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교섭>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

영화 <교섭>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 ⓒ 메


 
 5년 전 발표한 영화와 지금의 이 영화의 온도차가 꽤 크다. <리틀 포레스트>로 잔잔한 감독과 여운을 준 임순례 감독이 170억 원대 대작 <교섭>의 연출자로 관객과 만나게 됐기에 그렇다. 한국 여성 감독이 대규모 블록버스터 기획에 참여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16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임순례 감독에게 이 영화의 시작과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영화는 2007년 발생한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물이다. 당시 분당의 한 교회 교인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여행 금지 국가였던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다가 탈레반 정권에게 납치되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실제 피랍된 23명의 한국인 중 두 명이 사살당했고, 나머지 인원은 정부의 끈질긴 협상 끝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실제 사건에서 선택한 것과 버린 것
 
소재 특성상 감독 입장에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여론은 정부의 금지 권고를 무시하고 떠난 선교단에게 비판적이었는데, 영화는 그런 외부 요인보다는 한 외교관과 국정원 직원이 백방으로 뛰며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영화가 나오면 분명 그때 사건과 비교를 피할 순 없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 본질적 토론보단 소모적 논쟁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기에 걱정이 많긴 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논쟁 지점이 아닌 직접 협상하러 가는 두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더라. 물론 피랍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나온 여러 이야기나 상황을 아주 분리할 순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교섭단 중 절대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되는 사람이 노출된 적이 있다. 선글라스 맨이라고 불렸던 사람인데 그걸 보고 국정원 사람이 관련됐다는 힌트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외교부 교섭담당관이 참여했을 것이고. 국정원 요원과 담당관은 일하는 방식이 다를 것이라 상상했다. 그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게 된 셈이지."

 
감독 말대로 영화 속 교섭담당관 재호(황정민)는 열정적이지만 외교 원칙을 준수하는 입장이고, 해외를 떠돌던 국정원 요원 대식(현빈)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출할 것을 주장하다가 몇 차례 뒤통수를 맞기도 한다.
 
 영화 <교섭>의 한 장면.

영화 <교섭>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그렇다면 실제 사건 발생 당시 임순례 감독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대부분 사람들처럼 가지 말라는데 왜 가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나 생각했던 것 같다"며 "10년이 지나 제가 그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솔직한 심경을 전했다. 그 정서는 현 시점에도 일부 작용할 수도 있다. 임 감독은 "당시 선교단 사람들의 안전 불감증 지적도 있었는데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논쟁에 이 영화가 가려지는 건 원치 않았다"며 말을 이었다.
 
"최대한 영화에서는 그런 비판이나 소모적 논쟁 과정 없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명확하게 하려 했다. 인질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단 교섭단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들 입장에선 정말 막막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담당자들이 우왕좌왕했다는 말도 있고, 아프가니스탄 공식 언어인 파슈토어를 모르고 협상하러 갔다는 지적도 있었다.
 
탈레반이 외부로 드러난 조직이 아니다 보니 누구와 어떻게 협상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에서 여러 교섭을 많이 하잖나. FTA도 그렇고. 근데 이 교섭은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니 담당자 입장에서 엄청난 고통과 스트레스를 안고 임했다는 생각으로 그 정서를 영화에 반영했다."

 
정리하면 영화는 블록버스터 요소를 가미한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기 보다는 협상에 임한 사람들의 극한의 정서, 나아가 국가의 역할과 존재 의미를 되묻는다는 대목표가 있는 셈이었다. 물론 진지하고 무거운 재호와 대식 캐릭터 사이에 통역 담당 하심이라는 코믹한 캐릭터를 넣는 등 대중적인 상업영화 코드도 심긴 했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건 액션이 아닌 캐릭터의 정서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임순례 감독의 인장
 
"예산이 많이 투입된 만큼 관객 기대를 외면하긴 어렵고, 다만 폭력 장면이나 액션 장면에서 일반 상업영화에서 하듯 무조건 총 쏘고 죽이는 게 아니라 나름의 개연성과 명분이 있었으면 했다. 좀 덜 직접적이더라도 말이다. 전작이 <리틀 포레스트>인데 당시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아수라> <악녀> 등이 그 무렵 개봉했는데 너무 피바다 영화들만 있는 것 같아서 조금이나마 사람들에게 평화로움을 주는 영화를 보이고 싶었다고. 약간 반작용 같은 심리가 있었다.
 
