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조선 왕조의 오백년 역사에서 되풀이된 비극 중 하나는, 부자(父子)간의 갈등이다. 개국 초기부터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집권했다. 선조는 후계자 광해군과, 인조는 소현세자와 심각한 불화를 빚었고, 심지어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정신적으로 학대하다가 끝내 뒤주에 가두어 죽이기까지 했다. 제아무리 아들과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권력' 앞에서는 언제든 죽고 죽이는 정적이 될 수도 있는 정치의 비정한 속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선의 황혼기를 장식한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 왕실의 수많은 부자대전 중에서도 이들보다 더 기구하고 처절하며 파란만장했던 대하드라마급 권력다툼은 외국에서도 비교할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권력 앞에서는 남보다도 못한 '철천지원수'가 되어버린 가족의 비극은 가뜩이나 무너져가던 조선에 망국의 운명을 재촉하는 또다른 원인이 됐다.
 
8월 2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67회에서는 '흥선대원군은 왜 아들 고종을 죽이려했나'편을 통하여 막장드라마 뺨치는 부자간의 권력다툼이 조선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를 조명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1-1898)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손자이자,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4남으로 태어났다. 대원군은 왕족이긴 했지만 본래 왕위와는 거리가 먼 방계 혈통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선 25대 국왕 철종이 후계자 없이 요절하면서 왕위에 공백이 생기자, 대원군은 왕실의 웃어른인 대비 조씨(신정왕후)를 찾아가 자신의 둘째아들을 양자로 입적하여 후계자로 삼아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 조선은 안동 김씨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며 수십년간 '세도정치'를 펼치고 있었고, 조대비의 가문인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 세력에게 밀려나 있던 상태였다. 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면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할 수 있다며 달콤한 거래를 제안했다. 조대비는 이를 수락했고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는 고종(高宗)이다.
 
대원군은 12세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맡아 실권을 장악했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무너뜨리고 내정 개혁과 왕권 강화를 이끌었다. 또한 궁궐과 자신의 집을 잇는 전용문까지 만들 만큼 엄청난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무리한 경복궁 중건과 경제정책 실패, 천주교 탄압과 쇄국정책 등 일관성 없고 시대흐름을 읽지 못한 독선적 정책들로 인하여 실정도 많이 저지르면서 차츰 민심을 잃었다.
 
여기에 장성한 고종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궁궐 안에 왕과 왕비만의 공간인 건청궁을 건립하고 즉위 10년 만에 친정(親政)을 선언한다. 자신이 왕위에 올린 아들에 의하여 실각한 대원군은 결국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고향인 양주로 떠나야 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고향으로 내려간 후에도 권력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끊임없이 조정 복귀를 노렸다.
 
밀려난 흥선대원군과 민승호 암살사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아버지 대원군을 밀어내고 권력을 잡은 고종의 새로운 정치적 파트너는 아내 명성황후 민씨였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세력을 중용하며 조정의 요직을 대거 맡겼다. 여흥 민씨는 안동 김씨-풍양 조씨를 잇는 조선의 새로운 세도가문으로 등극했다. 고종은 자신만의 친위세력을 육성하여 여전히 조정에 남아있던 대원군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친정체재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
 
1875년 1월 5일, 병조판서를 지낸 민승호가 자택에서 폭탄테러로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양오빠이자 여흥 민씨 세력의 수장으로 대원군 퇴진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또한 이 테러로 민승호의 아들과 명성황후의 친모 이씨도 사망했다. 도성 한복판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누가 진범인지는 끝내 밝혀내지못하여 이 사건은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폭탄테러이자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민승호의 죽음을 두고 한양에서는 배후에 흥선대원군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민승호는 죽기 직전 대원군의 자택이던 운현궁을 가리켰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민승호를 죽일 동기가 있을 만한 가장 유력한 인물이 대원군이었고, 폭발물을 제조할만한 능력이 있는 군대는 대원군의 주요 지지세력이기도 했다.
 
다만 대원군은 당시 고향으로 내려가 있는 상태였고, 그가 직접 테러를 지시했는지, 혹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과잉 충성이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도 심증은 있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었던 탓에 차마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아버지 대원군을 수사할 수 없었다.
 
민승호 암살사건 이후 시간이 흘러 신하들로부터 대원군을 한양으로 다시 모셔야 한다는 상소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효(孝)는 단순한 가정사나 미덕을 넘어 중요한 정치적 화두이기도 했다. 고종으로서는 대원군을 방치할 경우 불효자라는 정치적 부담을 피할 수 없었고, 이를 잘 알고 있던 대원군 측도 지지 세력을 부추겨서 고종을 압박한 것이라는게 학계의 해석이다.
 
