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간의 긴 추석 연휴, 가족과 함께 혹은 혼자 한잔하며 재충전할 시간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이때 보면 좋을 콘텐츠들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직업이 작가이다 보니 평일과 휴일에 대한 시간 감각이 회사원들과 사뭇 다르다. 따로 작업실을 둘 여력이 없어 집에서 작업하는 데다가 일의 특성상 월화수목금에는 쓰고 토일은 쉬는 식으로 하기는 어렵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히려 두 딸이 학교에 가는 평일이 휴일보다 한가한 면이 있다. 추석 연휴가 되면? 아이들은 집에서 내내 말썽 피우지,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일도 신경 써야지, 연휴 끼었다고 글 납품일이 며칠 더 미뤄지는 일 따위는 없지, 얄궂게도 연휴만 되면 유독 글감과 영감이 더 잘 떠오르는 건 어인 일인지. 작가의 시간은 여타 직업군과 다른 방식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이렇듯 정신없는 연휴이지만 꼭 시간을 내서 '다시' 읽으려는 만화가 있다. 바로 <장송의 프리렌(葬送のフリーレン)>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귀멸의 칼날>이나 <최애의 아이>에 비해 인지도가 낮지만, 2020년 4월 일본 <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를 시작해 이듬해인 2021년 일본 만화대상 1위를 수상했고 누계 판매 부수 천만 부를 돌파한 작품이다. 여전히 연재 중인데 현재 단행본 10권까지 한국에 번역 출간되어 있다.
 
장송의 프리렌 2021년 일본 만화대상 1위를 수상했고 누계 판매 부수 천만 부를 돌파한 작품이다.

▲ 장송의 프리렌 2021년 일본 만화대상 1위를 수상했고 누계 판매 부수 천만 부를 돌파한 작품이다. ⓒ 학산문화사

 
작화는 아베 츠카사가 맡고 스토리는 야마다 카네히토가 맡았으며 장르는 판타지인데 설정이 매우 독특하다. 주인공 프리렌은 엘프족 마법사다. 용사 일행의 일원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마왕을 쓰러뜨리는 과업을 이제 막 달성했다. 보통의 판타지물이라면 용사 일행이 마왕을 쓰러뜨리는 과정 자체가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겠지만, <장송의 프리렌>은 마왕을 쓰러뜨린 이후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는 후일담 형식이다.
 
장생족 엘프인 프리렌은 다른 동료들과 시간 감각이 다르다. 마왕 퇴치 후 용사 파티를 해산하며 나누는 대화에서 프리렌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용사 힘멜은 무려 10년이나 걸렸는데 무슨 소리냐고 당황한다. 때마침 50년마다 한 번 돌아오는 유성군을 함께 감상하고 있는데 프리렌은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는 장소를 알고 있으니 50년 뒤에 자신이 그곳으로 안내하겠다고 한다.
 
마법 수집을 위해 여행을 떠난 프리렌은 정확히 50년이 지나고 용사 힘멜이 사는 마을에 들른다. 다시 만난 힘멜은 머리카락이 죄다 빠지고 덥수룩한 수염에 등이 굽고 지팡이에 의존하는 노인이 되어 있다. 용사 파티 멤버였던 성직자 하이터, 전사 아이젠, 그리고 힘멜과 프리렌은 일주일을 걸어 예의 유성이 잘 보이는 장소에 당도해 인생에 남을 장관과 마주한다. 그 짧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용사 힘멜은 노환으로 사망한다.
 
장례식에서 힘멜의 주검을 무덤덤하게 보는 프리렌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슬픈 기색 하나 없이 야박하다며 수군댄다. 하이터와 아이젠이 자기들 표정도 덤덤하지 않냐며 애써 프리렌을 감싸준다. 프리렌은 '단지 10년을 함께 여행했을 뿐 자신은 힘멜에 대해 잘 몰랐다'며 '인간의 수명이 짧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더 알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후회하며 뒤늦게 눈물을 흘린다.
 
