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저물고 유튜브와 OTT가 당연해진 시대지만, 여전히 추석 명절에 가족들은 TV 앞에 모이게 됩니다. 이번 명절 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TV 프로그램들을 꼽아봤습니다. [편집자말]
추석이다. 포털 배너에 둥근 보름달과 절구 찧는 토끼가 떠오르기 시작하고 주변이 순식간에 명절 분위기로 무르익는다. 실시간 도로 교통정보가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될 때 서울이 곧 한산해지겠구나 생각한다. "이번 추석에는 뭐해?"라는 안부 인사가 친구들 단톡방에 울리면 지난해 보냈던 명절의 풍경을 떠올려 본다. 

운 좋으면 아무 데도 안 가고 산적꼬치, 갈비찜 등을 만든 후 TV를 켰던 것 같다. 4인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공중파, 케이블, 종편 방송 등을 돌려보면 지금 내가 마주한 모습이 복사 붙여넣기 되어 예능에 나온다. 각설이처럼 매년 찾아오는 명절 예능은 가족 중심 콘텐츠를 벗어나지 않는다. 연예인 부부가 추석을 준비하는 모습이 관찰카메라를 통해 송출되고 '시댁, 처가 방문을 꼭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패널들이 토론한다.

왜 볼만한 명절 방송은 모두 가족 예능일까? 이제는 그만 보고 싶은 가족 예능,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가족 예능 속 '가족 구성원의 모습', '계급', '주제'는 공식처럼 반복된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어떤 명절 콘텐츠를 원하는지 같이 상상해 보면 좋겠다.

가족 예능이 비추는 '정상가족' 명절 풍경
​​​
 <미운 우리 새끼>(SBS). 김준호가 연인 김지민 본가에 방문해 예비 장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미운 우리 새끼>(SBS). 김준호가 연인 김지민 본가에 방문해 예비 장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 고은

 
이번 추석에도 정상가족을 공고하게 다듬는 가족 예능이 특집 방송을 꾸려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지난 17일, <미운 우리 새끼>(SBS)는 개그맨 김준호가 연인 김지민의 본가에 찾아가 예비 장모님을 만나는 에피소드를 다뤘다. 예비 장모님에게 딸의 남편 자격을 공인받는 자리로서 김지민 어머니와 김준호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김준호는 "금주와 거짓말 안 하기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말로 어필하고 김지민 동생은 "교제 사실을 알고 어땠냐?"는 질문에 "되게 싫었죠"라고 받아친다. 이때 김준호는 당황하고 시청자는 웃는다. 어느새 저항 없이 웃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이게 왜 웃길까? '왜'라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이 웃음은 막강하다. 명절에 처가에 간 사위는 장모에게 쩔쩔매지만 백년손님이기 때문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대접받고 시댁에 간 며느리가 '시댁 혹은 처가 방문' 논쟁의 주인공이 된다. 이는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명절 레퍼토리다. 설명하지 않아도 대중이 납득하는 가족의 대소사, 이것이 명절의 자연스러운 풍경이라고 제시하는 가족예능에는 이성애 중심 4인 가족만이 정상이라는 전제가 있다. 

결혼 적령기에 연인이 있거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한국에서 평생 방송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한국에는 결혼제도로 맺어지는 이성애 부부와 그들의 자녀가 주인공이 되는 가족 예능이 많다.

한국 가족 예능의 시작과 변화

2013~2014년 <슈퍼맨이 돌아왔다>(KBS2), <아빠 어디가?>(MBC)를 기점으로 가족 예능이 큰 인기를 얻자, 가족 관찰 예능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표현이 서툰 아빠와 딸의 좌충우돌을 다룬 <아빠를 부탁해>(SBS)부터 나이 든 엄마가 화자가 되어 다 큰 아들 일상을 관찰하는 <미운 우리 새끼>(SBS)까지. 4인 가족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재료로 요리한 예능들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약 10년이 지난 지금, 가족 예능이 진화한 점이라면 가정 평화뿐만 아니라 가정 붕괴의 전조 혹은 그 산물도 콘텐츠로 만들어 버린다는 거다. <오은영의 리포트 – 결혼지옥>(MBC)은 금전, 대화 단절, 가정 폭력 등의 문제로 솔루션이 필요한 부부들을 관찰한 후 '오은영' 박사가 솔루션을 주는 방송이다. '행복에 목마른 네 남자의 토크쇼'라 소개하는 <신발벗고 돌싱포맨>(SBS)에는 이혼 경력이 있는 중년 남자 넷이 나온다. 회차를 이어갈수록 앞서 말한 '행복'이 사실 실패를 딛는 연애와 결혼이라는 게 넌지시 보인다.

지난 8월, 한반도미래연구원이 진행한 2030세대 결혼출산에 대한 인식 심층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혼 청년 10명 중 4명은 결혼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결혼을 원하지 않는 이유로 남성은 '경제적 불안정(42.6%)'과 '결혼 조건 맞추기의 어려움(40.8%)'을 뽑았다. 경제적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청년 남성이 늘어남에도 TV속에는 여전히 연애, 결혼, 이혼으로 꼬리 무는 남성 중심 가족 이야기가 넘친다. 

다양한 가족이 나오는 명절 예능이 보고싶다
 
 <조립식가족>(tvN) 홈페이지 캡처본

<조립식가족>(tvN) 홈페이지 캡처본 ⓒ 고은

 
가족 예능은 가족 울타리 안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추지 않는 방식으로 자리를 유지했다. 결혼할 미래보다 결혼하지 않을 미래가 더 선명하게 그려지는 청년들, 명절 알바 근무로 본가에 가지 못한 자취생, 정상가족을 벗어난 가족형태를 꾸려 사람들의 상상력이 미처 닿지 못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의 일상은 TV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미 연애, 결혼, 출산 및 육아가 모든 사람에게 당연하지 않은 선택지가 된 시점에서, 변화에 발맞춘 가족 예능이 보고싶다. 정상가족 재현을 넘어선 가족예능은 사람들이 다가올 새로운 가족 형태를 미리 상상하고 대비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지난해 8회차 방영 후 마무리됐던 <조립식가족>(tvN)이 좋은 예가 되지 않을까.

조립식 가족이란 혈연, 가족관계와 같은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가족형태를 뜻한다. 취향과 성격, 경제적 여건이 맞아 함께 사는 동성 친구 혹은 동거 중인 연인,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 모두 이 가족에 해당한다.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도 같이 살면서 밥해 먹고 아프면 돌봐주는 것은 똑같다. 동료로 시작해 가족이 된 '모니카&립제이', '현봉식&이천은&김대명' 또한 서로의 끼니와 건강을 챙기며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준다. 

이미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여러 가족을 명절 특집 예능으로 만나고 싶다. 명절 음식을 만들지 않고 사거나 간소하게 차려 먹는 풍경, '시댁', '처가' 말고 여행지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떨까. 이번 명절에는 들리지 않았던 이야기보따리가 한가위상에 올라오길 소망한다. 
가족 예능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추석 기획 미운우리새끼 조립식 가족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