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6)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인으로 꼽힌다. '세자의 아내'이자 '왕의 어머니'라는 누구나 부러워할 축복받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정작 그로 인하여 생전에 남편과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친정이 정쟁에 휘말려 몰락하는 모습까지 지켜봐야하는 비극을 겪어야했다. 파란만장했던 홍씨의 삶만큼이나 후대에도 그녀를 바라보는 평가와 해석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5일 방송된 tvN story 역사 스토리텔링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혜경궁 홍씨는 왜 남편 사도세자를 버렸나' 편을 통해 혜경궁 홍씨의 인생과 행보를 둘러싼 역사적 논쟁들을 조명했다.
 
홍씨가 집필한 한중록(閑中錄, 혹은 한중만록)은 그녀가 말년에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수필로, 오늘날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궁중 문학이자 드물게 왕실의 여성이 직접 저술한 책이다.
 
한중록의 제목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한가로운 시간에 쓰고 싶은대로 쓴 글'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평생 왕실에서 온갖 풍파를 겪어야했던 홍씨의 일생이나 실제 그안에 담긴 파란만장한 내용들을 고려하면 전혀 어울리지않는 역설적인 대목이다. 그래서 한중록은 후대에는 원통할 한(恨)자를 대신 넣은 한중록(恨中錄), 혹은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쓴 글이라는 의미의 읍혈록(泣血錄)으로 불리기도 했다. 실제로 이것이 기록 속에 담긴 홍씨의 심경과도 더 가깝다.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와 아들 정조, 시아버지 영조 등 당대의 중요한 인물들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이자, 그래서 수많은 비극을 겪어야했던 인물이다. 그녀가 남긴 한중록은 조선 영-정조 시대 왕실의 주요한 역사를 이해하는 사료로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한 데는 단지 자신의 한많은 인생을 넋두리하듯 회고하는 것을 넘어서,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밝히려는데 진짜 의도가 숨어있었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해석이다.
 
홍씨는 1735년 풍산 홍씨 가문에서 홍봉한의 딸로 태어났다. 1743년(영조 19년), 9살의 어린 나이에 왕실의 배우자를 고르는 삼간택에 참여하여 세자빈으로 낙점됐다.

엄격하고 깐깐하기로 유명했던 시아버지 영조는 삼간택을 참관하여 홍씨를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어했다고 전해진다. 이듬해인 1744년, 홍씨는 동갑내기인 남편 사도세자 이선과 결혼하여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한중록에 따르면 남편 사도세자의 첫 인상은 '세자께서는 체구가 크고 늠름하셨으며 효심이 깊고 우애가 있는데다 총명하기까지 하셨다.'고 기록하며 호감을 드러냈다.
 
홍씨가 세자빈이 되면서 아버지 홍봉한도 관직을 부여받아 사도세자를 교육하는 일을 맡았다. 사도세자에게는 장인이자 스승님이 된 것. 미래의 국왕이 될 늠름한 남편에, 승승장구하는 친정까지 그야말로 홍씨로서는 '로열패밀리'로서의 축복받은 삶만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10살짜리 세자빈에게 궁궐에서의 시집살이는 만만치않았다. 홍씨는 왕실 법도상 매일같이 아침부터 영조를 비롯한 왕실의 어른들에게 돌아가면서 문안인사를 하느라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정작 함께 동행해야할 남편 사도세자는 번거로운 예법을 따르는 걸 귀찮아하고 문안인사를 가기 싫어해서 홍씨가 남편을 어르고 달래 억지로 끌고가느라 진땀을 빼야했던 경우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홍씨는 한중록에서 "궁궐 법도가 그리 엄했던가 싶더라.그래도 괴로워한적이 없었으니, 내 됨됨이가 옛날 사람이라 이를 능히 감당하였던가 싶더라"고 회상하며 어린 나이에도 궁궐에서의 시집살이에 성숙하게 대처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세자가 성장해가면서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이 차츰 깊어졌다.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에 대하여 "활쏘고 칼쓰고 그림 그리기로 날을 보내고, 잡서를 좋아하여 이를 가지고 공부하며 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대로 치면 예체능을 좋아했던 셈이다.
 
하지만 국왕으로서 학문적 소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공부는 뒷전이고 놀기만 좋아하다고 생각하여 못마땅해했고, 신하들 앞에서 호통을 치며 망신을 주기도 했다. 홍씨도 사도세자의 옆에서 시아버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직감했을 것이다.
 
결혼한지 5년만인 1749년, 영조는 돌연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 군주가 후계자에게 국정을 위임하는 것)을 명한다. 성인이 된 세자에게 국정을 경험하게 함으로서 세자로서 책임감도 갖게 하고, 그 능력을 검증해보기 위한 영조의 의도였다. 홍씨가 18세가 되던 1752년에는 왕위를 이을 아들을 출산하니 그가 바로 미래의 조선 22대 국왕이 되는 정조(이산)다.
 
