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해식은 중화요리집 사장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최해식은 중화요리집 사장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 최해식 제공


역대 프로야구 최강 왕조를 언급하면 가장 먼저 꼽히는 팀은 단연 KIA 타이거즈의 전신 해태 타이거즈다. 통산 9회 우승에 빛나는 것과 더불어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에서 패하지 않은 진기록은 세계 스포츠 역사에서도 드문 케이스다. 이러한 힘은 현 KIA로까지 이어져 단 한 번의 준우승없이 11회 우승이라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당시 해태가 무서웠던 점은 선수층도 얇고 주전들도 타 팀에 비해 압도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큰 경기에서 강했다는 점이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최해식(54‧우투우타) 또한 그랬다. 포수라는 포지션을 감안해도 통산 타율 2할 1푼 7리, 홈런 17개, 165타점의 성적은 별반 대단할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플레이오프를 비롯 한국시리즈에서의 최해식은 달랐다.

포수로서 든든하게 안방을 지켜주면서 경기의 흐름을 읽어가며 플레이한 것을 비롯 승부처에서 클러치 능력까지 선보이며 상대팀의 예봉을 꺾는 노련한 승부사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최해식이라는 이름을 팬들이 잊어버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파워인터뷰'에서는 프로야구 개막을 앞둔 시점에서 해태 왕조의 마지막 안방마님으로 맹활약했던 최해식과의 인터뷰를 진행해보았다. 
 
"솔직히, 야구보다 중국집 일이 더 힘들었습니다"
 
 양궁스타 기보배, 개그맨 양원경과 함께

양궁스타 기보배, 개그맨 양원경과 함께 ⓒ 최해식 제공

 
- 배달 전문 중국집으로 성공을 거두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은퇴 후 바로 시작한 것인가요?
"그것은 아니구요. 은퇴 후에 고등학교에서 인스트럭터로 있었어요. 그러던 중 감독하고 마찰이 있었어요. 지도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을 심하게 때려서 말리다가 안 될 것 같아서 화가 나서 나와버렸죠. 그냥 구타도 안 될 말인데 삽 등 농기구로 머리를 때리고 그건 정말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저도 맞고 운동을 한 세대이고 그 당시에도 어느 정도의 구타는 존재했지만 농기구를 쓴다는 것은 순전히 개인 감정이 들어가서 화풀이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였습니다."
 
- 많은 업종 중에서 유독 중화요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방송 해설자 등을 해보려고 했어요. 기회도 있었고요. 그런데 당시 집사람이 부업 개념으로 중화요리집을 시작했어요. 아내가 힘든 일을 하는데 남편은 나가서 저 좋아하는 해설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어쩔 수 없이 오토바이를 타게 됐죠."
 
- 본래부터 중화요리 경험이 있으셨나요? 지금은 음식도 직접 만드신다고 알고 있어요.
"경험은 전혀 없었어요. 사실 중화요리는 주인이 직접 만드는 게 맞아요. 내가 할 줄 알아야 사람도 부리고 하는 거죠. 하지만 주방장들이 잘 안 알려줍니다. 다들 밥줄이잖아요. 처음에는 주방장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뒤에서 힐끗힐끗 보면서 눈썰미로 요리도 배우고 칼질도 혼자 연습하고 그랬습니다. 다른 식당도 마찬가지겠지만 애를 먹이는 주방장들도 많아요. 주인 입장에서는 주방장이 없으면 장사를 할 수 없으니 질질 끌려다니기 일쑤죠. 술만 먹었다 하면 다음날 안 나오고 마음고생이 정말 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는 지인한테 괜찮은 주방장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말했어요. 저도 배우면서 쓰고 싶다고. 그랬더니 소개시켜 주더라구요. 그래서 일을 같이하면서 옆에서 배웠죠. 그렇게 배우면서부터는 애 안 먹고 장사할 수 있게 됐어요. 열심히 하다 보니 이제는 주방장을 가르칠 정도까지 됐습니다.(웃음)" 
 
- 중화요리사업이 잘 되어서 분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창 때는 열몇 개까지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확 줄였습니다. 이게 일일이 다 관리한다는 것이 힘드니까 분점에서 사고가 터지면 제가 대신 욕을 먹어요. 아무래도 최해식이라는 이름이 있다보니 그런 쪽으로 말도 나오구요. 확실히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되겠더라구요. 정말 간절하게 열심히 하시겠다는 분들만 함께 하고 있습니다. 딱 현재가 좋은 것 같아요."
 
