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혹은 메리 1세, 1542-1587)은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의 8대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이다. 동시기에 같은 여왕이자 잉글랜드의 전성기를 이끈 엘리자베스 1세와는 '숙명의 라이벌'로도 유명하다. 당대에는 '미모로 사람을 홀리고 권력을 탐한 악녀'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현대에서는 '종교 분쟁과 왕위 갈등의 희생양이 된 비운의 미녀 군주'라는 새로운 해석까지, 메리를 바라보는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11월 21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26회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는 왜 메리를 도끼로 처형했나'편을 통하여 영국사를 풍미한 두 여걸의 악연을 조명했다. 박정규 강릉원주대학교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영국사 풍미한 두 여걸의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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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 tvN

 
메리는 스코틀랜드 국왕인 아버지 제임스 5세와 어머니 마리 드 기즈의 2남 1녀 중 막내로 1542년 12월 8일에 린리스고 궁에서 태어났다. 오빠들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아버지 제임스 5세마저 잉글랜드와의 전쟁 중 병으로 요절하면서, 메리는 불과 생후 6일만에 스코틀랜드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고, 결국 9개월만에 왕위에 등극했다.

메리가 태어날 무렵인 16세기의 영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1491-1547)는 종교개혁을 이끌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스코틀랜드를 끊임없이 침공했다. 헨리 8세는 궁지에 몰린 스코틀랜드를 손쉽게 차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4세 아들이던 아들 에드워드 6세와 메리를 결혼시킨다는 혼인 협정인 '그리니치 조약'을 맺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통합시키려고 했던 헨리 8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메리를 잉글랜드로 데려와 양육하겠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섭정이 된 메리의 어머니 마리 드 기즈와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세력들은 이에 반발하여 결국 조약을 파기한다. 이에 헨리 8세는 1543년 12월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스코틀랜드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1547년 헨리8세가 사망하면서 양국의 갈등은 새로운 양상을 띄게 됐다.
 
마리는 모국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조건으로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아들 프랑수아 2세와 메리의 혼인 조약을 맺는다. 스코틀랜드가 전쟁중이었음으로 메리는 안전을 이유로 성인이 될 때까지 지내는 조건으로 6살에 모국을 떠나 프랑스에 건너갔다. 볼모나 다름없는 생활이었지만 메리는 잘 적응했고 프랑스의 궁정문화를 배우며 성장했다.

"별들은 가장 아름다운 광채를 그녀의 눈에서 빌어오고 그녀의 모습에서 색채를 빌어와서 그토록 아름답게 빛났다."

스페인의 시인 로페 데 베가가 메리의 미모를 극찬하며 남긴 시다. 이처럼 메리가 당대에 이름을 떨치고 역사적으로까지 유명해진 계기는 바로 그녀의 '미모'였다.
 
성장한 메리는 백옥같은 피부와 넓은 이마, 밤색 눈동자, 우아하고 기품있는 자태를 지녔으며 시인들이 앞다투어 태양이나 오로라보다도 아름답다고 극찬하는 시를 경쟁적으로 헌사할만큼 아름다운 '절세미인'으로 자라났다. 시아버지인 앙리 2세 조차도 "스코틀랜드의 어린 여왕은 짐이 지금까지 본 아이들 중에 가장 완벽하다"고 감탄했으며 자신의 딸인 공주들을 메리보다 앞서서 걷지못하게 할만큼 그녀를 존중했다.
 
하지만 모두가 메리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앙리 2세의 왕비이자 시어머니였던 카테리나 드 메디치나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세력은 메리를 몹시 싫어했다.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한 개신교 세력들에게서 메리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기도 했다.

1558년 4월, 15살이 된 메리는 프랑수아 2세와 혼인을 올리고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세자비가 되었다. 그런데 메리가 결혼한지 반년이 지난 11월, 잉글랜드에는 훗날 메리와 숙명의 라이벌이 되는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불린은 남편 헨리 8세와 갈등을 빚다가 아들을 못낳는다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본래 엘리자베스 1세는 '반역자의 사생아' 취급을 받으며 평생을 살아갈 운명이었지만, 언니 메리 1세와 동생 에드워드 6세가 모두 요절하면서 헨리 8세의 유일한 자손이 된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 기막힌 반전이 벌어졌다.
 
초창기에 엘리자베스 1세의 입지는 불안정했다. 잉글랜드의 가톨릭 세력들은 시녀의 딸이자 사생아인 엘리자베스에게 왕위 계승권이 없다며 정통성을 부정했다. 그들이 엘리자베스의 대안으로 유력하게 제시한 인물이 바로 메리 스튜어트였다. 그녀의 친할머니인 마거릿 튜더는 헨리 8세의 누나로 스코틀랜드 왕가로 시집와서 제임스 4세의 아내가 되었다. 메리는 스코틀랜드 스튜어트와 잉글랜드 튜더 왕가의 모든 혈통을 이어받은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왕위계승자라는 것이다.
 