<리틀 포레스트>를 떠올리면 <교섭>이 같은 작품 게 맞나 싶긴 하겠지만, 일단 그건 제 영역을 떠났고 관객분의 판단에 달려있겠다. 전형적 장르 문법을 따르진 않으려 했다. 돌아보면 제가 애매한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대단한 상업력이나 흥행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술가적, 작가주의에 욕심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가 흥행한다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문이 열릴 것고, 그런 도전은 계속 해보고 싶다. 엄청난 대형 영화를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대작 영화를 해본다는 건 감독으로선 좋은 경험이니 말이다. 제 일관성을 지킬 수 있다면 어떤 형태의 작품이든 해보고 싶다."
 

100년이 넘는 한국영화 역사에서 100억 원 대 대형 영화를 경험한 첫 번째 여성 감독이라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해 보인다. 임순례 감독은 "영화 준비할 땐 100억 원대 영화라는 게 가늠이 잘 안 됐는데 개봉 앞두고 손익분기점이 나오니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에서 한국 최초 100억 원 대 예산을 맡은 여성 감독이라고 하도 해주시니 이왕이면 잘 됐으면 좋겠다. 후배 여성 감독 중에 이런 블록버스터를 잘 찍을 수 있는 감독이 널렸으니 좋은 영향을 주면 좋겠다"면서도 "그러려면 일단 손익분기점을 넘겨야한다"고 웃으며 재치 있게 강조했다.
 
"봉준호 감독처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거대 예산을 운용하면서도 자기 개성과 인장을 적절히 반영할 수 있지만 전 그런 능력은 없다. 오히려 예산과 개성이 반비례 되는 것 같다. 예산이 적으면 개성이 강하게 나오고, 많으면 옅어지는(웃음). 결과가 어찌될지 알 순 없지만 제가 제안받고 택하는 작품에서도 제 색깔을 일관성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여부가 하나의 기준이긴 하다. <교섭>이 보통의 장르영화였으면 지금보단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표현됐을 거고, 현빈이 탈레반과 한판 붙었을 것이다(웃음)."
 
이어 임순례 감독은 이번 영화에 흔쾌히 대본도 읽지 않고 합류했다던 황정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배우 황정민을 발굴한 인연이 작용한 셈. 임 감독은 "재호 역할을 다른 배우가 했다면 아마 또다른 영화 나왔을 것이다. 제가 생각한 이상의 역할을 정민씨가 해줬다. 영화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참여해주어 고맙다"고 마음을 전했다.
  
 영화 <교섭>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

영화 <교섭>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 ⓒ 메


 
인터뷰 중 감독에게 국가의 역할에 좀 더 깊은 질문을 던졌다. 앞서 그가 언급했듯 <교섭>은 시스템의 존재 의미를 본질적으로 묻고 있기 때문이었다. 3년 전 완성해놓고 개봉이 밀리긴 했지만, 공교롭게 최근 국내에선 공권력의 부재, 무책임함을 통감하게 하는 사회적 참사가 있었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완성하는 시점에서 그 부분까지 생각하진 못했지만, 최근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니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다. 가장 기본이잖나. 국민의 잘못 여부를 떠나서 외국에서 생명이 풍전등화인 사람들을 책임지는 건 국가의 기본적 의무다. 요즘 들어 더욱 와닿는다. 어떤 정부인지를 떠나 모든 정부의 기본 미션이다. 사실 이건 당연한 얘기잖나. 국민이 위기에 처하거나 생명 위협을 느낄 때 국가가 책임지는 거 말이다. 영화 속 재호와 대식은 그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창작자로서 동시에 기획 제작, 나아가 영화 산업 관련 고민도 품고 있었다. 그간 <글로리데이> 등 좋은 독립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던 임순례 감독은 "여러 아이디어는 있는데 기획 제작이 쉽진 않다. 재능 있는 감독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뭐일지 계속 생각은 많이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금 극장 관람료 1만 5천 원이 비싸다고들 한다. 상업영화는 그렇다 쳐도 독립영화는 그래서 더 접하기 어려워졌다. 한국영화가 여전히 세계무대에서 창의적이고 새롭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힘은 독립영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수준 높은 창작자들이 많다. 독립영화 시장을 어떤 식으로든 보호하지 않으면 상업영화 시장도 위축될 것이다. 과감한 공적 지원이 필요한데 올해 영화진흥위원회 예산이 줄어서 갑갑한 마음이다."
 
감독에겐 여러 화두를 안고 시작한 새해다. 우선 <교섭>이 설연휴 기간 어떤 흐름을 보일까. 독특한 개성과 개연성 있는 캐릭터 설정 또한 이 영화의 묘미인 만큼 충분히 즐기길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교섭 임순례 황정민 현빈 강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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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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