지인들 중 일부는, 충분히 날씬한데도 허구한 날 '아직 다이어트 중'이라거나 '다이어트 좀 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니 말이다.

도대체 여자들에게 몸은 무엇일까? 몸이 어떤 기표이기에 그토록 날씬해 보이고 싶어 안달인 걸까? 

불안을 거식으로 잠재운 소녀 
 
거식증을 다룬 <먹지 못하는 여자들> 책표지
 거식증을 다룬 <먹지 못하는 여자들> 책표지
ⓒ 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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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몸을 갈망했던 저널리스트 해들리 프리먼은 섭식장애 생존자로서 자신이 겪은 병을 기록했다. 섭식장애에 빠져드는 소녀들이나 소녀의 주변인들, 섭식장애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려운 고백을 풀어냈다(책 <먹지 못하는 여자들>).

국내에서는 20년간 거식증을 겪은 박지니가 쓴 <삼키기 연습>이 출간된 바 있다(관련 기사: "우린 마르고 예쁜 여성이 되려는 게 아니에요" https://omn.kr/27m58 ). 
 
"거식증이 사실은 음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온몸으로 말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성애화에 대한 공포이자 여성성에 대한 공포라는 것, 슬픔과 분노에 관한 것이자 자신은 완벽할 것이라 기대되는 존재이므로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믿음에 관한 것임을, 그리고 세상에 의해 완전히 압도된 느낌이 들고 그래서 이해하기 쉬운 단 하나의 규칙('먹지 마')만을 갖춘 새롭고 더 작은 세상을 만들어내려는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p. 21)

해들리는 평범한 아이였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붙어있던 단짝과 집에 와서도 몇 시간씩 전화 통화를 하고, 저녁이면 슈퍼 마리오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고, 간식으로 시리얼을 두 그릇씩 해치우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14살, 거식이라는 트랩에 걸렸다. 

결정적 사건이 있긴 했다. 화장실에서 불안을 달래던 해들리는 선생님에게 들켜 "착한 여자애는 그런 짓 하는 거 아니야"라는 혐오 섞인 꾸지람을 듣는다. 선생님의 경고가 해들리의 "뇌에 화상처럼 각인"되며 그의 인생은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을 지난다. 착한 소녀가 되기 위해 자신의 필요나 바람, 욕구 등을 억압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는 14살 소녀에게 몸을 통제하라고 알려왔다. 

사회의 메시지를 수용하면서 사회의 명령에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방식, 자신을 벌하는 동시에 주변인을 고통스럽게 해 벌하는 방식이 그에겐 거식이었다. 이 책의 원제가 <Good Girls>, 즉 '착한 소녀'인 이유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착한 소녀' 되라는 말에 걸려 넘어진 아이들

해들리는 "불안한 아이였다". 사춘기를 지나며 가슴이 부풀고 엉덩이가 커지고 허리가 잘록해지는 성인 여자의 몸이 되는 것이 싫었다. 성인 여자가 되어 감당해야 하는 성애화된 몸이 두려웠다.

성인 여자로의 이행을 막기 위해, 몸의 성장을 멈추기 위해 음식을 차단했다. 음식을 중단하면서 불안이 사그라들었다. 굶주림으로 야위어가다 마침내 "해골처럼" 보이자 안심이 되었단다. 
 
"거식증은 모든 정신질환 가운데 사망률이 가장 높으며, 의사들은 아직도 어떤 환자가 회복하고 어떤 환자가 회복하지 못할지 예측하지 못한다. 나의 주치의는 어머니에게 혹시 모를 나의 죽음에 대비하라고 말했다. 나는 죽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회복하지도 못했다. 나를 에워싼 잿빛 안개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나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p.15) 
 
주로 여성이 90%라는 섭식장애, 거식증(자료사진).
 주로 여성이 90%라는 섭식장애, 거식증(자료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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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들리는 마를수록 착한 소녀로서의 효능감이 커졌단다. 거식은 중독과도 같아서, 탐닉하는 대상에만 몰두하게 된다. 모든 중독은 불가피하게 건강을 해친다. 해들리의 부모는 마침내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해들리가 처음 입원한 병원에서 만난 많은 거식증 소녀들은, 섭식장애가 해들리만의 케이스가 아니라 '소녀들의 병'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거식증은 주로 어린 소녀일 때 발병하는데, 90%가 소녀에서 여자로 진행한 여자들이다. 소녀들의 마른 몸에 대한 갈망은 패션 잡지에 등장하는 깡마른 몸을 한 패션모델로부터만 발신되는 것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접해온 이야기책이나 미디어는 착한 소녀는 마른 몸으로 나쁜 소녀는 뚱뚱한 몸으로 그려왔다. 물고기 비늘에 바닷물이 스미듯, '마른 몸이 착한 몸'이라는 생각이 소녀들을 잠식했다.