- 야구하고 중화요리 사업하고 어떤 것이 더 어려웠을까요?
"다들 알다시피 중화요리 배달은 가장 힘든 업종 중 하나 아닙니까. 비 오면 비 맞고 눈 오면 눈 맞고, 더우면 더운 대로 땀 뻘뻘 흘리고. 사실 힘든 것으로만 따지면 야구도 만만치 않지만 둘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중화요리 사업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야구는 육체적으로 힘든 것을 떠나 팬들의 사랑이라는 게 있잖아요.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지만 경기장에서 관중들의 함성과 응원소리를 들으면 야구하기 잘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반면 중화요리 배달을 다니다보면 어딜가든 무시받기 일쑤죠. 사람 대접을 잘 못 받아요. 사람들은 참 이상한 게 배달통 들고 헬멧 쓰고 오토바이만 타면 그렇게 무시를 해요. '야, 야' 하면서 반말하는 사람도 많고요."
 
- 상처되는 말이 꽤 많았네요?
"맞습니다. '야구 선수 최해식이가 어쩌다 짜장면 배달까지 다니냐'는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아는 사람한테도 별말을 다 들었죠. (고) 이호성이가 예전에 저한테 그럽디다. '품위 떨어지게 프로 야구 출신이 무슨 중화요리 배달을 다니냐?'고요. 그래서 대답했죠. '너는 집이 돈이 많아서 예식장이라도 하지만 나는 가난해서 이거라도 해야 먹고 산다. 그냥 나를 투명인간 취급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이야 중화요리로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서 덜하지만 그 전까지는 상처도 겁나게 받았죠."
 
- 지금 야구 선수들은 잘하면 돈을 많이 벌잖아요. 하지만 과거 선수이시고 특히 팀이 해태라 하신 만큼 돈을 많이 벌지는 못 하신 듯해요.
"그렇죠. 아시잖아요. 해태. 지금이야 몇백프로씩 올라가지만 당시에는 기껏 올라봤자 25% 정도나 올랐으려나. 성적이 나고 우승을 해도 대가는 정말 적었습니다. 거기에 제가 한창 활약하고 우승할 무렵에는 모그룹도 많이 어려웠구요. 연봉 올려달라고 하면 '너 돈 주려면 브라보콘을 몇 개를 팔아야 되는지 아냐?'는 소리나 듣고 그랬죠(웃음)." 
 
"생각해보면 트레이드는 저에게 잘된 일이었죠"
 
 아내와 함께

아내와 함께 ⓒ 최해식 제공

 
- 야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당시는 이리(익산) 국민학교였죠. 그때 야구부가 창단을 했는데 선생님들이 몸집이 크고 잘 뛰게 생긴 아이들을 모았어요. 4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시작한 것 같아요. 다들 열심히 해서 6학년 때는 전국대회 8강인가 했어요. 당시 신생팀으로서 기적이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군산남중, 군산상고, 건국대학교로 가게 됐습니다. 그때 야구를 나름 잘했던지라 건국대 갈 때 동기들도 3명이나 데리고 갔어요. 사실은 고려대나 연세대를 가고 싶었는데 친구를 안 데려가면 학교에서 도장을 안 찍어줘요.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가야하기 때문에 건국대를 가게된거죠."
 
- 포수라는 포지션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초등학교 때부터 했어요. 체형이 딱 포수하기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쉬운 게 학년이 올라가면서부터는 기대만큼 체격이 안 크더라구요. 그때 골똘히 생각했어요. 거포형 포수로는 힘들 것 같으니 뭘하면 좋을까. 스스로 내린 결론은 수비였어요. 어차피 하던 포수인데 체격과 힘이 안 는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나름대로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판단했죠. 어떻게 하면 투수들이 공을 던지기 편한 포수가 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쌍방울 구단 역사상 최초의 1차 지명 선수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1차 지명에 1번이었어요. 아마 때는 타격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프로에 오니 변수가 생겼어요. 제가 간이 안 좋았어요. 간염이 온 거죠. 몸과 마음이 무기력해져버리는 거예요. 제 역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쌍방울한테 서운한 게 군대를 가 있는 상태에서 트레이드를 당했어요. 군 복무 중에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너무 속이 상해서 '나 야구 안 해'라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시는 지금보다도 훨씬 소속팀에 대한 애착심이 강한 시대였어요. 쌍방울을 우리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소식을 들으니 청천벽력같더라고요. 그때 선배들이 '해태는 다른 어떤 팀보다도 실력 위주로 팀이 돌아가니 열심히만 하면 기회를 얻기는 더 쉬울 것이다'고 조언을 해주더라고요. 포수층 역시 쌍방울보다 얇다고 볼 수 있었던지라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죠."
 
