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낮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차들은 멈추었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말없이 걷고만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또렷이 들리는 희한한 소리. 건강이 안 좋은 노인의 기침소리와도 같았다.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인 듯도 했다. 쉰소리. 알고 보니 개소리였다. 주인이 쥐고 있는 빨간 목줄을 따라 뜨거운 아스팔트를 발 빠르게 걷고 있는 개가 내는 소리. 개의 성대를 수술시키면 그런 소리가 난다고 했다. 개 짖는 소리를 못 내게 하는 이유가 뭐겠나. 인간과 함께 아파트에서 살기에는 개가 내는 본래의 소리가 이웃 간에 분쟁의 소지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개와 함께 살기 위해 개의 본성을 파괴한다. 과연 개도 자기의 목소리를 잃으면서까지 인간과 함께 아파트에서 살고 싶을까, 뜬금없이 개의 입장을 상상했다. 

그때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 중에는, 더운 여름인데도 마스크를 쓴 사람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가 가시지 않았다는 증거다.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당시, 각 나라들은 국경을 봉쇄했다. 타국과의 왕래를 통제했다. 사람들 간의 접촉을 막아 통행을 제한했다. 인간의 활동이 줄어들자, 야생동물의 출현이 잦아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코로나19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자연을 훼손한 인간에게 닥치는 재앙이라고 했다. 지구를 제패한 80억 인간이 무자비하게 자연환경을 지배하고 파괴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만물의 영장이 자연으로부터 받는 경고라니. 인간은 언제부터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했을까.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 유발하라리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에 따르면, 인간이 먹이사슬의 정점으로 뛰어오른 것은 불과 1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네안데르탈인을 포함한 다섯 종의 인간이 멸종하였다. 3만 년 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은 튼튼하고 머리가 좋으며 추위에도 잘 견뎠다. 사피엔스는 15만 년 전부터 동아프리카에 살다가 중동, 유럽, 아시아, 그리고 호주와 아메리카 등지로 퍼져갔다. 그러면서 다른 인간 종들을 멸종시켰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언어' 덕분이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인간의 언어는 놀라운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제한된 개수의 소리와 기호를 연결해 각기 다른 무한한 개수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신체적으로 나약한 인간이 모여서 살아가려면 협동이 필요하고 협동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정보 교환을 위해 '뒷담화'가 필요하였다고 하라리는 주장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언어는 진화하였다. 나아가서 인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까지 주고받는 단계에 이른다. 바로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가상의 실재, 바로 '신화' 덕분에 사피엔스는 대규모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살아간다. 그 신화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종교도 신화의 일종이다. 사람들이 돈과 유한회사의 존재를 신봉하는 것도 신화의 하나다. 인권 운동가들이 믿는 인권도 신화의 한 종류다. 사피엔스가 발명한 가상의 실재 중 주목할 것은 바로 '문화'다. 네안데르탈인은 사자가 어디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공유할 수 있었지만, 픽션을 창작할 능력이 없어 대규모의 협력을 효과적으로 이룰 수 없었다고 하라리는 말한다.

말을 하고 말을 듣는다는 것, 글을 쓰고 글을 읽는 보이지 않는 인간 간의 교류가 사피엔스의 고유 능력이라니. 어느 시인은, 현대는 지연(地緣)이나 학연(學緣)의 시대가 아니라 필연(筆緣)의 시대라고 말했다. 현대가 필연의 시대가 된 것은 현생 인류 문화의 필연(必然)이다. 언어생활이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최고의 능력이라고 하니, 이 '글'이라는 게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새삼 자부심을 느낀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은 확장되었다. 포메라니안, 비숑, 푸들, 진돗개, 풍산개 등의 개가 공존하듯이, 3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할 때까지는 우리 인간도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가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사피엔스(Homo Sapience)가 살아남아 현존한다. 구분하고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인간을 나누었다. 피부 색깔에 따라 인간을 구분 짓는 것. 거기에서 끝나면 괜찮았겠지만 인종 간의 차별은 악습으로 남아있다. 

지구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1만 2천 년 전에 농업혁명을 일으켰다. 수렵채취로 연명하던 인간은 심고 가꾸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노동이 생겨났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힘없는 인간은 동물의 힘을 빌어오기 시작했다. 가축이 생겨났다.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가축을 잡아먹기 시작했고, 기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동물의 수를 줄여 나갔다.