하지만 홍씨의 행복은 길지않았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이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오히려 더욱 악화됐다. 영조는 표면적으로는 대리청정을 지시했지만 정작 사도세자에게 실권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고 사사건건 간섭하며 압박했다. 사도세자가 독단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면 이에 제동을 걸며 뒤집었고, 문의를 하면 그 정도도 알아서하지못한다고 질타했다. 사도세자가 어쩌다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신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며 꾸짖었다.
 
사실상 학대에 가까운 영조의 압박에 견디다못한 사도세자는 점점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사도세자는 옷입기를 어려워하는 의대증에 시달렸고, 우물에 뛰어들려고 하는가 하면, 내시나 궁녀들을 수없이 살해하는 등 이상 행동을 거듭했다. 이러한 사도세자의 증상은 현대적으로 보면 '조현병'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사도세자의 광기는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1760년 7월에는 사도세자가 바둑판을 얼굴에 집어던지는 가정폭력으로, 홍씨가 하마터면 왼쪽 눈을 실명할뻔했던 아찔한 사건도 기록되어있다. 홍씨와 아버지 홍봉한은 상황이 더 악화될까봐 차마 영조에게 사실을 알리지못하고 속앓이를할 수밖에 없었다. 홍씨는 한중록에서 "모르는 이들은 세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였다", "그저 세상을 만난 바가 기구하니 서글프고 서글프구나"라며 기구한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1762년 5월, 끝내 돌이킬수 없는 비극이 벌어진다. 바로 아버지 영조가 아들이자 후계자인 사도세자를 뒤주로 가두어 죽이는 전대미문의 임오화변(壬午禍變)이었다.

이 무렵 사도세자는 '나경언의 고변(반란 모의설)'과 그간의 비행 등이 폭로되며 이미 벼랑 끝에 몰려있는 상태였다. 급기야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를 비난하며 광기를 드러낸 정황도 있다. 영화 <사도>에서는 사도세자가 칼을 들고 영조를 살해하려고 찾아갔다가 세손인 아들 정조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포기했다는 내용으로 재해석했다.
 
홍씨로서는 남편이 역적이 된다면 아들 정조마저 '역적의 자식'으로 전락하게될 최대의 위기였다. 절박했던 홍씨는 시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를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이씨는 영조를 만나 "옥체를 보호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평안히하는 일이 옳사오니, '대처분'을 하소서"라고 청했다고 한다. 여기서 대처분이란 바로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 손자를 구하라는 의미다. 친모인 이씨의 눈으로 보기에도 이미 사도세자는 더 이상 손을 쓸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
 
결심을 내린 영조는 창덕궁으로 사도세자를 소환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서인한뒤 자결을 명했으나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자, 뒤주에 가두는 처벌을 내렸다. 사도세자는 뒤주안에서 결국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홍씨는 남편이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할 동안 내내 침묵을 지켰다. 홍씨의 친정아버지이자 영의정이었던 홍봉한 역시 사위인 사도세자를 구명하는데 소극적이었다. 부녀는 아들이자 세손인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 사도세자를 외면한 것이었다.
 
사도세자가 페서인이 되면서 홍씨 역시 폐세자빈이 되어 18년만에 궁궐을 떠나게 됐다. 홍씨는 궁을 나와 친정집으로 돌아오다가 혼절했다고 한다. 홍씨는 "그 망극한 일을 겪고 어찌살리오.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못하니라. 나마저 죽으면 열한살 세손에서 첩첩한 아픔을 끼치는 것이라. 또 내 없으면 어찌 세손이 무사히 자라리오"라고 당시의 참담한 심경을 전하면서도 아들 때문에 차마 삶을 포기할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사도세자가 끝내 세상을 떠난뒤, 영조는 자신이 죽은 아들에게 사도(思悼,생각하고 그리워하다.)라는 시호를 내리고 세자로 복권시킨다. 자연히 홍씨와 정조도 세자빈과 세손의 지위를 회복하고 궁으로 돌아온다.

이 역시 아들에 대한 진심어린 추모보다는 정치적 계산을 고려한 결정이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영조는 세손 정조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위하여 사도세자를 제거했지만, 사도세자를 복권시키않는으면 손자 역시 평생 '역적의 자식'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궁으로 돌아온 홍씨는 시아버지 영조와 임오화변 이후 처음으로 대면한다. 홍씨는 "저희 모자가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다 성은이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남편을 죽인 시아버지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인사를 한 것이다. 이는 영조의 정치적 결정에 적극적으로 동의함으로서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물론이고, 대신 아들 정조만을 지켜달라는 간절한 호소가 담겨있었다.
 