<나암수록>에 따르면 고종은 상소에 대하여 "이는 남의 골육지간을 이간질하려는 것으로 안팎을 선동하고 인심을 현혹시키는 지다"라고 평하며 불쾌해했다고 한다. 고종은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상소를 올린 대원군 지지파들을 하옥하거나 처형하며 강경한 대응을 보였다. 아들의 의사를 확인한 대원군은, 논란이 커지자 스스로 조용히 한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며 지지세력들을 보호했다.
 
고종은 이어 정책적으로 대원군 시절과 정반대되는 행보를 이어가며 대원군 지우기에 나섰다. 고종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벗어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신식군대인 별기군(근대식 신식 군대)을 양성하며 개화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고종의 정권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1881년(고종 18년)에는 이재선 역모사건이 터졌다. 이재선은 대원군의 서자이자 고종의 이복형이었다. 대원군의 지지세력들이 고종과 민씨 세력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일으켜 이재선을 왕위에 추대하려고 하다가 발각된 것. 대원군이 직접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정황상 최소한 역모를 알고 있있거나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학계의 해석이다. 이재선은 제주도 유배된 이후 사약을 받고 사망했고, 역모를 주도한 대원군의 측근세력들은 모두 능지처참 당했다. 이로써 고종과 대원군 부자간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1년 뒤인 1882년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한다. 개화정책으로 별기군에 비하여 차별받던 구식 군대가 정부에 대해 집단으로 일으킨 반란이었다. 군인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대거 동참했다. 당시 개화정책과 조일수호조규 등으로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대거 유출되면서 쌀값과 물가가 폭등했고 민생이 벼랑 끝으로 몰렸다. 하지만 무능한 고종 정권은 마땅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민심이 폭발했다. 군인과 백성들은 나라가 어려워진 이유가 바로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세력 때문이라고 여겼다.
 
명성황후는 궁궐을 빠져나가 화를 피했다. 그러자 후환이 두려웠던 반란군은 사후 수습과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줄 정치적 리더의 필요성을 느끼고 대원군의 복귀를 고종에게 요구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고종은 결국 임오군란의 수습을 위하여 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그렇게 대원군은 실각 9년 만에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게 된다.
 
'대원군 납치'에 대한 고종의 반응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대원군은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별기군을 폐지하고 고종의 개화 정책을 모두 이전으로 되돌리는가하면, 행방불명된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선언하며 국상을 선포한다.
 
하지만 대원군의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고종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조선에 입성한 청나라 군대가 대원군을 납치하여 자국으로 끌고가 버린 것. 이는 대원군은 물론 고종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청나라는 임오군란 수습을 핑계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왕의 친부인 대원군을 인질삼아 고종을 협박하려고 했던 것이다. 권력으로 복귀한 지 불과 33일 만에 다시 실각한 대원군은 중국에서 3년간이나 강제 유배 생활을 해야했다. 임오군란이 진입된 이후 고종은 실권을 되찾았고, 명성황후도 두 달 만에 무사히 궁으로 복귀힌다.
 
고종은 대원군의 납치에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표면적으로 고종은 청나라에 사절단을 보내어 대원군의 송환을 요구하는 외교적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절단과 청나라 사신의 대화 기록에서는 의미심장한 내용이 등장한다.
 
"대원군의 귀국을 요청한 게 진심인가"라고 확인하는 청나라 사신에게 조선 사신은 "실로 부자간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답한다. 이는 부자관계이기에 형식적으로 하는 것일뿐, 진지한 외교적 요구는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뒤집어 말하면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이 '진심으로 조선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해석되는 것이다.
 
정치 9단이었던 대원군도 아들 고종이 자신의 송환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대원군은 자존심을 굽혀가며 원수나 다름없던 며느리 명성황후에게 편지를 보내어 선처를 호소한다.
 
여기서 대원군은 며느리를 궁궐 안의 부인을 높여 부를 때 사용하던 '전(殿) 마누라'로 칭하고 자신을 '죄인 이(李)'라 낮추면서 "나는 다시 살아 돌아가지 못하고 만리 밖의 외로운 넋이 되어 다시 뵙지 못하고 이승에서의 내 목숨이 오래지 못하겠으니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호소한다.
 
