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엄마'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조선사에서 여성으로는 가장 유명한 인물중 하나이자, 우리에게는 오만원권 지폐를 꺼낼 때마다 만나게 되는 친숙한 위인이다. 오천원의 주인공인 아들 율곡 이이와 함께, 역사적 위인들만 선정된다는 화폐인물에 모자가 함께 선정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울만큼 한국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아이콘' '율곡을 길러낸 어머니'라는 당시 시대가 요구했던 모범적인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정작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진면목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측면도 컸다. 실제의 신사임당은 누군가의 배경을 넘어서 그 자체로 당당한 '커리어우먼'이자 뛰어난 '예술가'이며 시대를 앞서간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사실이 재조명받고 있다.
 
9월 27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75회에서는 '신사임당은 어떻게 현모양처의 아이콘이 됐나' 편을 통하여 우리가 몰랐던 진짜 신사임당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신사임당은 1504년 조선의 명문가였던 평산 신씨 가문의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서 5녀중 둘째 딸로 강릉에서 태어났다. 신사임당의 친정인 고택 오죽헌(烏竹軒)의 명칭은 뒤뜰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로 둘러싸인 풍경에서 유래했다. 신사임당과 그녀의 아들 율곡 이이 모자가 모두 이곳에서 출생했으며 현재 보물 165호로 지정되어있다.
 
신사임당의 집안은 강원도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이었다. 신사임당이 태어난 조선 중기만 하더라도 아직 가부장제와 남녀차별이 덜 했고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있었다. 대저택인 오죽헌 역시 아버지 신명화가 아니라 어머니 용인 이씨의 소유로, 외동딸이었던 그녀가 친정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이었다. 
 
오늘날 대중적으로 신사임당의 이름처럼 알려진 사임당(師任堂)은 사실 그녀의 호(號)다. 10대 시절의 신사임당은 중국 주문왕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이름이 높던 '태임'이라는 인물을 본받겠다는 의미로 자신의 호를 스스로 '사임'이라 정했다. '당'은 안주인이 기거하는 별채를 뜻하며 '~부인' 정도의 의미로 후대의 사람들이 신사임당을 기리기 위하여 덧붙인 표현이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대부분 출신 가문과 성씨 정도만 기록될뿐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신사임당의 본명으로 알려진 '신인선' 역시 그녀가 위인으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후대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남녀차별이 만연했던 시대에 호를 통해서나마 이름을 남긴 신사임당의 위상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비범하여 어른들도 탄복할 정도였다고 한다. 1510년, 일곱 살의 신사임당은 세종 시대 산수화의 대가였던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림과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됐다. 신사임당은 안견의 그림을 똑같이 모사해낼만큼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다.

조선 시대에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은 매우 한정적이었고 특히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사치 활동에 가까웠다. 다행히 신사임당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했고, 아버지 신명화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신사임당은 풍경이 뛰어난 오죽헌과 강릉 일대에 살았던 탓에 산수화에 대한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가 있었다.
 
1522년, 19세의 신사임당은 3살 연상의 이원수(李元秀, 1501-1561)와 혼인을 올리게 된다. 이원수의 가문은 명문가인 덕수 이씨였지만, 정작 이원수 본인은 무능하고 학문도 재력도 별볼일없는 가난뱅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원수를 사위로 직접 낙점한 것은 바로 장인 신명화였다. 그는 예술적 재능이 출중한 딸 신사임당이 명문가로 시집가서 보통의 조선 부인처럼 답답한 규방에 갇혀 살림만 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신명화가 가장 원했던 것은 가문이나 재력이 아니라 딸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막지 않고 지지해줄 수 있는 남자였다.
 
심지어 신명화는 혼인 후에도 신사임당을 출가시키지 않고 이원수를 데릴사위로 처가에 데려와 함께 살게 했다. '선비행장'에 따르면 신명화는 이원수에게 "내가 딸이 많은데 다른 딸은 시집가고 서운하질 않더니 그대의 처만은 내 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네"라고 부탁할만큼 둘째 딸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드러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신사임당은 이원수와의 사이에 4남 3녀를 낳았다. 이중 3남이 훗날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정치가가 되는 이이(李珥, 1537-1584)다. 신사임당은 아버지와 남편의 후원 속에 혼인 후 출산과 육아로 달라진 일상속에서도 화가로서의 재능 역시 계속 이어나 갈수 있었다.
 
신사임당의 탁월한 그림 실력에 대한 유명한 일화들도 전해진다. 신사임당의 대표작인 묵포도도(墨葡萄圖)와 관련된 야사에 따르면, 한 잔치에 온 여인이 음식 국물이 튀어서 아끼던 치마가 망가지자 울상을 지었는데, 이를 본 신사임당이 먹과 붓을 가져오게 하여 즉석에서 치마에 그림을 그려 더러워진 자국 위에 아름다운 포도송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사가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하지만, 그만큼 당대에 신사임당의 그림 실력과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몇년 후 신사임당의 정신적 버팀목이자 후원자였던 아버지 신명화가 세상을 떠난다. 신사임당에게는 아마도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자, 인생이 흔들릴 수 있는 위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 이원수는 신명화의 사후에도 다행히 신사임당의 예술 활동을 막거나 반대하지 않고 계속 지지해줬다. 오히려 이원수는 친구들 앞에서 아내 신사임당의 그림 실력을 자랑하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젊은 시절의 이원수는 가부장적인 남편들이 득세했던 조선 시대에 드물게 아내의 재능과 성향을 존중할줄 알았던 현대적인 남편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원수는 '좋은 가장'은 결코 아니었다. 이원수는 전형적인 한량이었고 관직에 출사하거나 가족의 생계를 돌보는데는 별 관심없이 평생 유유자적한 삶을 즐겼다. 아들 이이조차 "아버지께선 성품이 자상하지 않아 집안 살림을 잘 모르셨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내 신사임당 입장에서 이원수는 자신의 예술활동을 지지해주는 흔치않은 남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장으로서는 한없이 무능하고 철없는 골칫덩이이기도 했다.
 
