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은 자유민주주의의 선진국을 자부해온 미국의 불편한 진실중 하나다. 2023년 현재도 인종차별과 관련된 사건사고와 논란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인종차별의 중심에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있으며, 이들에 맞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 이한 유색인종들의 투쟁과 저항 역시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9월 2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8회에서는 '백인우월주의에 맞선 두 영웅은 왜 암살당했나'편을 통하여 미국 사회 인종차별의 역사와, 두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과 맬컴 엑스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사라지지 않은 인종차별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미국은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이 끝난 1865년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페지했다. 미국 연방정부는 수정헌법 13-14조를 통하여 모든 노예제와 강제노역을 금하고, 과거에 노예였던 흑인들도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보장받게 했다.
 
하지만 새로운 헌법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남부의 백인들은 수감자에게는 예외의 여지를 남겨둔 헌법 조항의 빈틈을 악용하여 실제로는 흑인들을 사소한 일로도 범죄자로 만들어서 노예로 부리는 꼼수가 허다했다.
 
이로 인하여 "흑인들은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확산되었고, 백인우월주의가 자리잡는 근간이 됐다. 남부지역에서 시작된 'KKK(Ku klux klan)'는 지금까지도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을 주장하는 조직폭력단체로 악명을 이어오고 있다.

1870년, 미국 연방정부는 수정헌법 15조를 통하여 흑인의 투표권을 헌법으로 보장한다. 당시 미국 흑인 인구의 95%는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남부 백인들 사이에서는 정치권을 흑인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고조됐다. KKK를 비롯하여 남부에 난립한 수많은 백인주월주의 단체들은, 백인의 권리를 대변하지 않는 당을 지지하는 흑인들, 백인우월주의와 성향이 다른 백인들을 노려서 무자비한 협박과 테러, 학살을 일삼았다.
 
당시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흑인 학살은 일종의 유희에 불과했다. 흑인에게 가해진 집단폭행 현장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기념 엽서를 만들어 배부하는 잔혹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1882년부터 1966년까지 약 82년간 흑인 약 3500명. 백인까지 포함하면 4700명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집단 광기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됐다. 백인우월주의자들가 저지른 테러의 진정한 목적은, 흑인들의 정치참여를 막고 "세상이 변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두려움을 주기 위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심지어 남부의 11개 주에서는 공공장소에서의 흑백분리를 강제하는 짐 크로법(1876-1965)같은 악법까지 시행되며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을 제도화시켰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인종차별을 금지한 수정헌법 14조의 취지를 왜곡하여 '흑인과 백인을 구분하되,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허용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현실에서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모든 면에서 열악한 대우와 시설만을 제공받아야 했다. 짐 크로법을 따르지 않는 흑인들은 주법을 위반하여 처벌받거나 백인들의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억눌려 지내던 흑인들도 부당한 현실에 맞서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1955년 에밋 틸 살인사건, 몽고메리 버스 사건 등은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의 심각성에 경종을 울린 사건으로 회자된다.
 
14세의 흑인소년인 에밋 틸은 남부의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백인 남성들에 의하여 구타와 고문을 당한 끝에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에밋 틸의 부모는 아들의 시신을 언론에 공개하며 진실을 규명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살인범들은 결국 재판에 서게됐지만 전원 백인으로 꾸려진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한다.
 
또한 에밋 틸 사건이 벌어진지 몇 달 후 남부몽고메리 지역의 한 버스에서는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백인에게 좌석을 양보할 것을 거부하여 짐 크로법 위반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로자는 인종차별 정책을 위헌이라고 판결한 1954년 연방대법원의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했다. 또한 그녀가 용감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에밋 틸의 사건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950-60년대들어 인권의식이 성장하고 흑인들의 목소리가 강해지면서 미국 사회의 흑백갈등이 첨예해진다. 이 시기에 등장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1929-1968)는 목사이자 인권운동가로 '비폭력주의' 운동을 실천하며 인종평등에 큰 진전을 이룬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킹은 당시 몽고메리 지역에서 흑인 교회의 목사로 활동하면서 흑인 공동체를 대표하는 엘리트 지식인이자 백인 정치인들과도 교류가 가능했던 인물이었다. 킹은 몽고메리 버스 사건이 일어나자 앞장서서 흑인들의 버스 보이콧과 카풀 운동을 주도하며 인종차별에 동참한 버스 회사들을 압박한다. 백인우월주의자들과 백인 경찰은 이러한 흑인들의 보이콧을 노골적으로 탄압했고, 킹은 주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동참한 흑인들과 함께 체포당한다.
 
하지만 킹은 이슈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미디어를 통하여 흑인차별 철폐 연설을 호소하면서 오히려 전세계적인 관심과 지원을 받게 된다. 약 1년간의 투쟁 끝에 1956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흑백 버스분리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며 킹과 흑인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은 킹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또한 킹이 흑인 민권 운동가로서 존경받는 받는 또다른 이유는, 흑백갈등이 첨예한 상황 속에서도 철저한 비폭력-평화주의 노선을 강조하며 단 한번도 폭력 시비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자고 주장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킹과 목표는 같았지만 수단이 달랐던 인물이 바로 맬컴 엑스(1925-1965)다. 그는 비폭력을강조한 킹과는 정반대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양치기인 목사는 백인에게서 달아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고 동시에 백인들과 맞서지말라고 가르친다. 그는 여러분과 저를 배신한 '반역자'다. 그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기지 말라"고 백인만이 아니라 킹까지 강하게 비난했다.
 