장례식을 마치고 여행을 떠나는 프리렌에게 아이젠이 마법 수집 여행이냐고 묻자, 그런 목적도 있지만 인간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남긴다. 그렇게 해서 프리렌의 길고 긴 여행은 시작된다.
 
반백 살 아저씨도 울게 한 스토리

새로운 동료를 만나 함께 여행하며 크고 작은 일들을 겪게 되는데, 에피소드마다 따뜻한 시선으로 삶을 통찰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으며 그것을 억지스럽지 않게 담백한 일상에 담아내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닳고 닳은 반백 살 아저씨조차 눈물 찔끔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스토리, 그 감동을 극대화하는 차분하고 세밀한 작화. 요즘 일본에서 양산되는 이세계물, 그러니까 일단 주인공이 트럭에 치여서 사망하고 이세계로 전이되어 능력치 만렙으로 시작하는 그런 부류와는 차원이 다른 작품이다. 만화책 보는 데 인생의 상당 시간을 할애한 사람으로서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의 작품은 정말 오랜만에 만난다.
 
이미 최신 연재분까지 꼬박꼬박 읽었음에도 추석 연휴에 굳이 처음부터 다시 보려는 이유는 곧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방송이 시작되고 한국에서도 넷플릭스를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작사는 매드하우스, 감독은 <외톨이 THE ROCK!>으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사이토 케이이치로가 담당했는데 9월 29일 오후 9시에 닛폰 테레비의 영화 방송인 <금요 로드쇼>에서 무려 두 시간에 걸쳐 애니메이션 첫 화가 방송된다.
 
1985년 4월에 첫 방송을 시작한 <금요 로드쇼>는 한국의 토요명화 같은 프로그램인데 2003년 1월 24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를 방영했을 때 시청률이 무려 46.9%에 이를 정도로 인기 방송이다. 여기서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첫 화를 방영하는 건 이번이 최초라고 한다. 방송가에서 이 작품에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후속편은 10월에 새롭게 론칭하는 닛폰 텔레비전의 애니메이션 브랜드에서 매주 방송될 예정이다.
 
이 기대작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예습으로, 추석 연휴 중 하루를 선택해 만화 읽는 데 온전히 할애할 생각이다. 아이들이 난입해 감흥을 깰 수 없도록 늦은 시간이면 좋겠지. <장송의 프리렌>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부르고뉴 피노누아 와인을 준비해 조용히 잔에 따라 마시며 곳곳에 등장하는 웅숭깊은 명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련다.
 
도멘 프리에르 로크 레 슈쇼 2017년에 이 부르고뉴 피노 누아 와인을 마시고는 그 놀라운 집중도과 깊이감에 경탄했다.

▲ 도멘 프리에르 로크 레 슈쇼 2017년에 이 부르고뉴 피노 누아 와인을 마시고는 그 놀라운 집중도과 깊이감에 경탄했다. ⓒ 임승수

 
기왕이면 2017년에 마셨던 도멘 프리에르 로크의 레 슈쇼 같은 와인이면 좋겠지. 당시 이 부르고뉴 피노 누아 와인을 마시고는 그 놀라운 집중도과 깊이감에 경탄했다.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별빛 비추는 밤, 외딴섬 해변에 앉아 주기적인 파도 소리에 취해 무작정 바다를 바라보는 아득함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장송의 프리렌>에서 간간이 마주치는, 삶을 관조하고 본질을 꿰뚫는 대사들과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지금은 가격이 네다섯 배 올라 범접할 수 없는 안드로메다급 와인이 되었다.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이번 애니메이션이 큰 인기를 얻어 <장송의 프리렌>도 도멘 프리에르 로크의 와인처럼 저 먼 우주로 가버릴지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야 팬으로서 무척 반갑고 축하할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격 폭등으로 서먹해진 그 와인처럼 약 1밀리그램 정도의 서운함은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때에는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달콤한 모스카토 와인과 조각 케이크를 곁들여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련다. 엘프의 시간을 작가의 시간 감각으로 음미하며.
장송의 프리렌 임승수 만화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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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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