이원수는 당대의 권신이던 윤원형(문정왕후의 남동생, 13대 국왕 명종의 외삼촌)의 측근이었던 이기의 집에 드나들며 관직을 청탁했다. 이를 알게 된 신사임당은 "잘못된 방식으로 관직을 얻으면 더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하며 이기의 집에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실제로 훗날 윤원형과 이기가 몰락하고 관계된 이들이 대거 처벌을 받으며 신사임당의 선견지명은 현실이 됐다. 아내의 조언에 따라 이후로 이기와 연루되지 않았던 이원수는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신사임당이 단순히 남편에게 순종하는 수동적인 현모양처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싶은 말은 솔직하게 하며, 필요할 때는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당찬 여성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신사임당의 유일한 안식처는 예술이었다. 신사임당의 그림은 세간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는데 '폐관잡기'에 따르면 사대부들이 "신씨의 산수는 절묘하여 안견에 버금간다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소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수 있으리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추정되는 산수화 '이곡산수병(二曲山水屛)'을 본 당대의 학자 소세양은 "그녀의 그림은 마치 신이 그린 것 같구나"라며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 또한 또다른 대표작인 '초충도'에서는 풀과 벌레를 묘사했는데 한 마리 닭이 그림 속 벌레를 실제로 착각하여 그림을 쪼았다는 야사를 통하여 신사임당의 정교한 그림실력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는 그것은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예술가로서 남성 사대부들에게 그 재능을 인정받고, 심지어 조선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은 안견과 대등하게 비교될 정도였다는 점에서 신사임당의 특별한 위상을 증명한다.
 
신사임당은 38살이 된 1541년,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결혼한지 20여년만에 친정인 강릉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온다. 신사임당은 고된 집안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신사임당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자녀들도 훌륭하게 성장했다. 가장 유명한 율곡 이이는 과거시험에서 9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으로 불렸는데 이는 조선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또한 첫째 딸인 매창은 어머니의 예술적인 재능을 물려받아 걸출한 그림 실력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신사임당은 늘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통하여 자녀들에게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줬다고 한다. 자녀들의 영특함은 신사임당의 고달픈 한양생활에 한 가닥 큰 위로가 되어줬다.
 
하지만 아내로서 신사임당의 삶은 끝내 행복하지 못했다. 이원수는 권씨라는 여인과 외도를 즐겼고, 50세의 늦은 나이에 음서로 관직을 얻게되어어 집을 떠나 지내면서 살림과 양육을 모두 신사임당에게 떠넘겼다. 스트레스와 과로에 지친 탓인지 이 무렵부터 신사임당의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다.
 
운명을 직감한 신사임당은 다급히 남편 이원수를 불러 "내가 죽더라도 당신은 재혼하지 말라"고 뜻밖의 부탁을 전했다.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강조하며 여성은 집안의 남성에게 평생 순종을 강요당하던 유교 사회에서 신사임당의 요구는 상상을 뛰어넘는 파격이었다. 그만큼 신사임당은 실제로는 보수적인 현모양처라는 고정관념을 넘어선 당차고 현대적인 여성에 더 가까웠다.
 
신사임당은 남겨진 자녀들의 나이가 어리고, 남편과 외도중인 권씨의 성정이 포악한 것도 알고 있었기에 이원수의 재혼을 반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원수는 온갖 핑계를 대며 아내의 마지막 부탁마저 거부한다.
 
1551년 4월 17일, 신사임당은 48세의 젊은 나이로 재능을 다 꽃피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난다. 이원수는 아내가 사망하고 난후 권씨를 첩으로 들였다. 이를 지켜봐야했던 어린 자녀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훗날 장남 이선은 권씨와 마주칠 때마다 싸움이 붙기 일쑤였다고 한다. 또한 가족들에 대한 애정어린 글들을 많이 남겼던 이이에게 유일한 예외가 바로 아버지 이원수였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10년후 가족들의 외면을 받으며 쓸쓸히 눈을 감았다.
 
신사임당 사후 108년이 지난 1659년,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송시열은 '초충도'를 보고 "사람의 손으로 그렸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자연스럽고 인력이 범할수 없는 것'(송자대전)_이라며 신사임당의 그림 실력을 극찬하면서 그녀의 이름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송시열이 신사임당을 언급한데는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송시열은 찬사에 이어 "마땅히 그가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유학의 사상적 정통성을 강조한 송시열은 율곡 이이의 비범함을 부각하기 위한 수단으로 '어머니로서의 신사임당'까지 끌어들여 칭찬한 것이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급격한 교조화와 가부장제 질서를 강화시킨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던 송시열에 의하여 신사임당은 조선의 여성화가로서의 주체적인 모습이 아닌, 율곡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정립되었다. 이러한 신사임당에 대한 '모범적인 어머니상'으로서 이미지 활용은 근현대인 1960년대까지도 계속 이어져왔다.
 
하지만 실제의 신사임당은 단지 현모양처라는 틀에 가두기에는 너무나도 큰 여성이었다. 그녀는 여자가 꿈을 펼치지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적 재능을 펼쳤던 시대의 예술가이기도 했다. 어쩌면 신사임당 본인도 후대의 사람들이 자신을 누군가의 어머니로서가 아닌, 하나의 독립적인 여성으로서 새로운 시선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벌거벗은한국사 여성화가 신사임당 율곡이이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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