성장기 거식은 때로 불가역적인 자국을 남긴다. '굶주린 뇌'라 불리는 거식증에 걸린 뇌는 백색질과 회백질이 줄어들며 외관상으로도 쪼그라들고 특히 해마의 위축을 낳아 기억과 학습 결손으로 이어진다. 거식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증가시키고 세르토닌을 감소시키며 우울증으로 연결돼 심리적 악순환을 낳는다.

해들리는 고군분투 끝에 거식에서 회복되며 무엇이 소녀들을 거식으로 몰아넣는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그의 긴 회복을 지켜봐준 엄마에게서 들은 얘기는 거식에 대한 한 단서를 제공한다. 해들리의 엄마 역시 소녀 시절 거식증을 겪었고 먹는 것보다 먹지 않는 것에 큰 위안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먹지 않으며 야위어가는 엄마의 몸을 할머니가 좋아했다는 토로였다. 또 엄마의 사촌이 폭식증으로, 아버지의 사촌이 거식증으로 고통받았다는 가족력 등을 통해 거식증이 유전의 자장 안에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몸을 학대하는 일 

유전이니까 사회는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유전자 환원주의는 더 이상 생물학의 지배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개인이 처한 환경에서 겪는 경험이 심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후성유전학에 귀 기울여야 한다.

즉 해들리처럼 어려서부터 받은 무수한 사인, 마른 소녀가 착한 소녀이며 성인 여자가 된다는 것은 수많은 외부 제약에 놓이게 된다는 속삭임을 지속적으로 듣는다면, 거식이라는 극단적 자기 학대로 이어지면서 마치 스위치가 켜지듯이 환경이 유전을 발현시키는 것이다.

젊어서건 늙어서건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사랑하기는 지난한 일이다. 맛있는 음식을 조금 먹으면서도 살이 찔 것을 걱정하고, 많이 먹는 것은 무식하거나 비윤리적으로 여겨져 비난받는다.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년작)>에는 늙어서도 남편으로부터 "많이 처먹는다"라고 수모를 겪는 노인 여성이 등장한다. 먹는 게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엔 '바가지 밥 보고 며느리 내쫓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여자들의 음식은 늘 감시와 지탄의 대상이었다.

생각해보면, 남자들의 고봉밥이나 식욕을 문제 삼은 역사가 있던가. 이는 여자들을 먹는 음식을 통해 통제하고자 했던 가부장제의 계략일 수 있겠다. 
 
한국에서도 지난 2월 말,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당시 '섭식장애 인식주간' 세션1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토크 포스터.
 한국에서도 지난 2월 말,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당시 '섭식장애 인식주간' 세션1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토크 포스터.
ⓒ 섭식장애인식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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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에서 몸무게를 달아보며 고작 1킬로 늘어난 몸을 보고 한숨 쉬던 앞선 여성 세대는, 가부장이 주조한 여자의 몸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몰랐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후대는 밥(식욕)의 통제가 몸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통치 기제임을 알 수 있다. 먹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다. 

거식이든 폭식이든, 결국은 몸을 학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학대해 얻은 마른 몸이 성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질병의 회복을 위한 식이요법으로의 다이어트가 아닌 한, 먹는 것으로 스스로를 옥죄며 가부장 질서에 헌신하지는 말자. 

무엇보다 어린 소녀들의 몸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는 말자. 나를 단지 내 몸으로만 평가하려는 권력을 상대에게 허락하지 말자.

그럼에도 만약 누군가 내가 먹는 것을, 내 몸에 대해 평가하거나 혐오하고 다그친다면? 그땐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배우 나문희처럼, 밥그릇을 아예 던져 버리자.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시됩니다.


먹지 못하는 여자들 - 마르고 싶은 욕구로 오인된 거식증에 관한 가장 내밀하고 지적인 탐구

해들리 프리먼 (지은이), 정지인 (옮긴이), 아몬드(2024)


태그:#먹지못하는여자들, #섭식장애, #거식증, #여성혐오,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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