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KAL 858기 폭발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항공 테러 사건으로 남은 비극이다. 이 사건으로 무려 115명의 목숨이 희생당했지만, 당시 희생자들의 유해나 세부적인 의혹들이 말끔히 풀리지 못한 상황에서 사건은 석연치 않게 종결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국의 정치적인 계산과 여론의 선정성이 맞물리며 정작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아픔이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어두운 진실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11월 2일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100회 특집으로 '공작 1987, 살아있는 블랙박스' 편을 방송하며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항공기 테러로 꼽히는 KAL 858기 폭파 사건의 이면을 조명했다.
 
1987년 11월 28일 밤 11시 30분, 승객 95명과 승무원 20명 등 총 115명을 태운 대한항공 858 여객기가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을 이륙했다. 해당 여객기에는 중동 파견 한국인 근로자들이 다수 탑승하고 있었다. 당시 중동에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근로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오랜만에 한국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날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고국에 있던 가족들도 공항으로 마중나와 남편, 아들, 아빠와의 반가운 재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비행기들이 속속 도착하는 와중에도 오직 바그다드발 비행기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가족들은 기묘한 분위기 속에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얼마 후 뉴스 속보를 통하여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KAL 858기가 버마 랑군 방면에서 돌연 실종되었다는 것.
 
본래 858기는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와 방콕을 거쳐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858기는 아부바디에서 15명의 승객이 내렸고 일부 승무원을 교체한 이후 다시 이륙했으나, 중간 급유지였던 방콕에 도착하지 않았다. 인도와 미얀마 사이에 있는 바다인 벵골만 '어디스' 일대에서 보낸 교신을 마지막으로 858기는 연락이 두절됐다.
 
비상사태가 걸린 대한민국 정부는 즉시 대책반을 꾸리고 실종 추정지인 방콕으로 조사팀을 파견했다. 여기에는 최창아 수사관을 비롯한 안기부(현 국정원) 요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부다비에서 사라진 2명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조사팀은 858기 실종의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탑승객 중 아부다비에서 하차한 승객 15인의 신원과 행적을 조사했다. 이 중 2명의 승객에게서 수상한 정황이 포착했다. 해당 인물은 일본 국적으로 70대 남성 하치야 신이치와 20대 여성 하치야 마유미였다. 이들의 동선을 분석한 결과, 불과 17시간 반 사이에 바그다드-아부다비를 경유하여 3번의 비행 끝에 바레인으로 넘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팀은 이들이 858기에 모종의 공격을 가한 용의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해외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고 용의자 역시 외국인이었기에, 자칫 여러 나라가 얽혀서 외교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정부는 극비리에 일본 측과 접촉하여 신이치와 마유미의 신원조회를 요청했다. 돌아온 회신은 놀랍게도 이들의 여권은 위조이며 두 사람 모두 일본인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용의자들은 아직 바레인을 떠나지 못한 상태였다. 바레인 한국영사관에서 현지 호텔들을 샅샅이 탐문한 끝에 두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김정기 바레인 영사는 이들이 묵고 있던 호텔을 찾아가 비행기 사고 소식을 알리며 협조를 요청했다.
 
신이치는 마유미와 부녀 사이라고 주장하며 유럽 여행을 하던 중 추워서 중동으로 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식 한자가 아닌 우리식 한자를 쓰는 허점을 드러냈다. 신이치는 영어에 서툴러서 한자를 사용하여 필담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김 영사는 신이치가 일본식 한자가 아닌 한국식 한자를 쓰는 것을 보고 그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또한 그가 예약했다는 비행편을 확인한 결과 출국 시점도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사관은 바레인 측에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두 사람은 다음날 새벽 바레인 공항을 통하여 출국하려다가 바레인 경찰에 의하여 구금됐다. 모든 것이 탄로났다는 것을 직감한 두 사람은 미리 담배에 은닉해둔 독약 앰플을 먹고 자살하려고 했다. 신이치는 그대로 사망했고, 마유미는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빠른 제지와 응급처치로 목숨을 건졌다. 안기부는 특유의 자살 수법을 보고 이들이 북한의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수사팀은 의식을 찾은 마유미에게 이름과 국적을 물었지만, 그녀는 본인이 중국인 고아이며 신이치의 집에서 일하다가 같이 여행을 왔을뿐 KAL기 실종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마유미의 압송을 담당한 최창아 수사관은 마유미의 자해를 막기 위해 마우스피스를 구매한 후 이를 그의 입에 물려 한국으로 데려왔다.
 
1987년 12월 16일, 마유미는 안기부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한국에 압송됐다. 그런데 마유미의 압송 장면은 놀랍게도 뉴스를 통하여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유력한 테러 용의자 마유미는 물론이고, 최창아 수사관을 비롯하여 비밀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안기부 요원의 얼굴까지도 방송에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최창아 전 요원은 "여태까지는 모든 게 비밀이었고 보안사항이었다. 그런데 정작 (마유미를 데려오는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를 다 시켜버리니까..."라고 당혹스러웠던 순간을 회상하며 "그건 아마 우리가 데려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윗선의)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공교롭게도 마유미의 한국 압송일 다음날은 13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선거 전날 테러용의자가 압송되는 모습이 생중계되고, 여객기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추정이 나오는 상황은 국민들의 심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여론의 관심이 마유미와 대선에 집중하던 가운데, 정작 아직도 행적이 묘연한 '사라진 858기'에 대한 소식과 진실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사실 마유미의 서울 압송 이틀 전, 미얀마 해안에서 구명정이 발견되었고, 고유 일련번호를 확인한 결과 KAL858기의 물건으로 드러났다. 폭발에 의해 추락 가능성이 처음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부 조사단은 마유미가 압송된 후 해당 여객기의 탑승객 전원 사망한 것으로 공식 발표를 하고 수색을 서둘러 종료해버렸다.
 