심지어 홍씨는 정조를 자신의 곁이 아닌 영조의 거처로 보낼 것을 부탁한다.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대처분을 찬성했던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미래를 감안할 때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존재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영조가 새롭게 왕비로 맞이들이며 새 시어머니가 된 정순왕후의 나이는 정작 며느리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렸기에 후계자가 될 새로운 아들을 낳을 가능성도 있었다. 홍씨는 반대세력과 정순왕후라는 잠재적 위협으로부터 아들을 지킬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영조 곁에 가까이 두는 것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정조는 이후로도 종종 홍씨를 찾아와 문안인사를 했고 그때마다 어머니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엄한 궁궐 분위기와 정치적 환경 속에서 두 사람이 마음편하게 모자의 정을 나누기란 쉽지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홍씨는 오직 아들만을 바라보며 비통한 세월을 14년이나 견뎌야했다.
 
시간이 흘러 1776년, 마침내 정조가 승하한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국왕으로 등극한다.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언급하며 금기시되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거론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대의 유지를 잘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며 여론을 안심시키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반대세력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있었다는게 학계의 해석이다.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한 홍씨의 불행은 드디어 막을 내린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또다른 시련의 시작이 된다. 바로 친정인 홍씨 가문의 몰락이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관한 외가에 대한 증오심과 의문을 품고 있었다. 홍봉한은 당시 세손을 보호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영조의 척신으로서 사도세자를 비호할만한 힘이 없었다. 하지만 당쟁이 극심했던 당시 상황에서 홍봉한의 행적은 약점을 잡히기 충분했다. 세손 시절 정조가 외가와 점점 거리를 두면서 홍씨 가문 역시 정조의 보호자에서 반대세력으로 돌아선 상태이기도 했다.정조는 직접적으로 홍봉한을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탄핵을 받고 몰락하는 과정을 사실상 방치했다.
 
여기에 1777년에는 '정조 암살시도 사건'이 발생하고 여기에 홍씨의 친동생이자 정조에게는 외삼촌이었던 홍낙임이 연루되었다는 폭로가 나왔다. 홍낙임은 비록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홍씨의 가족들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 칩거하듯 살게된다.
 
애지중지했던 아들의 손에 친정이 몰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했던 홍씨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홍씨는 "나로 인하여 우리 집안이 이리되었다. 생각할수록 내 몸이 없어져 불효를 사죄하고자 하였다"며 자책했다.
 
홍씨는 자신의 가문이 사도세자의 죽음이나 정조에 대한 반역에 핵심적으로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벗고 싶어했다. 이에 정조는 어머니를 위하여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한다. 정조는 아들 순조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날 것이고, 순조가 외가인 홍씨 가문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겠다는 것. 정조는 아직 홍씨 가문에 대한 의심과 앙금이 남아있는 상태였고, 정치적인 부담에서 자유롭지못한 자신보다는 아들 순조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혐의를 풀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1800년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돌연 세상을 떠난다. 홍씨는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어야했으며 <순조실록>에 따르면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혹독한 원통함이 심하여 거의 보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손자인 순조가 그 뒤를 이어있지만 정작 그는 아버지 정조와 할머니 홍씨간의 약속을 모르고 있는 상태였고 나이도 아직 어렸다. 여기에 수렴청정에 나서며 실권을 거머쥔 시어머니 정순왕후는 홍씨의 집안과는 적대세력이었다. 정순왕후와 집권세력인 벽파(僻波)는 정조가 추진하던 정책을 모두 뒤집었고, 홍낙임에게는 천주교도라는 누명을 씌워 제거했다.
 
홍씨는 한중록을 통하여 그동안 궁궐에서 자신이 보고 겪었던 사건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홍씨의 마지막 희망은 손자 순조였다. 재위 3년만인 1803년 마침내 수렴청정을 벗어나 친정에 나선 순조는, 할머니의 한중록을 읽은 뒤 홍봉한과 홍낙임을 복권시키고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의 죽음 및 역모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홍씨가 한글자씩 정성을 다하여 기록해둔 일기가 결국 가문을 구하는 구세주가 된 것이다.
 
한중록은 아들 정조가 그토록 모든 기록을 없애려했던 사도사제의 광증이나 흑역사들까지 모두 자세히 서술해놓았다. 이는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며, 홍씨 가문의 무고함을 알리려는 의도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홍씨는 가문이 복권된 이후 손자 순조에게 "이제야 제가 편하게 눈을 감을수 있겠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1816년 홍씨는 81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혜경궁 홍씨는 불행한 삶을 한많은 여인에서부터, 알고보면 대단히 정치적 인물이었다는 평가까지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한 의도와 진심이 어찌되었든, 그녀가 남긴 소중한 기록 덕분에 우리가 역사를 그만큼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벌거벗은한국사 혜경궁홍씨 사도세자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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