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버린 세상, 그 중 유일하게 바로 서있는 황궁아파트,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바로 이 곳에서 시작한다.

황궁아파트의 주민들은 외부인들을 사지로 내쫓은 직후, 교양 시민처럼 굴며 생존을 위한 규칙을 세운다. 그리고 자연스레 위계도 세운다. 대표가 선출되고, 자가인 군필자로 이루어진 조장들도 세워진다.

극 중 현실에 순응해가는 민성역, 박서준의 직업이 공무원으로 설정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대표 선출과 시스템 구축을 제안한 인물이다. 공무원인 그는 위계가 확실한 시스템 속에서 자기 역할만 묵묵히 하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거시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 이외에 구체적인 안을 내놓을 수 없다, 언제나 위에서 정한 안을 따랐을 뿐이었다. 그는 대표로 선출된 영탁에 의해 정리된 위계질서에 안도감을 느끼고, 맡은 일을 열심히 수행한다.
 
위계는 또한 배제를 만들었다. 마치 헌법 1조 1항을 표방한 듯한 첫 번째 규칙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다", 그 다음에 오는 두 번째 규칙 "배급품은 기여도에 따라 차등분배한다"는 언뜻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연스러운 배제가 포함되어 있다. 주민은 자가소유자를 말하는 것이고, 조직에 기여하기 어려운 힘이 없는 노인들, 아이를 돌봐야하는 홀로 남은 가장, 건강이 좋지 않은 주민, 그리고 요직에서 애초부터 제외된 전세 세입자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신체적 약자들은 챙김을 받지 못할망정 가장 적은 배급을 받는다.

이는 영화적 과장이 아니다. 전세와 자가의 위계를 나누고, 대출의 유무로 사람을 무시하고, 더 나아가 같은 아파트에서 저층과 고층의 위계를 나누는 모습을 우리는 현실에서 계속 목도 중이다. 그리고 그 차별이 노력의 정당한 대가라고 주장하는 자유경쟁주의가 팽배해져 가는 것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완전히 가로로 누워버린 고급 아파트의 모습이 등장한다. 시종일관 로우앵글로 우뚝 서있는 모습을 자랑하는 황궁 아파트와 정반대의 모습이다. 여기 지내는 이들은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바퀴벌레라 부르며 야만인 취급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쉴 곳과 먹을 것을 대가 없이 제공한다.

수직으로 서있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위아래를 나누고, 수평으로 누워있는 아파트의 거주민들은 평등하게 모두를 대하는 이 메타포가 영화 관람을 마친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만들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

극중 부녀회장 금애역은 맡은 김선영은 외부인들의 거취를 결정하는 입주민 회의에서 사람 좋은 말투로 이렇게 말한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누굴 챙기냐며 은근하게 외부인들을 내쫓자는 방향으로 여론을 몰고간다.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고민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고개가 끄덕여질만한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아파트 입주민들이 고기 반찬을 먹으며 잔치를 할 여유가 생긴 이후에도 한 차례 '방역'이 이루어진다. 영탁은 말한다. 우리들이 목숨걸고 얻어온 식량을 저들은 대가 없이 축내고 있었다고. 외부인들은 정말 황궁아파트 식량에 어떤 손실을 가져왔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을 숨겨준 주민들은 자신들이 정당히 받은 보급품을 그들에게 나눠주었으므로, 외부인의 존재로 인한 식량의 추가적 소모는 없다. 하지만 곳간은 채워놓은 후에도 황궁 아파트에 인심은 나지 않았다. 어린 아이 하나 용납할 인심도 그들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인심을 베푼 것은 앞서 언급한 약자들이었다. '바퀴벌레'들을 숨겨준 죄로 인민재판을 받게된 이들은 노인, 병자, 홀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였다. 가장 적은 배급을 받는 이들이, 곳간이 비어있는 이들이 그 작은 콩 한쪽이라도 외부인들과 나눴던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허울 좋은 핑계였을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목적이 되어버린 집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집'의 첫 번째 의미다. 선사시대부터 집은 사람을 보호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했다, 집이 사람을 보호했기에 사람들은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더 나은 삶을 꿈 꿀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에서는 사람이 목숨을 걸고 집을 보호한다. 현대 사회에서 집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다. 한국에서 집, 특히 아파트는 평생을 바쳐서라도 얻어내어야 할 절대적 가치, 성공한 인생의 지표가 되었다.
 
영화 속 사람들은 집을 지키기 위해 신념을 버리고, 집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집을 지키기 위해 인간성을 버린다. 집을 지키려 노력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건축물, 그 뿐이다. 이것은 너무 날카로워 기분까지 상하게 하는 현실사회의 자화상이다.

축복으로 보였던 황국아파트는 저주였음이 드러난다. 무너진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 아니라 유일하게 남은 욕망의 대상이자, 위계를 유지시키는 보루였다.

우리는 왜 아파트를 욕망하는가, 행복한 가족이 편하게 쉴 보금자리를 꿈꾸던 우리들은 왜 삶의 질을 낮춰가면서까지 아파트 그 자체를 욕망하게 되었는가,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몰고가는가.
 
이것이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닐까.
콘크리트 유토피아 리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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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것도, 할 것도 많지만 현실은 공사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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