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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관리자가 이주민 청년들과 잠깐 얘기를 나누고 가버린 후, 이주민 청년 둘이 설치를 시작했다.
 한국인 관리자가 이주민 청년들과 잠깐 얘기를 나누고 가버린 후, 이주민 청년 둘이 설치를 시작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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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집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할 때였다. 한국인 관리자와 함께 동남아시아 출신으로 보이는 이주민 청년 둘이 왔다. 한국인 관리자가 이주민 청년들과 잠깐 얘기를 나누고 가버린 후, 이주민 청년 둘이 설치를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능숙한 솜씨로 손발을 척척 맞추더니 반나절 만에 일을 마쳤다. 고맙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공사장 노동 인력 대부분이 이주 노동자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내 집 마당에서 이주 노동자가 일하는 것을 목격하니 격세지감이었다.

나의 격세지감은 사실 난센스다. 보려 하지 않았을 뿐, 저임금 노동이 있는 곳 특히 한국인이 더 이상 하려 하지 않는 노동 현장 어느 곳이든, 이주 노동자는 있었기 때문이다. 맹장 수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중증 환자를 돌보던 돌봄 노동자 대부분이 이주민 여성이었고, 포장 이사를 돕는 일손 대부분이 이주민이며, 고기 쌈 싸 먹는 깻잎 따는 농촌 일손 대부분도 이주민이다.

다들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지만, 이제 이들의 노동이 없다면 한국은 굴러가지 않는다. 삼백만 이주민 시대라고 하는데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어떤 위치에 있을까? 이주에 전착한 세계적 사회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헤인 데 하스의 첫 대중서 <이주, 국가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주에 대한 숱한 오해를 불식시키며 한국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책 <이주, 국가를 선택하는 사람들>
 책 <이주, 국가를 선택하는 사람들>
ⓒ 세종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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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난민의 위기와 더불어 이주가 사상 최고치이며 통제되지 않는다는 두려움일 것이다. 보트를 타고 이동하다 죽은 사람들을 전시하는 보도나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 멕시코 국경을 높이 쌓고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장면들은 오해를 배가시킨다. 하지만 실상 이주는 이런 자극적 보도와 달리 급속히 증가하지 않았으며 난민의 수 또한 그렇다.

UN 인구국의 데이터에 따르면, 1960년 전 세계 국제 이주자는 9300만 명, 2000년 1억 7천만 명, 2017년 2억 4천7백만 명으로 크게 증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 세계 인구가 1960년 30억, 2000년 61억, 2017년 76억으로 증가한 추세를 반영하면, 이주자 비율은 대략 3%로 안정적 수준을 유지해 왔다. 이중 난민의 비율은 7~12%로 세계 인구 대비 0.3%에 불과하다.

오히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국제 이주 수준이 더 높았는데, 이는 유럽 각국이 저마다 식민지를 개척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로 자국의 선교사, 행정가, 기업가, 노동자를 대거 이동시켰기 때문이다. 1846년에서 1940년까지 이동한 인구는 1억 5천만으로 이는 유럽 인구의 12%로 오늘날 주요 이민 송출국의 이출 비율보다 훨씬 높다. 당시 이들이 타국으로 이동해 정착하며 도착국 원주민의 동의를 얻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이후 식민주의 이주 러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막을 내리고, 유럽의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탈식민주의 이주'(비유럽 출신 이입민이 유럽으로 이동)가 시작되었다. 노동력 부족이 야기한 국제 이주를 마치 통제 불능의 불법 이주민이 난입한다고 선동하는 것은 유럽 중심적 세계관의 반영이자 정치인의 선동 수사일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한국 사회도 많은 이주가 있었다. 일본은 조선의 식민 지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많은 자국민을 조선에 이입시켜 정착시켰고, 조선인에겐 만주와 조선이 하나라는 '만선사관'을 주입해 마치 만주를 기회의 땅인 것처럼 미화해 많은 조선인을 이출시켰다. 어디 만주뿐인가. 각박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선인들은 연해주, 일본, 하와이, 남미 등 낯선 땅으로 떠나 그곳에서 고된 삶을 이어갔다.