맬컴은 어렸을때부터 백인우월주자들의 차별과 위협에 시달리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다. 6살 때 백인우월주의자들과 맞서던 맬컴의 아버지가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했다. 방황하던 맬컴는 친구들과 강도짓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맬컴은 수감생활중 과격 종교단체인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하며 본격적으로 흑백 투쟁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의 본명은 맬컴 리틀이었으나 백인 악마가 붙여준 성이라며 엑스로 개명하고 백인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아프리카 흑인의 정체성을 잊지않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맬컴은 "기독교는 백인들의 종교"라며 배척하며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새로운 종교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맬컴은 1952년 가석방 이후 뉴욕 빈민가인 할렘가를 중심으로 흑인우월주의를 전파하며 "흑인의 삶이 비참해진 이유는 백인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훗날 '전설의 복서'가 되는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본명 캐시어스 클레이) 역시 맬컴의 연설에 감동받아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하고 이슬람식 이름인 알리로 개명한 일화도 유명하다. 맬컴과 알리는 절친이 되었고 이들의 활약상은 '흑인은 백인에 비하여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는 것을 알리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킹과 맬컴은 폭력 사용에 대하여 극명하게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킹은 여러 차례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테러에 시달리면서도 비폭력을 강조하며 "우리는 백인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소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킹은 맬컴에 대하여 "그가 폭력에 대한 말을 줄이기 바란다. 폭력이 우리의 문제를 해소해줄 수 없다. 맬컴은 우리에게 크나큰 피해를 입혔다고 생각한다. 그가 했던 것처럼 흑인들에게 무장을 하고 폭력을 사용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비탄을 초래할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킹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도 각별한 사이로 알려졌다. 킹은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백인 정치인들의 협력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진보적이었던 케네디는 킹을 통하여 흑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반면 맬컴은 흑인과 백인의 공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흑인이 백인들에게 맞설 수 있는 힘을 기르는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킹은 1963년 8월 28일 흑인 차별에 반대하는 평화시위였던 '워싱턴 행진'을 통하여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today)라는 명연설을 남겼다. 그는 '언젠가는 내 어린 자식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의 내용으로 판단받는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호소하며 모든 인간은 인종과 출신의 차별없이 모두 평등하게 대우받으며 공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파했다.

당시 평화행진에는 흑인과 백인을 망라하여 무려25만 명이 참여하며 뜨거운 호응을 일으켰다. 킹의 명연설은 후대까지도 그의 사상과 인생을 함축하는 내용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하지만 맬컴은 워싱턴 행진에 대하여 "백인 광대와 흑인 광대가 함께 출연하는 소풍이자 서커스"라며 폄하했다. 또한 맬컴은 킹의 연설에서 강조된 'Dream'이라는 단어를 겨냥하여 "나는 미국이라는 체제에서 희생자의 눈으로 미국을 바라본다. 그 어떤 아메리칸 드림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직 미국의 악몽(Nightmare)을 봤다"며 조롱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흑인들은 그저 비관적인 시선과 호전성만 가득한 맬컴보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강조한 킹의 메시지에 더 공감했다. 1964년 12월 10일 킹은 흑인 인권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35세라는 당시 최연소 나이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두 지도자의 '비극적' 운명
 

하지만 흑인 인권을 위하여 다른 방식으로 함께 싸웠던 두 지도자에게는 똑같이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3년 흑인인권에 우호적이었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하자 맬컴은 "당연한 일이기에 슬프지도 않고 기쁘기만 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로 인하여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갈등을 빚던 맬컴은 결국 교단을 탈퇴했다.
 
이후 맬컴은 사우디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인종에 상관없이 친절한 무슬림 교도들의 모습을 보고 공존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고 한다. 맬컴은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계속했지만 한결 온건한 노선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맬컴의 영향에 따라 폭력운동을 주장해왔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맬컴을 '배신자'로 규정했다. 1965년 뉴욕 할렘지역으로 연설을 하러왔던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 단원의 총격을 받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다. 맬컴의 나이 불과 39세였다. 평생을 흑인 인권을 위하여 투쟁했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한때 같은 편이었던 사람의 손에 의하여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맬컴이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에는 킹마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킹은 맬컴 사후에도 흑인 참정권을 위한 운동과 여러 대규모 평화시위 등을 주도하며 백인 세력의 끊임없는 테러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킹을 협박한 대상에는 미국 연방수사국인 FBI도 포함되어 있었다. FBI는 워싱턴행진에서 20만이 넘는 시민을 결집시킨 킹의 영향력을 경계했고, 냉전시대에 민간인에 대한 불법사찰을 일삼았던 FBI는 킹의 사생활을 도감청하여 횡령과 성추문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기밀문서 기한이 해제되는 2027년이 되면 공개될 예정이다.
 
킹은 자신을 향한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더 큰 목표에만 집중했다. 1968년 4월 3일 킹은 흑인 노동자를 위한 연설에 초청받아 테네시주 멤피스에 방문했다가 숙소에서 백인우월주의자의 총격에 사망한다. 운명의 장난처럼, 당시 킹의 나이는 맬컴이 사망했을 무렵과 같은 39세였다. 미국 연방정부는 킹이 태어난 1월 15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어둠을 어둠으로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빛으로만 할수 있습니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킹이 남긴 어록은 지금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킹과 맬컴은 비록 가는 길은 달랐지만 지향했던 바는 같았다. 그들 두 사람은 모두 유색인종들이 차별받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들의 치열했던 투쟁이 남긴 메시지와 교훈은, 오늘날 미국 사회만이 아니라 다인종-다민족이 공존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벌거벗은세계사 맬컴엑스 마틴루터킹 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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