메리의 가장 극적인 후원자가 되어준 것은 시아버지 앙리 2세였다. 그는 메리의 공식 왕실문장에 프랑스를 상징하는 삼백합, 스코틀랜드의 적사자에 잉글랜드의 삼사자 문장을 더하며, 메리가 잉글랜드의 왕위게승자격을 갖췄음을 기정사실화됐다.
 
동시에 이는 현재 잉글랜드의 통치자인 엘리자베스 1세의 권위에 대한 도발이자 모욕이기도 했다. 메리 본인도 개인적으로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자라고 주장하는 것을 공공연하게 즐겼다고 하며, 엘리자베스 1세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1559년 시아버지 앙리 2세가 마상창 시합 도중 창에 눈을 찔리는 사고로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에 등극하면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 맞설만한 강력한 위상을 쟁취하는 듯 했지만, 동시에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잃게되면서 이때부터 그녀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를 견제하기 위하여 존 녹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세력을 후원하여 내전을 일으켰다. 1560년에는 메리의 어머니이자 스코틀랜드의 섭정이던 마리 드 기즈가 사망한다. 잉글랜드-스코틀랜드-프랑스 삼국은 종교전쟁을 끝내기 위한 '에든버러 조약'에 합의한다. 이 조약의 핵심은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에게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할 것을 압박하는 데 있었다.
 
비록 메리는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결국 조약체결을 막지는 못했다. 스코틀랜드 내전이 종료되고 그해 7월, 메리의 이복오빠이자 개신교 신자인 제임스 스튜어트가 섭정의 자리에 오르면서, 개신교 세력이 스코틀랜드를 장악했다.

메리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남편 프랑수아 2세도 1560년, 1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메리를 싫어하던 시어머니 카테리나는 메리와 그 지지세력을 변방으로 쫓아냈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메리는 프랑스 내에서도 입지가 불안해졌다.
 
프랑스에서 고립된 메리는 결국 13년만에 모국 스코틀랜드로의 귀환을 선택했다. 프랑스의 화려한 궁정에서 자라났던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우울한 기후와 전쟁으로 척박하고 황폐해진 모습을 목격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종교 갈등의 중심에 서야했다. 메리는 국민들 개개인의 신앙의 자유는 존중하되, 자신은 가톨릭 신자로 남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개신교 세력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메리는 개신교 세력을 대표하는 지도자인 존 녹스를 불러 협조를 구했으나 오히려 그는 여왕의 면전에서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의 신부가 될 수 없는 매춘부"라는 폭언을 퍼부었다. 정치적 입지가 약했던 메리는 여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녹스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메리는 자신의 불안한 입지를 극복하기 위하여 '재혼'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혀라고 했다. 그러나 메리가 가톨릭 교도나 왕족과 결혼하여 자신의 입지를 위협할 것을 우려한 엘리자베스 1세는 "다른 나라의 국왕과 결혼하는 것을 적대 행위로 간주하겠다"며 메리를 압박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1세는 왕족도 아닌데다 자신의 내연남이었던 로버트 더들리를 메리의 재혼 상대로 추천하기도 했다. 이는 메리에게는 심한 모욕이었고 엘리자베스의 제안을 단칼에 무시했다.
 
대신 메리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가의 후손이자 자신과의 4촌지간이었던 단리(헨리 스튜어트)에게 호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만난지 5개월만인 1565년 9월 17일 엘리자베스 1세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단리는 메리에게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그는 우유부단하면서도 자존심과 허영심이 강했고 메리에게 무례하게 굴며 스코틀랜드의 공동 통치권을 요구하기도 했다. 부부의 불화는 깊어졌고 개신교 세력은 이를 이용하여 두 사람을 이간질했다. 단리는 개신교 세력의 모함에 넘어가 메리가 총애하는 궁중악사 다비데 리치오를 내연남으로 의심하여 임신한 아내 앞에서 잔혹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메리는 한동안 왕권을 박탈당하고 외지에 유배당했다. 하지만 메리는 단리를 설득하여 다시 마음을 돌렸고 측근 보스웰 백작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하여 반역자들을 진압하며 왕권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1566년 9월에는 메리와 단리 사이에서 아들인 후계자 제임스 6세가 출생하는 경사가 벌어진다.
 
그런데 1567년 2월 10일, 단리가 머물던 숙소에서 의문의 폭발사건이 발생하고 여왕의 남편인 단리는 옷이 벗기고 목이 졸린 시체로 발견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만인 5월 15일 미망인이 된 메리는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놀랍게도 상대는 바로 보스웰 백작이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메리와 보스웰이 내연관계였고, 두 사람이 결혼하기 위하여 단리를 고의적으로 살해한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리했던 세 번째 결혼은 메리의 완전한 몰락을 초래하는 계기가 된다. 메리는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단리보다 자신을 곁에서 지켜준 보스웰에게 의지하다가 호감을 느꼈고 당시 보스웰의 아이를 임신하게되면서 하루라로 빨리 결혼하려고 했던 것. 하지만 아이는 끝내 유산되었고, 개신교 세력은 메리의 남성편력을 빌미로 '불결한 매춘부'라고 비난했다. 
 