먼 식민지 역사만이 아니다. 영화 <국제시장>이 그리듯, 한국전쟁 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 노동자들이 독일의 광부나 돌봄 노동자로 떠나 그곳에서 벌어들인 돈을 본국에 송금해 한국의 가족을 먹여 살렸고 경제를 견인했다. 저자가 주장하듯 이주는 가장 효과적인 개발 원조였다. 세계적 규모의 개발원조금은 부패한 정권이 빼돌리거나 국가 공무원과 값비싼 컨설턴트 개발 전문가의 배를 불리는 데 악용되어 피원조국의 소득과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실패해 왔다.

이주민은 토착민의 몫을 빼앗지 않는다 

또 하나의 깊은 오해는 이주민이 토착민의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을 낮출 뿐 아니라 복지국가의 근간을 흔든다는 억지다. 이는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을 일별해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주민의 노동은 토착민과 경쟁하지 않는다. 이들은 한국인이 더 이상 종사하지 않는 '3D 업종'에 분포되어 노동 공백을 메워주고 있으며, 한국의 고용허가제는 고용주의 허락 없이 이직이 자유롭지 못하다. 임금을 두고 토착민과 경쟁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주민이 복지를 침식시킨다는 오해도 터무니없다. 이들은 건강 보험료 등 비싼 복지 비용을 감당하고 있으며, 정주와 함께 소비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나는 대형 마트나 소규모 마트에서 물품을 구입하는 이주민을 자주 목격한다. 이렇듯 이주민들은 한국의 복지를 침식하지 않으며 오히려 소비에 참여함으로써 지역 경제에 기여한다.

2021년 OECD 의뢰를 받은 경제학자 아나 다마스 데 마토스가 서구 25개국 이입의 재정적 영향을 연구한 결과는 GDP ±1% 이내의 미미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또한 크리스티안 더스트만과 토마소 프라티가 영국에 미친 이주의 재정적 영향을 연구한 결과, 이입민은 복지 및 공공 서비스로 혜택받는 비용보다 더 많은 돈을 세금으로 납부하고 있었다. 저자는 토착민의 고용과 저임금 문제는 이입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노동시장 규제를 완화하고, 고용 안정성을 떨어뜨리고, 노조를 약화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잠식해 임금을 하락시키고, 소득 불평등을 확대하는 정책을 견지하고 있지 않은가.

또 하나의 심각한 오해는 이입민 다수가 합법적 일자리를 찾아 이동해 합법적으로 살고 있음에도 자주 범죄자로 낙인 찍힌다는 점이다. 특히 마약 반입범이나 강간범이라는 오해가 주된 프레임인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 멕시코 국경 엘파소나 샌디에이고의 범죄율 연구는 이입이 오히려 강력범죄율을 낮춘다고 밝히고 있으며, 1990년부터 2014년까지 미국 모든 주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이주자 인구가 늘어도 그 주의 범죄가 증가하지 않는다고 확인되었다. 오히려 이주민에 대한 편견(수많은 미디어의 재현에 이주민이 범죄자로 등장한다)과 인종차별적 프로파일링이 이들을 범죄자로 몰아 더 가혹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현저히 높지만 이는 무시되고 있다.

책은 이주에 대한 얼마나 많은 오해가 사실로 조작되어 인식되었는지 탈진실된 현실에 경각심을 가지게 한다. 또한 이주에 대한 수많은 오해가 실은 이주민의 문제가 아니라 이주민이 도착한 도착국의 정치 사회적 역량임을 깨닫게 한다. 불평등 심화, 고용 불안정, 저임금 등 노동착취를 해결하지 않고 노동의 존엄성을 깡그리 짓밟은 채, 자국 노동자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떠난 빈자리를 이주 노동자의 일손으로 손쉽게 채우려 드는가.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노동력 공백을 채우는 이주민의 노동을, 임시 노동자, 이등 노동자 혹은 우범자로 타자화하고 혐오하려 드는가.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지 않고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의 노동이든, 계급,젠더, 인종 등을 넘어, 소중하지 않은 노동은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 게시할 예정입니다.


이주, 국가를 선택하는 사람들 - 이주는 빈곤, 기후위기, 고령화사회의 해법인가, 재앙인가

헤인 데 하스 (지은이), 김희주 (옮긴이), 세종(세종서적)(2024)


태그:#이주국가를선택하는사람들, #이주, #이주에대한오해, #이주노동, #헤인데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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