- 선수 개인으로서도, 해태 입장에서도 포수 최해식의 트레이드는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김응룡 감독님께서는 파벌이나 선후배 그런 것 전혀 가리지 않으세요. 본인이 봐서 되겠다 싶은 선수는 충분히 기회를 주고 밀어주는 스타일이죠. 장단점을 잘 파악해서 활용하는 데 매우 뛰어나셨어요. 거기에 (선)동렬이 형이 마운드에 올라가는 날이면 꼭 저하고 배터리를 이루고 싶다고 말을 했어요. 그 형이 투구폼이 커요. 그런데 저는 포구도 잘하고 글러브질을 통해 볼도 스트라이크같이 보이게 하는 것에 능했어요. 이것이 매우 중요하죠. 이걸 잘하면 투수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동렬이형이 그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 감독님도 유심히 지켜보셨겠죠. 일단 투수들이 스트라이크 던지는 비율이 높아지고 거기에 제가 송구가 빠르다보니까 눈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 1996년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가 한국시리즈 사상 1호 퇴장의 기록을 남기셨어요.
"솔직히 누군가는 했어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한국시리즈같은 큰 경기에서 누가 퇴장을 당하고 싶겠어요.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투수와 얼싸안고 기쁨을 누리는 장면은 모든 포수의 꿈이잖아요. 그런데 당시 분위기가 상대팀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던지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죠. 스트라이크존이 이상했어요. 현대한테만 좋게 잡아줘요. 불공평했어요.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달라지는 게 없겠구나'라고 판단했어요. 감독님께서도 '야, 안 잡아주냐? 안 잡아줘?' 계속 물어보시더라구요. 항의의 필요성을 묵시적으로 주신 것이죠."
 
- 퇴장으로 인해 분위기가 바뀐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어느 정도는요. 결과적으로는 제가 퇴장 당함으로써 심판이 부담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되자 제가 느끼기에 이번에는 저희팀 쪽으로 유리하게 볼판정이 많이 나왔어요.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전에 있었던 불공정한 스트라이크존은 거의 안 보이더군요. 물론 이런 게 좋은 것은 아니에요. 그냥 당시 시대상이 좀 그랬어요. 어쨌든 저의 퇴장 이후로 넘어갈 뻔한 분위기가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 
 
- 예전 해태 특유의 분위기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비록 해태 끝자락에 활약하셨지만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선후배 관계가 엄격하기는 했어요.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팀이 아니다보니 악으로 깡으로 하는 문화가 발달했고 그 과정에서 다들 악바리 근성이 발휘되기는 했죠. 아시다시피 김응룡 감독님도 무서운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고요. 하지만 정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은 어느 팀보다도 끈끈했습니다. 누가 무슨 일 당했다고 하면 내 일처럼 걱정해주고, 크고 작은 일에 발 벗고 나서주는 등 가족같은 분위기도 강했죠. 엄하기만 했다면 어떻게 성적이 나왔겠어요. 좋은 점도 많았기에 서로 잘 결속해서 우승도 많이 하고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 해태 왕조를 겪어본 선배로서 이후 KIA의 성적이 썩 좋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밖에서 지켜볼 때 아쉬운 점 등이 보이실 듯싶어요.
"이건 제가 왈가불가할 문제가 아닐 듯합니다. 시대가 비슷하면 모를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잖아요. 이제는 제 자식뻘 되는 선수들이 뛰고 있는데 환경, 생각하는 것 모든 것에서 달라져버렸어요. 그렇다고, 요즘 친구들은 근성이 없어. 근성! 근성을 보이란 말이야. 그럴 수도 없고요(웃음). 명색이 학창 시절부터 꾸준히 견디어내고 프로까지 진출했는데… 지금 친구들이라고 왜 근성이 없겠어요. 표출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죠. 저희 때와 달리 KIA는 모기업의 지원도 탄탄하고 야구만 잘하면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 없어졌죠. 지난해 김도영에 이어 올해 윤영철이라는 특급 신인이 가세한 만큼 더 좋은 모습 보여서 강호 타이거즈의 명성을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예전 선배는 열심히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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