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내가 발 디딘 현실과 연결된다고 믿습니다. 마침표로 끝나는 OTT 시청 말고, 물음표로 이어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베이비 피버(Skruk)>는 덴마크의 인공수정 클리닉을 배경으로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베이비 피버(Skruk)>는 덴마크의 인공수정 클리닉을 배경으로 한다. ⓒ 넷플릭스


"정자은행 카탈로그에서 남자를 골라요. 우리가 매일 돕는 싱글맘들을 봐요. 해내잖아요."

아이를 낳을지 고민하는 주인공에게 직장 동료가 건네는 조언이다. 덴마크 드라마 <베이비 피버>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관용(寬容)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주인공 나나는 인공수정 클리닉에서 일하는 의사다. 비혼모와 레즈비언 부부, 이혼 가정, 난임 여성 등 엄마가 되고 싶은 여자들을 도우며 보람을 느끼지만 정작 자신은 임신할 생각이 없었다. 가임기가 6개월 남았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직장 동료 시몬은 나나에게 "정자은행에서 남자를 고르라"고 권한다. 가디언지 보도에 따르면 덴마크에서 정자은행을 통해 출생한 아기 10명 중 1명은 파트너 없는 여성에게서 태어난다. 2007년부터 레즈비언 부부와 비혼 여성도 기증된 정자로 인공수정을 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했다. 나나를 연기한 배우 요세피네 파크도 여성 파트너와 결혼 후 아들을 낳았다.

'마이 바디, 마이 초이스'를 방해하는 건 없다. 나나는 결정만 하면 된다. 그런데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언제나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걸까? 선지(選支)가 많을수록 문제는 어려워지는 법이다. 심난한 나나는 술에 취해 그만 큰 '사고'를 치고 만다.

'가임기 6개월 시한부',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훔치다
 
 <베이비 피버> 주인공 나나와 친구 시몬은 인공수정 클리닉에서 몰래 술을 마시다 큰 사고를 치고 만다.

<베이비 피버> 주인공 나나와 친구 시몬은 인공수정 클리닉에서 몰래 술을 마시다 큰 사고를 치고 만다. ⓒ 넷플릭스

 
보통 '사고를 쳤다'는 건 미혼 남녀가 하룻밤 성관계로 임신하게 된 일을 뜻한다. 하지만 나나가 저지른 사고는 단독 범행이다. 정자은행에서 전 남자친구의 정자를 훔치고 직접 자기 몸에 인공수정을 한 것이다.

운 좋게도, 혹은 운 나쁘게도 이 '취중시술'은 한 번에 성공한다. 낳아도, 안 낳아도 문제다. 나나는 진짜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전 남자친구에게 무작정 매달리는가 하면, 아이 아빠는 다른 남자라고 거짓말한다. 그렇게 스스로 불러온 재앙은 눈덩이처럼 커져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할까요?"
"솔직해져야죠. 모두에게 진실을 고백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관계를 망친 후에야 나나는 결심한다. 스스로 불러온 이 거대한 재앙을 마주하기로. 모든 잘못과 거짓말을 고백하고자 한다. 일생일대의 결정을 앞두고 부담감에 휘청이던 나나가 자세를 바로잡는 순간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베이비 피버>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다루면서 그 '결정'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보는 사람을 활짝 열린 결말로 초대한다.

극 중 인공수정 클리닉에서 나나는 레즈비언 부부, 비혼 여성, 난임 여성, 이혼 가정 등 다양한 여성들과 상담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 엄마가 되어 떠나는 건 아니다. 고민 끝에 결정을 유예하거나 번복하기도 한다. 개인의 결정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다만 그 결정을 관용해야 한다는 원칙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키운다"는 '닫힌 결말'을 거부한다
 
 <베이비 피버>에는 난임 여성 뿐 아니라 레즈비언 부부, 이혼 가정, 비혼 여성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베이비 피버>에는 난임 여성 뿐 아니라 레즈비언 부부, 이혼 가정, 비혼 여성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 넷플릭스

 
"너무 가난하거나 남자가 도망가거나 강간당하는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똘레랑스(관용)'가 있으면 여자가 어떻게 해서든 키울 수 있다고 본다. 필리핀은 여자가 뭘 해서라도 키운다고 한다."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2012년 9월 자신이 창간한 매체 <위키트리> 유튜브 채널에서 발언한 내용이다. '관용(tolérence)'이란 다른 신념, 의견, 종교, 사상 등을 억압하지 않고 인정하는 자세를 뜻한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은 낙태죄를 징역 최대 6년으로 정하고 있다. '임신-출산-육아' 외 다른 선택을 불관용 하는 대표적 사례다.

해당 발언은 최근 김 후보자의 인터뷰로 인해 더욱 논란이 되고 있다. 김 후보자는 지난 15일 출근길에서 '임신 중단에 대한 후보자 의견이 궁금하다'는 취재진 질문에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미혼모여서, 또는 청소년이어서 어쩔 수 없이 낙태할 수밖에 없는 경우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넣을 수 없다고 본다"고 답했다.

이 경우는 넣고, 이 경우는 빼고. 김 후보자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가치 판단에 따라 여닫을 수 있는 문제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는 '열린 결말'에 들어섰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임신 중지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이제 '닫힌 결말' 밖으로 나와야 할 때다. 정 혼자 아이 키우는 여성들을 관용하고 싶다면 여성가족부가 '정자은행 카탈로그'를 만드는 게 어떨까.
베이비피버 넷플릭스 임신중단 정자은행 비혼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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