마유미는 처음에는 조사를 거부하며 거짓말로 일관했으나 조금씩 허점을 드러냈다. 중국어로 이야기하던 마유미는 수사관들이 주고 받는 한국어 대화에 무심결에 반응하며 자신이 한국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또한 수사관들을 마유미를 회유하기 위하여 그녀를 데리고 서울 구경에 나서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실제로 간첩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라고 한다.
 
과연 마유미의 마음은 흔들렸고 다음날 수사관들에게 가족들의 안부를 걱정하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수사관들은 "네가 자백을 안 하면 북한은 사건을 비밀에 부치기 위하여 가족을 해칠지 모른다. 하지만 네가 사실 대로 말하면 자기들이 한 짓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에, 차마 가족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마유미는 그때부터 조심스럽게 한국어로 자신의 본명을 고백했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김현희, 사망한 신이치의 본명은 김승일로 두 사람의 정체는 북한 공작원이었다.
 
김현희는 북한 외교관의 딸이자 아역배우 경험도 있었던 인물로, 평양외대 일본어과 재학 중 당에 소환되어 8년간 공작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1987년 10월 김승일과 함께 KAL858기의 폭파 임무를 부여받아 투입됐다.
 
1988년 1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858기 사고 조사 결과 발표 자리에 김현희를 직접 등장시키기로 결정한다. 김현희는 여기서 공식적으로 범행을 시인하고 북한의 지시를 받았음을 자박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교육받고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남한 현실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게 되었다. 죄를 지었으니 백 번 죽어 마땅하다"고 고백했다.
 
북한이 비행기 테러를 사주한 이유는,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체제 경쟁에서 한국에게 점점 밀리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북한은 테러를 통하여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개최할 만큼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을 조장하려는 공작이었다.
 
범인들은 외교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외국인 탑승객이 가장 적은 비행기를 선택했고,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바다 위를 운항하는 비행기를 타깃으로 선택했다. 그들은 휴대용 라디오와 술병으로 된 시한폭탄을 준비했다. 바다 위를 운항하고 있을 시간을 계산해 시한폭탄을 설정하고 비행기 탑승 후 좌석 선반 위에 폭탄을 올려둔 뒤, 경유지에 도착하자 폭탄만 남겨두고 빠져나갔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사건... 유족들 "지금이라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그런데 김현희의 자백 후 여론은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무려 115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수많은 유족들의 인생을 파괴했던 잔혹한 범행보다도, 김현희의 외모에 초점이 맞춰졌고,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불쌍한 모습으로 우호적인 동정론이 더 확산되기도 했다.
 
'김현희가 지닌 젊음과 미모, 집단 살인범과는 거리가 먼 청순한 인상, 알게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한일 남성들, 김현희에게 매료, 김현희에게 청혼쇄도', '북괴의 소모품, 죄있으나 기회주자' 당시 실제로 언론에 보도되었던 뉴스와 사설들이었다.
 
하지만 858기 참사의 유가족들에게는 아픈 상처를 두 번 헤집는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1987년 당시 부족한 수색 및 인양 기술로 유족들은 시신은 커녕 유품 하나조차 찾지 못했고, 희생자 분향소는 비어있는 관에 희생자들의 사진으로만 채울 수밖에 없었다. 한 유족은 "100명이 넘는 목숨은 흔적도 찾을 수 없이 떠도는데, 범인은 버젓이 밖을 활보할 수 있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고백하여 허탈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김현희는 재판을 거쳐 1990년 3월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불과 16일 만에 특별 사면 조치가 이루어져 법적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현희를 KAL기 폭파사건을 부인하는 북한의 거짓을 반박하기 위한 '살아있는 블랙박스이자 역사의 산증인'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격 사면을 조치했다. 면죄부를 받은 김현희는 이후 한국에 정착하여 결혼까지 하고 지금까지도 평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가족들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소중한 가족을 잃어버린 유족들은 국민들을 지켜주지도, 억울함을 해소해주지도 않는 국가와 정부의 무책임한 모습에 깊은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사고로부터 3년 후가 흘러, 태국에서 어부들의 그물망에 KAL 858기의 잔해들이 뒤늦게 발견됐다. 국과수는 정밀 조사를 거쳐 압축 충격에 의한 파손임을 확인했지만, 동체 전체가 발견되지 않아 해당 사건의 원인을 찾는 완벽한 조사는 어려웠다. 그나마 발견된 동체마저 현재는 폐기 처분되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어떻게 폐기되었는지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의구심을 자아낸다.
 
당시 여객기의 탑승객들은 대부분이 평범한 한인 근로자들이었고, 외국인이나 힘 있는 유력인사들은 거의 없었다. 유가족들이 사고의 책임을 문의하면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이 한 짓이니까'라며, 항공사에서는 '이건 사고가 아니지 않나'라는 이유로 저마다 책임을 회피하는 데만 급급했다고 한다. 유족은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힘이 없어서 이렇게 되는구나 생각하게 됐다"라고 밝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1987년의 비극적 그날로부터 3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KAL 858기의 잔해와 블랙박스, 희생자들의 시신은 여전히 멀고 깊은 바닷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다. 어쩌면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찾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유가족들은 아직도 '설사 헛걸음이 될지라도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확인해달라'고 호소한다고 한다. 
꼬꼬무 858기폭파사건 항공기테러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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