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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호 선생은 일제·이승만·박정희 치하에서 두루 고난을 당하면서도 정치적 양서류가 되지 않고  자신의 텃밭을 지켜왔다. 보수야당도 유지하기 어려웠던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으로부터 몇 차례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를 거듭하면서도 자신의 이념과 정책을 내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민주사회주의’라는 텃밭을 지켰던, 그의 삶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우리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느낀 안타까움의 하나는 깊게 조명되어야 할 인물이 역사의 장막으로 사라지거나 세월의 퇴적층에 속절없이 덮히는 경우를 보게된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환)도 원인일 것이다.   

식민지→해방(분단)→동족상쟁→백색독재→4월혁명→군사쿠데타→유신독재→10.26거사→신군부쿠데타→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문민시대→보수·진보정부 교체라는 정치사적 변화로 단절과 계승이 뒤범벅이 되었다.

6월항쟁 이후 35년 동안 보수(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가 다섯 번, 진보(김대중, 노무현, 문재인)가 세 번 집권하였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후진국→개발도상국(중진국)→선진국으로 발전하는 유일한 나라가 되고 영화·반도체·IT산업·스포츠·의료 등 여러 분야에서 국제적 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변화를 이끈 주도세력이 정치·정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는 아니지만 그동안 정치지도자·정당은 나라의 발전에 역행하기도 했고, 정치는 권력놀음으로 시대에 역류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해서 국민은 우수한 데 지도자는 저열하다는 평가도 따른다.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제1제정(1804)→왕정복고(1814년)→7월혁명(1830)→입헌군주제 성립(루이 필립 등장)→2월혁명(1818)→제2제정(1852)이라는 혁명과 반혁명, 왕정과 공화정을 겪었다. 43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변할수록 옛 모습을 닮아간다"는 말이 나왔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세계사적으로 반동의 역사는 길고 되풀이 되는 경향이 있다. 물적 기반을 갖고 결속력이 강하며, 일반인들의 변화·개혁보다 안전을 희구하는 성향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은 정변 수준의 변혁이 잦다보니, 지난 시절의 괜찮은 인물들도 쉽게 잊혀지고, 그들이 남긴 정치적·사상적 유산은 산실되고 만다.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1967.05.03. 제6대 대통령선거일 선거운동 벽보
▲ 제6대 대통령선거 서민호 후보 벽보 1967.05.03. 제6대 대통령선거일 선거운동 벽보
ⓒ 중앙선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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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은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해서이다. 월파(月坡) 서민호(徐珉濠, 1903~1974) 선생이다.

지금 50~60대 이상은 기억이 날 것이고 그 아랫 세대는 생소한 인물이다. 전남 고흥출신이고 대지주의 아들이며 16세 때 3.1혁명에 참가하여 6개월간 복역하고 일본 와세다대학과 미국 웨슬리안 대학 졸업, 귀국하여 교육사업을 하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 초대 광주시장에 이어 전라남도 도지사, 제2대 국회의원으로 국민방위군사건·거창민간인학살사건 등의 날선 진상규명으로 이승만 정권과 대결. 국회내무위원장으로 지방시찰 중 자신을 살해하려는 현역대위를 사살,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

제5대 민의원(국회의원), 국회 부의장, 제6대 국회의원, 남북한 서신교류와 군축주장,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며 의원직 사퇴, 민주사회당 창당,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 2년 징역형, 혁신계열인 대중당 창당, 대통령후보, 반공법위반 혐의로 재구속, 제7대 국회의원 옥중당선, 3선개헌 국민투표 반대, 다시 대통령후보, 야권후보 단일화 위해 후보사퇴·통일연구협회 창설, 71세로 사망, 건국헌장 애족장 추서, 대전현충원 안장. 

대지주의 머리 좋은 아들로 태어나 일본, 미국의 유수한 학력과 배경이면 친일파나 친미파가 되거나 미국 유학시절 이승만의 인연으로 자유당 정권의 고위직은 차지하고도 남을 번지수인데 그는 야당진영에 섰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어학회에 참여하여 투옥되고 해방 후에는 민주진영에서 이승만의 폭정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살해 위기를 겪고 8년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정희 군사독재와 줄기차게 싸웠다.   월파 선생은 일제,이승만,박정희 치하에서 두루 고난을 당하면서도 정치적 양서류가 되지 않고 자신의 텃밭을 지켜왔다. 그 많았던 유산은 대부분 교육사업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고 죽산 조봉암 사형 이후 금기시 되다시피 한 혁신정당의 맥을 잇고 민주사회주의 이념을 살리고자 하였다. 민주사회주의를 공산주의와 4촌간 정도로 인식하는 척박한 시대였다. 보수야당도 유지하기 어려웠던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으로부터 몇 차례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를 거듭하면서도 자신의 이념과 정책을 내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야당 의원들이 걸핏하면 '의원직 사퇴'를 내걸고도 유야무야되기 일쑤였던 정계에서 그는 끝내 의원직을 내던진 소신파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날뛰던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대통령을 탄핵한다〉는 제목 아래 그의 퇴진을 촉구하는 대정부 정책 질의를 한 용기 있는 정치인이었다. 소신과 용기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내가 만약 대통령이라면〉의 제목 아래 정책 비전을 제시하고, 유엔을 통한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우리가 통일자주정부의 수립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호소하고 통일선거에 대비하겠다고, '통 큰' 제안을 하였다.

독불장군이면서도 대의를 위해서는 대통령후보를 양보하고 온갖 시련과 탄압에도 우리가 가야할 길은 '민주사회주의'라는 텃밭을 지켰던 분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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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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