잉여 농산물을 비축하면서 개인 재산이 생겼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바로 계급. 잉여 농산물을 가진 지배자는 '상상 속의 질서'를 만들어 자기들이 먹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민을 다스리고 관리하기 시작한다. 나라 간 힘의 강약에 따르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5백 년 전에 일어난 과학혁명으로 나라 간 힘의 불균형이 생겨났다. 2백 년 전에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인간세계는 끝 모를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사회병리현상 또는 부작용에 대한 예측과 해결이 우리 사피엔스에게 남겨진 과제다.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하라리의 주장에 대하여 동의하는 바가 많다.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바로 제국에 대한 언급이다. 
 
"제국의 엘리트들은 정복에 따른 이익을 군대와 성채에만 쓰지 않았다. 철학, 예술, 사법제도, 자선에도 썼다. 아직 남아 있는 인류의 문화적 성취 중 상당한 몫은 제국이 피정복민을 착취한 덕분에 생겨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주의가 제공한 이익과 번역 덕분에 키케로와 세네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색과 집필을 할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이 인도 신민을 착취해서 축적한 부가 없었다면 건설될 수 없었다."(p.278)

제국의 식민지화에 큰 의의를 두는 저자의 말이 듣기에 불편하다. 하라리는 식민지를 근대화시켜 준 것에 대단한 호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식민지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원주민들이 생산한 물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도로를 만들고 넓힌 것이지, 식민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라리가 인도를 식민지배한 영국을 비호하는 대목이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하라리가 영국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하라리가 영국인의 시각으로, 제국주의자의 시각으로 보는 사관이 아닌가 한다. 식민사관. 일제가 한국침략과 식민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조작해 낸 역사관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엊그제 당나귀를 봤다. 몇 발짝 앞에서 88분 동안이나 함께했다. 당나귀의 머루빛 눈망울과 쫑긋한 귀를 보았다. 그렇게 가까이서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다. 당나귀가 '이오오' 소리를 낸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말을 닮았으되 말보다 작았고, 말처럼 달렸으나 말보다 느렸으며, 말같이 일했으나 말만큼 대접받지 못했다. 실제로 본 것은 아니고 스크린에서 봤다. 2023년 개천절에 개봉한 영화 <당나귀 EO>.
 
 영화 <당나귀 EO> 포스터

영화 <당나귀 EO> 포스터 ⓒ 찬란

 
영화 <당나귀 EO>에는 사람의 대사가 거의 없다. 내레이션도 없다. 당나귀를 비롯한 개 여우 늑대 돼지 말 등이 출연했다. 주인공은 당나귀다. 당나귀의 눈으로 본 인간 세상이 펼쳐진다. 인간의 구미에 맞게 훈련시키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며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사육한다. 당나귀는 인간의 언어가 불가능하므로 영화감독은 음악과 효과음 또는 불빛 등으로 당나귀의 마음을 전달한다. 하늘도 땅도 사방까지 붉은빛이 당나귀에게는 위협이다. 둥 둥 울리는 악기 소리와 또각또락 울리는 음향효과까지 당나귀의 두근대는 심정이 느껴진다. 좁은 사육 환경도 고통이다. 인간이 동물에 가하는 횡포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가 될지, 그건 만물의 영장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개가 되었든, 다른 반려동물이 되었든 그건 그 동물이 원한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제국주의 하에 있었던 나라가 스스로 제국의 통치를 받고 싶지는 않았을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피엔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생활에서 동물과의 관계를 완전히 제거하기는 불가능하다. 최소한도의 육류소비를 하는 것. 가축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것. 그리고 반려동물에 대한 배려까지. 만물의 영장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지 않겠나.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인류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 인간과 환경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이만큼만 되어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큰 문제는 없다. 새보다 빨리 날 수 있는 비행기도 있다. 치타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자동차와 기차도 있다. 사자나 호랑이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각종 기계도 있다. 더 이상 개발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 그렇더라도 각 나라는 과학을 발전시키고 군비경쟁을 할 것이다. 모든 나라가 동시에 셧다운을 하지 않는 한, 개발과 훼손은 지속될 것이다. 80억 사피엔스와 당나귀를 비롯한 여러 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은 무얼까 생각해 본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스토리에 중복 게재합니다.
사피엔스 당나귀EO 유발 하라리 공존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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