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벤처투자(kvic)의 모습.

한국벤처투자(kvic)의 모습. ⓒ 네이버 지도

 
2024년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예산이 약 14% 삭감된 가운데,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에서 관리하는 영상전문투자조합 출자 예산 250억의 운용을 둘러싸고 벌써부터 블랙리스트 시즌2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특히 이 250억 원의 운용을 총괄하는 한국벤처투자의 초대 부대표로 신상한 전 SH필름 대표를 선임해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벤처투자의 부대표는 이전에는 없던 직책이다.

신 부대표는 박근혜 정부 때 한국벤처투자 상근전문위원으로 위촉돼 활동한 인물로, 당시 영화 <사선에서>(개봉 제목 <출국>), <연평해전> <인천상륙작전> 등 친정권 작품 투자에 영향을 끼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은 이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상근전문위원 제도를 만들었다가 화이트리스트 핵심 관리자로 비판받자 자리를 없애기도 했다. (관련 기사 : 화이트리스트 논란 영화 '출국', 박근혜 시절 '밀어준' 증거들 https://omn.kr/1d3x6)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연루 의혹 당사자가 '신임 부대표'라는 직함으로 기용된 것.

정부 주도의 한국벤처투자는 중소벤처기업부 산하기관으로 여러 개별 투자펀드를 출자하는 형식으로 기금을 운영한다. 재원 공급은 정부가, 의사결정은 한국벤처투자가 담당한다. 영화 제작 투자의 경우 지금까지는 영진위가 모태펀드에 출자를 하면 한국벤처투자가 여러 민간 투자금과 함께 펀드를 조성해 특정 작품에 투자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하지만 영상전문투자조합 예산으로 책정된 250억원을 문체부 일반 회계 계정으로 만들면서 문체부가 펀드 조성에 직접 관여할 여지가 커진 셈이다.

실제 영진위 한 관계자는 "영상전문투자조합 출자는 영진위가 의견을 내고 출자 주체는 문체부가 됐다. 출자 주체가 문체부다 보니 한국벤처투자에 펀드를 조성해달라는 요청도 문체부가 하게 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눈물 겨운 영진위의 선택
 
 9월 23일 온라인으로 개최된  ‘영화산업 위기극복 방안 3차 토론회 : 영화의 확장과 지역영화’ 시작에 앞서 인사말하는 박기용 영진위원장

박기용 영화진흥위원회장 ⓒ 영화진흥위원회

 
이러한 우려는 지난 10월 7일 부산시 해운대구 영진위 라운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구체적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내년 영진위 전체 예산은 총 734억이고, 이 중 영화발전기금 464억 원, 일반 회계(국고)는 270억 원 규모다. 2022년 영진위 전체 예산이 1100억 원, 2023년 850억 원이었다. 단순 숫자만 봐도 전년도에 비해 2024년 예산이 약 14%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박기용 영진위원장은 "정부 부처 예산 삭감 기조에도 체육기금 300억 원, 복권 기금 54억 원 등을 받으며 재원 다각화 발판은 마련했다"며 "영상전문투자조합 출자가 2023년 80억 원에서 내년에 250억 원으로 증액됐다. 다만 영화발전기금이 아닌 일반 회계(국고)로 개정됐는데 같은 사업 내용이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해명에 이미 한국독립영화협회 등 국내 주요 영화계 단체는 크게 반발한 바 있다. 영화 제작 지원, 국내외 영화제 육성 사업 등이 크게는 절반 이상 예산이 삭감됐고, 특히 지역 영화문화 활성화 지원 사업, 지역 영화 기획개발 및 제작 지원 사업 예산은 전액 삭감됐기 때문이다.

예산 구성과 용처를 살펴보면 영진위 입장에서도 눈물겨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액 극장 수입 일부로 구성된 영화발전기금이 사실상 극장 산업 악화로 고갈 위기에 처하자 국고 차입 및 체육 기금, 복권 기금 차입으로 메워진 셈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또 있다. 우여곡절 끝에 숫자는 비슷하게 맞춰졌지만 그 용처가 제한돼 있고, 특히 영상전문투자조합과 펀드 부문에선 집행 주체 자체가 영진위가 아닌 문체부라는 점을 보면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 영진위가 직접 집행할 수 있는 내년 영화발전기금은 464억 원이다. 하지만 이 중 복권기금 54억 원은 장애인 관람환경 개선(46억 원)과 차세대 미래관객 육성(9억 원)에만 사용해야 한다. 즉, 영진위가 직접 계획해 운용할 수 있는 예산은 지난해의 절반 수준에도 못미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두 사업 모두 이전까지 영진위가 시행하지 않았던 신사업이다. 영화계와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된 사업으로 비판받을 여지가 큰 셈이다. 사업 목적 또한 영진위 설립 취지에 맞지 않다. 영진위가 공표한 설립 목적은 영화의 질적 향상 도모와 영화산업의 진흥이다. 구체적 임무로 17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차세대 미래관객 육성이나 장애인 관람환경 개선과는 관련성이 낮다.

오히려 '예술영화, 독립영화, 애니메이션영화, 소형영화 및 단편영화의 진흥', '지역 영상문화 진흥', '영화의 유통배급 지원'이라는 임무 항목을 확인한다면, 삭감되거나 사라진 예산의 사업이 영진위 본연의 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타 기금 차입을 이유로 용처를 제한한 것은 '영진위 운영계획의 수립·시행'과 '영화발전기금의 관리·운용'라는 임무에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사안이다. 정부 재원 사용을 빌미로 독립 위원회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박기용 영진위원장도 "예산 편성에 결정권이 없다 보니 한계를 가지고 갈 수밖에 없다"며 기자들에게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제2의 블랙리스트 되나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봤을 때 업계에선 사실상 블랙리스트 시즌2가 터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 한국 영화산업의 밑바탕이 된 독립영화나 지역영화 관련 예산은 삭감하면서 박근혜 정부때 처럼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비롯해, <택시운전사> <판도라> 등의 영화가 모태 펀드 투자를 거절당했던 것과 같은 사례가 다시 반복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다.

그나마 당시가 연간 극장 관객 2억 명이 넘었던 호시절이었기에 앞선 영화들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산업 전반이 침체기인 상황에 하향식 입김이 작용한다면? 콘텐츠 생태계 자체가 뿌리째 흔들릴 위험이 커 보인다.
한국영화 블랙리스트 영화진흥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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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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