개신교 세력은 메리와 단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를 새 국왕으로 추대했고, 메리는 다시 로크레벤성에 감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보스웰은 개신교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도주했고 해적생활로 연명하다가 덴마크 군대에게 잡혀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처럼 세 번의 결혼생활과 메리의 남자들은 모두 불행한 결말로 끝을 맺었다.
 
메리는 이후로도 포기지 않고 다시 한번 유배지를 탈출하여 지지세력을 규합했지만, 1568년 5월 13일, 메리파와 제임스 6세파가 맞붙은 '랭사이드 전투'에게 패배하며 더 이상 스코틀랜드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녀가 택한 최후의 도피처는 놀랍게도 엘리자베스 1세가 있는 잉글랜드로의 망명이었다.
 
메리는 왜 사실상 적국이자 평생의 앙숙인 엘리자베스 1세가 있는 잉글랜드행을 선택했을까. 메리로서는 이미 스코틀랜드도 프랑스로도 갈 곳이 없었고, 티격태격했어도 혈육이자 같은 여왕인 엘리자베스가 설마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잉글랜드에는 아직 메리를 지지하는 가톨릭 세력이 남아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고민 끝에 오히려 메리를 자신의 밑에 두면서 가톨릭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으로 그녀의 망명을 받아들인다. 메리는 전남편 단리 살인사건의 재판을 받는다는 조건을 수용하여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메리는 몇주간의 재판을 받았으나 결백을 완전히 입증하지 못했고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잉글랜드 성에 수감했다.
 
앙숙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초기에 메리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대우는 예상보다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여러 성에 번갈아가며 감금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풍족하고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세간에는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질투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천연두를 앓은 이후 얼굴의 흉터를 감추기 위하여 항상 하얀 분칠을 하고 가발을 쓰고 다녀야 했던 엘리자베스와 달리, 메리는 여전히 유럽 제일의 미녀로 유명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의 신하들마저 '남자들을 즐겁게 하는 재치있고 달콤한 태도를 지녔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항상 여론을 의식했던 엘리자베스는 속내야 어찌됐든 정치적 과시 차원에서라도 메리를 이용해야 했다.

'물과 기름' 같은 두 여왕의 공존
 
하지만 물과 기름같은 두 여왕의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겉으로는 메리를 배려하는 듯 했지만 실제로는 뒤로 메리의 남성편력을 이용하여 스캔들을 고의로 퍼트렸다. 고귀한 혈통인 메리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상대적으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로 자신의 정통성을 더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 이를 알게 된 메리도 로버트 더들리와의 관계 등 세간에 떠돌던 엘리자베스 1세의 추문을 모아 작성한 편지를 보내며 대놓고 역공을 가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무려 18년간이나 감금하는 것으로 보복하여 뒤끝을 드러냈다. 기나긴 세월이 흐르면서 메리의 찬란했던 미모도 조금씩 빛을 잃어갔다. 한이 맺힌 메리는 당시 24세의 잉글랜드 가톨릭교도 출신 귀족이던 앤서시 배빙턴라는 인물과 결탁하여 엘리자베스를 암살하려는 모의를 계획했다.
 
하지만 메리를 철저히 감시하던 엘리자베스는 이미 그들의 계획을 눈채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반란을 모의하는 서신을 증거로 확보했고, 관련자들은 모두 붙잡혀 사형당했다. 또한 엘리자베스는 스코틀랜드의 간섭을 막기 위하여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와 '버윅 조약'을 은밀하게 맺고 금전적 보상과 차기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매수했다. 이번에는 명백한 반란증거가 발견된 데다 유일한 희망인 아들 제임스 6세마저 등을 돌리면서 메리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1578년 2월 8일, 메리는 반란죄가 인정되어 끝내 사형을 선고받았다. 메리는 사형 당일날, 순교를 상징하는 붉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자신의 가톨릭의 순교자임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주여, 당신께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라는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메리는 도끼로 머리를 자르는 참수형을 받았다. 우연인지 고의인지, 사형집행인의 도끼질이 빗나가 메리는 세 번이나 고통스럽게 도끼를 얻어맞고 나서야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불과 45세였다.
 
메리가 처형되고 16년 후인 1603년 엘리자베스 1세도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6세는 영국 역사상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를 최초로 총괄해서 통치한 왕이 됐다. 개신교 신자였던 제임스 6세의 통치 아래서 영국은 완전한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기를 혼합하여 현재의 영국 국기의 유래가 되는 '유니언 잭'문양도 1603년 제임스 6세의 치세에서 처음으로 탄생했다.
 
"나의 끝이 곧 나의 시작이다."

메리가 남긴 어록은 의미심장하다. 메리와 엘리자베스 1세의 갈등은, 곧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간 오랜 왕위계승과 종교분쟁의 역사가 만들어낸 후유증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메리의 비극적인 최후는 아들인 제임스 6세에 의해 통합되는 밑거름이 된다. 분열과 전란의 역사는 종식되고 통합의 영국이 된 것이다. 어쩌면 메리는 왕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평생을 정략결혼과 왕위-종교분쟁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벌거벗은 메리스튜어트 엘리자베스1세 영국사 여인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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