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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파 서민호 선생은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었다.
▲ 월파 서민호 묘역 월파 서민호 선생은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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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파 서민호 선생의 영결식이 1월 24일 오전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거행되었다. 국무총리 정일권이 장례위원장을 맡고 평생의 지인들과 각계 인사들이 장례위원으로 위촉되어, 평소의 염원에 따라 통일로변(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신세계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애족장 추서 이후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 

생전에 고인의 "통일로 인접산에 묻게 해서 통일된 날 남북을 오가는 동포들을 저승에서라도 바라보게 해 달라"는 말씀에 따른 것이다. 정부는 2001년 독립운동가로 서훈,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월파선생 1주기를 맞아 묘비건립위원회(위원장 정일형)가 결성되고 1975년 6월 7일 경기도 양주근 장흥면 신세계 공원묘지에서 추모제와 추모비 제막식을 가졌다. 김용갑이 찬하고 김원필이 쓴 <비문>이다.

비문

월파 서민호 선생은 1903년 4월 28일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에서 선고 서화일 선생과 선비 이원래 여사의 풍족한 가정에서 출생하시다.

개화의 시운에 따라 부모의 슬하를 일찍 떠나 학업에 전념하시니 11세의 어린 나이로 초급과정을 일본 동경에서 마치고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조도전대학을 수료한 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얻으시다.

원래 호협 담대 불의를 보고는 그대로 넘기지 못하시는 성품 때문에 글자 그대로 형극의 길에서 파란만장의 일생을 보내시다. 일본의 폭정 하에서도 항상 마음은 조국의 광복에 있으되 뜻을 펴지 못하시고 한때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르신 바 있다. 

1945년 마침내 해방의 기쁨과 더불어 전남지사·조선전업사장을 역임하신 후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시다. 1950년 6.25 동란으로 국사가 자못 어지러운 무렵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사건의 진상규명과 그 사후 처리에 온갖 심혈을 기울이시다. 1952년 정치파동에 즈음 독재에 항거, 8년간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시다가 4.19 학생의거와 더불어 옥중에서 풀려 5대 민의원부의장의 중임을 맡으신 바 있고, 1961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신 후 남북교류와 평화통일을 역설하시다. 

6, 7대의원 생활을 통하여 이 나라 헌정의 회복과 민권의 신장에 헌신하시고 나아가 사회정의의 실현에 대한 불타는 정열은 마침내 대중당을 몸소 조직하였고, 동당 지명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셨으나 야당연합을 위하여 이를 두 차례나 사퇴하신 바 있다. 

정치의 후선으로 물러나신 만년에도 조국통일의 집념을 저버리지 못하시고 뜻 있는 동지들과 통일연구협회를 창설하시어 정열을 쏟으셨으나 남북통일을 숙제로 남긴 채 1974년 1월 24일 서거하시니 선생의 유덕을 추모한 나머지 사회장으로 모시다. 앞에 가로 뻗친 통일로가 보이는 이곳에 유택을 스스로 정하시니 선생의 유지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기르고 새겨질 것이다. 선생의 초배는 정희린씨이고 후배는 하상희씨이다.    

누구보다 월파 선생과 이념적으로 가까웠던 김대중 전대통령의 1주기 추모사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서민호 선생을 말할 때 제게 있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재작년 5월에 미국 워싱턴에서의 상봉입니다. 그때 저는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많은 본국의 친지들이 미국을 다녀갔지만 누구도 저와 접촉하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만은 유독히 미리 일본서부터 연락하면서 꼭 만나기를 요청해왔습니다. 선생은 부인과 같이 댈러스, 켄자스 등을 거쳐 워싱턴에 오시자 막 바로 제가 묵고 있던 호텔에 찾아오셔서 같이 투숙하시고 같이 시내 나들이도 하셨습니다. 

그때 나타내서 말은 안했지만 그러한 선생의 행동에 얼마나 감동되었으며, 감격했는지 몰랐습니다. 참으로 일제 이래 만고풍상을 헤쳐 나오신 선생님 아니고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재작년 8월 13일 납치로부터 살아온 뒤에도 제일 먼저 내외분이 찾아오셔서 얼싸안고 기뻐해주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저의 손을 잡고 "김동지의 목숨은 하나님이 구해주셨소. 이제 나는 여생을 바쳐 김동지와 같이 민주회복과 통일을 이룩하겠소. 굳게 맹세합시다"하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주석 2)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주석
2> 김대중, <서민호선생을 추모하는 글>, <동아일보>, 1975년 1월 24일 광고.(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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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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