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게임>의 흥행 화살, 사실 한국에선 고꾸라졌다. 4편에 걸친 시리즈는 총수익 약 29억 6000달러, 한화로 4조 276억 원이고 서막을 올린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은 당시 세계 영화 흥행 순위 9위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60만을 겨우 넘겼다. 흥행 실패를 둘러싼 영화계 진단은 넘쳤고, 단순했으며 동시에 단편적이었다.

'여성 주연 영화라서 그렇다', '해외용 판타지물에 공감하기 어렵다', '소재가 대중적이지 않다'. <헝거게임>의 베이스는 데스게임. 지금까지 사람 목숨 걸고 게임하는 콘텐츠가 그리 없었나? 벌써 흥행작 몇 개가 머리를 스친다. 진부한 분석 속에 한 시네필이 손을 들었다. "독재자를 극장 가서 또 볼 필요가 있나". 그의 말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통쾌한데, 쓰라린 평이었다.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 스틸컷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데스게임 말고 <헝거게임>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건 '독재자'. 판엠의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스노우'는 매년 헝거게임을 개최하여 한때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참히 탄압 당한, 12개의 구역을 통제한다. 시리즈는 독재자인 스노우와 혁명군이자 주인공인 캣니스의 역학 관계를 따라간다. 본 시리즈에서 스노우의 분량은 많지 않다. 전형적인 독재자 캐릭터에 그칠 뻔한 스노우, <헝거게임>은 오직 그를 위한 프리퀄을 선보였다.

지난 17일 개봉된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청년 스노우가 어떻게 판엠을 장악한 독재자가 되었는지를 담았다. 독재자가 되는 사람은 어떤 유형일까, 사이코패스? 영리한 사람? 스노우는 모두를 경악시킬 법한 답을 건넸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야말로 독재자가 될 수 있다고.
 
독재자의 변명, '세상은 원래 잔인해'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포스터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스노우, 그러나 가난했다. 돈이 없어서 욕실 벽에 붙은 대리석을 떼어 단추를 만들고 작은 구두에 발을 욱여넣었다. 장학금 발표만 기다리던 그때, 규칙이 바뀌어 우등생이 아닌 헝거게임에서 인상적인 멘토에게 수여하겠다고 한다. 멘토는 헝거게임에 출전한 12개 구역의 조공인, 즉 게임 플레이어를 돕는 역할. 스노우는 조공인을 돕다가, 끝내 사랑에 빠진다.

젊은 시절의 스노우는 누군가를 사랑할 만큼 인간적이다. 가족을 아끼고,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눈물을 글썽이고, 사랑하는 조공인을 살리기 위해 편법까지 쓴다. 동시에 인간을 꿰뚫는다. 눈치가 빨라서 권력자들의 수를 미리 읽고 처세에도 능하다. 결국, 스노우는 인간성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처음 헝거게임이 개최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잔인하다'고 평했다. 나와 똑같은 인간이, 경기장에 갇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무자비하게 죽이는 광경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스노우는 헝거게임의 판을 뒤집었다, 인간적이어서 잔혹하지 않도록.

'조공인에게 이입되어서 게임 보기가 괴롭다고? 그럼 그를 돕기 위해 후원해 봐. 게임에 끌려 나온 게 불쌍하다고? 우승자에게는 호화로운 포상을 줄 거야.'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조공인이 폭력과 탄압에 시달리는 시민이 아닌, 마치 슈퍼챗 후원을 기다리는 유튜버 같다. 스노우는 게임을 시청하는 사람들의 공감 능력을 교묘하게 꾀어내 헝거게임이란 폭력에 가담하게 하였다.

그의 악행은 끝나지 않았다. 권력자의 눈에 들기 위해 친구인 척 다가가 동료의 비밀을 밀고하고 진실한 학생인 척 행동하다가 총장을 살해한다. 마침내 산꼭대기에 내린 눈처럼 권좌에 오른 스노우. 그는 진실을 깨달은 양 뱉는다. "경기장에서만 헝거게임이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현실이 헝거게임 그 자체입니다."

그의 논리는 철저한 오류다. 영화 속 서로 간의 화합과 다정으로 살아가던 이들을 죽이고 약육강식의 룰을 적용하여 세상을 싸움터로 만든 건 스노우 그 자신이다. 친구의 애정, 총장의 진심, 사랑하던 이의 신뢰, 타인의 인간적인 감정을 저버리고 이용한 것 또한 스노우다. 비루한 독재자의 변명, 관객은 이미 그의 결말을 알고 있다. 시민에게 밟혀죽는 권력자의 말로(末路)를.
 
낮에는 시민을 죽이던 헌병이, 밤에는?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스틸컷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헝거게임> 시리즈가 아닌 프리퀄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늦은 밤, 펍에 모여 서로 뒤섞인 채 노래하고 춤추던 헌병과 시민들의 모습이다. 시리즈에서는 헌병이 일방향적으로 시민을 탄압하는 모습만 보여줄 뿐, 둘 사이 교류는 없다. 그러나 프리퀄 속 그들의 관계는 묘하다. 낮에는 시민을 단두대에 올리던 헌병들이, 밤에는 그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한다.

헌병의 이중적인 태도는 섬뜩하다. 밤에는 시민들과 대화하고 춤추며, 상대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던 그들이 군인이란 집단에 묶이자 무자비하게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밤에는 시민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지만, 낮에는 감옥에 갇혀 살려달라는 그들의 말을 가볍게 지나친다. <헝거게임> 시리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을 굳이 프리퀄에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프리퀄 <헝거게임: 노래하는 뱀과 새의 발라드>는 반복적으로 인간성의 입체성을 전시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절절하게 고백하는 스노우와, 사람을 죽이고도 동요하지 않은 스노우. 시민과 친구처럼 놀던 헌병과, 단두대에 그들을 세우는 헌병. 한 명의 사람 안에 대비되는 수많은 순간을 교차하며 영화는 묻는다. 과연 누가 헝거게임이란 데스게임을, 판엠이란 독재국가를 유지시켰는지.

영화는 답한다. 아주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이어서 꿰뚫다 못해 타인을 관통하는 이들이라고. 이쯤 되니 한국 관객들이 <헝거게임>을 피했던 이유를 알 거 같다. 플라톤의 말처럼 현실과 예술이 지나치게 닮으면, 그 순간부터 예술은 공포가 되고 관객은 즐길 수 없는 법이다.
헝거게임 노래하는새와뱀의발라드 프리퀄 노새뱀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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