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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호는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혼신을 다해 지원하였다.

정책분야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이번에 박정희를 낙마시키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국가적으로나 그 개인에게 불행히 닥칠 것을, 이승만 정권과 싸우면서 종말을 지켜보았고 체득하게 된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독재자를 퇴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다행히 김대중 후보는 자신의 정책인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교류, 특히 기자교류 등 대북정책의 일부를 수용하여 공약으로 제시했다. 해서 1971년 4월 21일 합당을 전제로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공식적으로 지원유세를 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런 과정에서 민중당 내의 반발이 적지 않았지만, 폭압정권의 종식을 꽤하고 수평적인 정권교체 이후에 자신의 혁신정책을 구현하는 길을 찾고자하는 전략을 설명하여 큰 소란이 일지 않았다.

거전은 당연히 박정희와 김대중 후보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공화당은 전국적인 막강한 조직과 풍부한 자금력으로 선거전에 나서고, 신민당은 김후보의 다양하고 참신한 정책과 전국적인 유세를 통해 이에 맞섰다.

김대중 후보는 10월 16일 첫 기자회견에서 ① 향토예비군 폐지 ② 대통령 3선조항 환원의 개헌 ③ 대중경제 구현을 위한 노사공동위원회 설치 ④ 미·일·중·소 등 4대국에 의한 전쟁억제 요구 등을 당면정책으로 제시했다.

4·27대선은 과거 어느 선거에 비해 여야 간의 정책대결로 진행되었다. 그것도 야당후보의 리드에 의한 정책대결이라는 특징을 보였다. 

김대중 후보는 지방도시의 유세를 통해 ① 대통령의 재산공개 ② 남북간의 서신교류·기자교환 및 체육인 접촉 ③ 지식인·문화인 및 언론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④제2의 한일회담 및 주월국군 철수 ⑤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권 연령 인하 ⑥ 반공법 제4조의 목적범 적용에 국한하는 개정작업 ⑦ 정부기관 일부의 대전 이전 ⑧ 전매사업의 공영화 내지 민영화 실현 등 많은 정책을 집권공약으로 내걸었다. 모두 155개에 달하는 집권 청사진을 제시하여 정책대결을 리드했다.

박정희 후보도 10개 부문에 걸쳐 56개 항목의 정책을 제시했다. 정치관련 공약에서 ① 국민여론을 바탕으로 한 발전적 민주정치의 구현 ② 야당협조로 생산적 정치윤리의 구현 ③ 민원행정 간소화 ④ 지방재정 자립도를 높여 단계적 지자제 실시 등을 제시하고, 경제정책에서 세제개혁 및 금융제도의 개선, 국토개발계획을 내세웠다. 

두 진영의 정책대결에 있어서는 김 후보의 정책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공약을 둘러싸고 쌍방간에 쟁점이 빚어지기도 했다. 쟁점은 주로 ① 안보논쟁 ② 통일문제와 남북교류 ③ 장기집권 시비 ④ 부정부패의 척결 ⑤ 예비군과 교련폐지 문제 ⑥ 경제정책의 특혜 시비 등에 집중되었다. 김 후보의 예비군 폐지 주장에 따른 대안의 제시는 일단 주춤해졌으나 정부 여당의 안보논쟁의 확산으로 정국에 긴장이 감돌기도 했다.

전국적인 유세 대결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벌어졌던 두 후보의 공방전이다. 박 후보는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김 후보는 "이번에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단언하여 많은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공화당측에서 노골적인 지역감정을 조장한 사실이다. 특히 국회의장 이효상은 "신라 천년 만에 다시 나타난 박정희 후보를 뽑아서 경상도 정권을 세우자"고 지역감정을 촉발시켰다. 야당탄압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김포·강화의 김 후보 차량 총격사건을 비롯, 김 후보의 집에서 폭발물이 터지고 정일형 선거대책본부장의 자택이 원인 모를 화재를 당하는 등 상식 밖의 일이 연달아 발생했다. 

정부 여당은 '조작극'이라고 잡아떼고, 경찰은 김 후보 자택의 화재는 "김 후보의 15세 된 조카인 김홍준 군의 단독범행"이고, 정 선거대책본부장 집의 화재는 고양이가 실화범이라고 밝혀 많은 국민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투표 당일에도 여러 가지 관권 개입으로 시비가 일었다. 심지어 김대중 후보가 투표한 마포구 동교동 제1투표소에서는 투표구 선관위원장이 사인(私印) 대신 직인을 찍어 1,690표가 무효로 돌려지기도 했다. 개표 결과 박정희 후보가 634만 2,828표를 얻어 539만 5,900표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94만 6,928표를 앞질러 당선이 결정되었다. 뒷날 드러난 바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대선에 1년 국가총예산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엄청난 금권선거였다.

4·27선거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① 지방색의 노출 ② 표의 동서현상 ③ 여촌야도의 부활 ④ 군소정당의 철저한 몰락이었다. 이 선거에서 영남에서는 72대 28의 비율로 박 후보 지지표가 쏟아졌으나 호남에서는 65대 35의 비율로 김 후보 표가 나왔다. 지역별로 보면 박후보가 영남지방에서 전승의 기록을 세운 데 비해 김 후보는 진안·무주·고흥·곡성에서는 오히려 뒤졌다. 

제7대 대선과정에서 박정희는 더 이상 국민직선으로는 재집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유신체제를 구상하고, 김대중을 제거의 대상으로 지목, 온갖 탄압을 자행하였다. 서민호는 격동의 현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위치를 안타까워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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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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