사실 명성황후과 대원군의 사이는 부자간인 고종보다도 더 서로를 증오하던 험악한 관계였다. 평생 청나라에서 머물러야 할 수도 있다는 공포심에 모든 것을 내려놓은 대원군의 절박하고 곤궁한 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고종과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편지를 받고도 철저히 무시했다고 한다.
 
1885년 8월, 억류 3년여 만에 대원군이 돌연 조선으로 복귀힌다. 청나라는 당시 친러정책을 펼치며 러시아와 밀착하던 고종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적인 대원군을 돌려보낸 것이다.
 
실제로 대원군은 복귀하자마자 왕성한 외부활동을 시작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대원군에게 가택연금이라는 처분을 내리고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한다. 비록 정치활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조선의 관습상 왕실의 최고 웃어른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게 가능했고, 왕의 친부이자 끊임없이 조정 복귀를 노리던 대원군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종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권력에 대한 집착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대원군의 권력에 대한 무서운 집착은 말년까지도 지속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일본군이 조선에 진출하면서 놀랍게도 협조자로 당시 74세의 대원군을 지목했다. 9년 만에 가택연금에서 풀린 대원군은 일본군의 호위를 등에 업고 조정에 복귀한다. 섭정시절 '화친은 곧 매국'이라고 주장하며 외국과의 교류를 반대했던 대원군이 권력을 위하여 자신의 신념마저 뒤집고 일본과 손을 잡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1898년 7월)에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대원군은 당시 이미 70대를 훌쩍 넘긴 초고령이었음에도 '꼿꼿했으며 활기에 차 있었다. 얼굴엔 주름이 거의 없고 약간의 흰머리가 있었으며, 눈빛은 놀랍도록 반짝이고 맑았다'고 그의 비범함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한편으로 대원군이 말년에 보인 모순되고 치졸한 행적들이 결코 나이들어서 노쇠하거나 총기를 잃어서 이용 당한 것만이 아니라, 바로 스스로의 의지와 욕망에 의하여 이루어진 선택이었음을 암시한다.
 
<재한고심록>에 따르면 대원군은 심복 이원긍을 일본 공사관에 보내어 며느리 명성황후를 제거할 것을 요청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일본이 폐비 요청을 거절하자 대신 민씨 세력을 축출하고, 군국기무처를 설립하여 손자인 이준용을 후계자로 삼아 아들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계획까지 꾸몄다.
 
하지만 정작 대원군은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정작 실권은 없었다. 이에 대원군은 일본과 손을 잡으면서 한편으로 청나라에 밀서를 보내어 다시 일본의 뒤통수를 치려는 이이제이 전략을 모색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예상보다 맥없이 패퇴하고, 설상가상 대원군이 청에 보낸 밀서가 일본 측에 발각되면서 대원군은 복귀 4개월 만에 다시 권력에서 쫓겨나 가택연금을 당하는 신세로 되돌아갔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에 시해 당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한다. 일본은 가택연금중이던 대원군을 경복궁으로 끌고가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명성황후가 살해 당한 현장에 대원군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논란은 피할 수 없었고, 아들 고종과는 두 번 다시 화해할 수 없는 영원한 원수지간이 된다.
 
을미사변 후 3년이 지난 1898년 2월 22일, 77세의 대원군은 별장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죽음을 앞두고 대원군은 "내가 주상을 한 번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생의 최후가 되어서야 권력이 아니 아들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냉담했던 고종은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끝내 거절했다. 심지어 대원군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대원군은 자신이 왕위에 올린 아들의 배웅조차 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먼 길을 떠나야 했다.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하지만 '권력은 피보다 처절하다'는 것이 고종과 대원군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장장 35년에 걸쳐 계속된 대원군과 고종 부자의 끝없는 애증은 결국 조선을 더 빨리 망국의 길로 몰아넣는 결과로 이어졌다.
 
고종은 임오군란이나 동학농민운동 등 조선 백성들이 일으킨 난을 외세에 의지하여 탄압했고, 대원군은 백성들의 지지를 자신의 권력회복을 위한 기회로만 이용하려고 했을뿐 급변하는 시대를 이끌어갈 마땅한 비전이 없었다. 그리고 권력다툼을 둘러싼 조선왕실의 막장스러운 가족사가 남긴 여파, 외세에 의하여 그만큼 조선이 허약하고 만만한 국가임을 드러내는 비극적 역사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벌거벗은한국사 흥선대원군 고종 명성황후 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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