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선가 발생한 불의는, 세상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Injustice anywhere is a threat to justice everywhere).'

평생을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의 유명한 어록이다.

무심코 내던진 작은 담뱃불씨 하나가 거대한 산불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처럼, 불의는 강한 전염성을 지닌다. 어쩌면 불의한 일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은,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고 방치하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란 설사 불의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잘못을 바로잡고 정의에 대한 올바른 기준과 희망을 제시하는 사회다.
 
반세기도 지난 킹의 어록을 오늘날 새삼 되새기는 이유가 있다. 지난 6월 22일 서울 종로구 대한축구협회 축구회관에서는 프로축구연맹이 주관하는 '인종차별 상벌위원회'가 열렸다. SNS에서 인종차별적 언급을 한 울산 소속 박용우, 이성, 이명재 등과 울산 구단에 대한 징계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해당 선수들과 구단 팀매니저는 공개된 SNS에서 선수의 외모와 피부색을 동남아시아인에 빗대어 농담을 주고받으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 특히 박용우는 과거 K리그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뛰었던 태국 선수 사살락의 실명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들의 SNS 발언이 알려지며 국내 팬들은 물론이고 태국을 비롯한 해외 팬들, 심지어 사살락 본인까지 울산 현대 선수들의 부적절한 행동을 강도 높게 비판했고, 이 사건은 국제적인 인종차별 문제로 확산됐다.

선수들은 논란이 커지자 게시물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다. 울산 현대구단은 지난 12일 공식 SNS에 관련 사과문을 게재했고, 하루뒤에는 홍명보 울산 감독도 소속선수들의 부적절한 행동에 공개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프로축구연맹과 대한축구협회에서는 해당 관련자들을 결국 상벌위원회에 회부했다.

40년 만에 열린 '인종차별' 관련 상벌위원회
 
 프로축구 울산 현대 소속 정승현(왼쪽부터), 박용우, 이명재, 이규성이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축구협회 축구회관에서 열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인종차별 논란 관련 상벌위원회에 각각 출석하고 있다.

프로축구 울산 현대 소속 정승현(왼쪽부터), 박용우, 이명재, 이규성이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축구협회 축구회관에서 열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인종차별 논란 관련 상벌위원회에 각각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83년 출범한 K리그에서 인종차별과 관련해 상벌위원회가 열린 것은 40년 만에 이번이 처음이었다. 팬들은 과연 연맹이 어느 정도의 징계를 내질지 주목했다. 위원회에서도 선례가 없었던 만큼 수위를 정하는 데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예상보다 실망스러웠다. 연맹은 세 선수에게 각각 1경기 출장정지와 제재금 1500만 원의 징계를 내렸다. 또 울산 구단에 대해서도 선수단 관리의 책임을 물어 제재금 3000만 원을 부과했다.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적 언급을 하지 않은 정승현은 징계를 피했다.
 
연맹 상벌위는 이번 징계 결정에 대하여 "선수들이 특정 인종이나 개인을 비하하거나 모욕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피부색과 외모 등 인종적 특성으로 사람을 구분하거나 농담의 소재로 삼는 것 역시 인종차별 내지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면서도 "징계 수위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행위가 아니라 SNS에 게시했다는 점, 해외 리그에서 비슷한 징계 사례들을 참고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연맹 상벌 규정을 보면 이미 인종차별적 언행에 대한 구체적 징계 기준은 마련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10경기 이상의 출장정지, 1000만원 이상'의 제재금 부과가 가능했다. 하지만 연맹은 이번 사안에 대하여 제재금을 약간 높게 부과한 대신, 출장정지 경기수는 고작 1경기로 대폭 낮췄다. 연맹은 저 두가지 징계 중 하나만 충족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명백한 인종차별 행위에 대하여 형식적인 '솜방망이' '봐주기' 징계에 그쳤다는 비판 여론이 나오는 이유다.
 
스포츠계의 인종차별 문제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민감한 이슈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면서 K리그의 이미지까지 실추시켰다. 많은 팬들이 상벌위원회의 결정에 주목했던 것은 그만큼 한국축구 사상 초유의 사태에 대하여 연맹 차원의 납득할 만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 때문이었다.
 
연맹은 해외의 사례를 참고했다고 밝혔는데, 유럽에서도 징계 기준이 다양한 것은 맞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일단 인종차별이 인정될 경우에는 단호한 일벌백계를 내린다.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이 활약하는 만큼 인종차별 사건도 자주 벌어진다. 12년 전인 2011년 리버풀 소속이던 루이스 수아레스는 맨유의 파트리스 에브라에게 흑인을 지칭하는 비속어인 '네그리토'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8경기 출전정지에 4만 파운드(약 6천600만원) 제재금의 징계를 내렸다.
 
또한 같은 해 첼시의 존 테리는 QPR 소속의 안톤 퍼디낸드와 경기중 말싸움을 하다가 피부색을 빗댄 폭언을 한 사실이 적발되며 4경기 출전정지와 벌금 22만 파운드(약 3억6천만원) 징계를 받기도 했다. 
 
울산 선수들의 경우, 경기장이 아닌 SNS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인종차별에 대한 고의성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여 징계 수위를 정했다는 게 연맹 상벌위의 입장이었다. 과연 그럴까? 유럽에서도 SNS를 통한 인종차별은 오히려 더 비일비재하며 징계로 이어진 경우는 드물기는 하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2011년 존 테리-안톤 퍼디난드 사태 당시 안톤의 형인 맨유의 리오 퍼디난드는 팀동료인 테리를 옹호하던 첼시 수비수 애슐리 콜을 가리켜 '초코 아이스'라는 단어를 쓰며 비판한 것이 또다른 인종차별 발언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흑인이 같은 흑인에게 인종차별을 저지른 보기드문 사례였다. 인종차별을 비판하던 퍼디난드는 이 실언 하나로 본인이 오히려 또다른 인종차별을 저지르며 무려 4만5천 파운드(약 7300만 원)의 무거운 벌금을 내야했다. 이번 울산 선수들의 사례가 과연 퍼디난드보다 가볍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종차별' 사태를 바라보는 이중성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번 사태로 인하여 한국축구가 인종차별의 심각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한국축구는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입장을 더 배려한 듯한 소극적인 결정을 내렸다. 당사자 중 한 명인 박용우는 심지어 논란 직후 국가대표팀에 그대로 차출되었으며 A매치 데뷔전까지 치렀다. 클린스만 축구대표팀 감독은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며 박용우를 감싸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국축구는 이번 사태로 '나쁜 선례'를 남겼다. 그동안 해외무대를 누비는 한국 선수들이 외국에서 겪어야했던 숱한 인종차별에 슬퍼하고 분노하던 팬들은, 이제 할말을 잃게 됐다.

만일 손흥민이나 이강인같은 국민적 사랑을 받는 선수들이 앞으로 해외무대에서 사살락과 비슷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기분이 들까. 이번 사태를 통하여 우리 모두가 언제든 인종차별과 혐오에 있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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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프로축구연맹 상벌위원회 마틴루터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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