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의 명절 설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느 때보다 이른 설 명절이 반갑기만 하면 좋으련만 생각만 해도 가슴 한 편이 답답해지는 이들도 있죠. 남편 뒷바라지만 강요하는 시어머니, 걱정인지 염장인지 모를 말만 늘어놓는 친척들, 설 연휴에도 일하라는 사장님, 찬바람 불면 생각나는 '추억의 빌런'까지. 그들이 보고 무언가 깨달을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 노래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겨울방학이 따로 없는 직장인들이나 자영업자, 그리고 각종 프리랜서들에게 설 연휴는 추석연휴와 함께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식연휴다. 4일(21일~24일(대체 공휴일 포함)에 달하는 짧지 않은 연휴를 맞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 일상에 쫓겨 그동안 뒤로 미뤄놨던 취미생활을 마음껏 즐기는 사람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해가 밝을 때부터 설 연휴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설 연휴가 그리 반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특히 각 집안의 차례 준비를 도맡아 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경우 명절은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한다. 실제 대한민국에서 명절 차례행사는 길어야 20~30분 만에 끝나지만 그에 비해 너무 긴 준비과정과 인원, 노동력이 투입되는 게 사실이다. 물론 각 집안에서 명절차례과정을 간소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조상님들에 대한 예의'를 이유로 반려되기 일쑤였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집안인 우리 집에서도 코로나19 같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명절마다 차례를 지냈다. 하지만 나는 40년 넘는 세월을 살면서 크게 '명절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없다. 다소 가부장적인 가풍을 가진 우리 집안에서 남자들은 차례준비에서 부담을 느낄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 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를 보면서 어쩌면 나도 우리 가족들 중 누군가에겐 '명절빌런'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 아침, 참다 못한 며느리들의 반란(?)
 
 <큰 엄마의 미친 봉고>는 명절 남녀 간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다룬 독립영화다.

<큰 엄마의 미친 봉고>는 명절 남녀 간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다룬 독립영화다. ⓒ (주)백그림

 
2021년 1월에 개봉한 <큰엄마의 미친봉고>는 2019년 <첫잔처럼>으로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웹무비 감독상을 수상했던 백승환 감독의 3번째 장편영화다(백승환 감독은 같은 해 < D.P >,<약한 영웅>의 신승호와 걸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이 출연한 <더블패티>를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큰엄마의 미친봉고>는 전국적으로 스크린을 67개 밖에 잡지 못했고 전국 3600명의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는 실패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큰엄마의 미친봉고>는 착하고 자상한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둔 은서(김가은 분)가 명절을 맞아 차례를 지내기 위해 시댁식구들이 모인 예비시댁에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명절을 맞은 남자들은 차례 준비를 돕기는커녕 여자들에게 다과상을 차려 오라고 큰 소리를 친다. 이에 참다 못한 큰 엄마 영희(정영주 분)는 동서들과 며느리, 조카 며느리, 예비 조카며느리까지 집안의 여자들을 승합차에 태우고 명절 당일에 화려한(?) 외출을 감행한다. 

여자들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우연히 문을 연 식당에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근육질의 꽃미남들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반면에 배고픔에 굶주리던 집안 남자들은 김치도 없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차례를 지내는 명절날, 큰 집에 김치가 없을 리 만무했지만 <큰엄마의 미친봉고>에서는 남자들이 '무능한 빌런'으로 나오기 때문에 아무도 냉장고 문을 열지 않는다. 그리고 큰 엄마는 남편의 카드로 쇼핑을 하면서 기분을 낸다.

<큰엄마의 미친봉고>에 출연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이름을 잃고 큰 엄마, 작은 엄마, 몇 번째 며느리, 누구네 딸내미 등으로 불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남편의 구박만 받던 첫째 며느리는 조카 인생의 롤 모델이었던 전설의 공대생이었고 큰 어머니 영희와 예비 막내 며느리 은서는 대학밴드 동아리의 24학번 선후배 사이였다. 서로 이름을 몰랐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인연들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이름을 되찾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 식구들은 다가온 또 다른 명절에 남녀 모두 함께 차례상을 차리면서 행복하게 영화가 마무리된다. 물론 영화적 재미를 위해 과장된 부분이 적지 않았고 흥행성적이 말해주듯 상업적으로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큰엄마의 미친봉고>는 명절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영화였는데 난 이 영화를 마냥 유쾌하게 즐길 수는 없었다. 

영화 속 '명절빌런', 혹시 내가 아니었을까
 
 날씨가 춥지 않은 추석에는 아버지 고향 근처 선산에 있는 조상님들 묘소로 직접 성묘를 간다.

날씨가 춥지 않은 추석에는 아버지 고향 근처 선산에 있는 조상님들 묘소로 직접 성묘를 간다. ⓒ 양형석

 
우리 아버지는 8남매 중 넷째다. 첫째 큰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한 충북 영동군에 계셨는데 명절의 각종 차례는 큰 집에서 도맡아 했다. 어린 시절 명절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차를 타고 충청도까지 내려가 어른들 따라 차례상 앞에서 절을 하고 어른들과 식사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던 게 전부다. 그나마도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들의 사정으로 인해 매년 명절마다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인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골에 사시던 두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8남매 중 둘째였던 고모마저 고모부의 은퇴와 함께 제주도로 귀촌을 하시면서 우리 아버지께서 명절에 차례를 주관해야 하는 큰 형이 됐다. 평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허투루 하지 않는 꼼꼼한 성격의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지내는 명절을 맞아 차례용품들을 새로 구입하면서 차례준비에 박차를 가하셨다. 몸이 불편했던 나는 어린 시절 서예학원을 다녔다는 이유로 '지방쓰기 미션'이 주어졌다.

한편 태어날 때부터 교회에 다니셨고 지금도 교회 권사이신 어머니는 조상을 모시는 집안의 남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매년 명절차례준비에 동참하셔야 했다. 어머니는 차례에 필요한 음식들을 장만하면서 작은 어머니들과 형수님에게 음식마련을 분배하셨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치러진 차례는 몇 년 동안 친척들의 우수한 참석률 속에서 '성황리에' 진행됐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큰 문제 없이 진행되던 명절행사가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안의 명절 차례행사에는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차례를 따로 드리는 큰집 사촌들을 제외하더라도 친척들이 최소 10명에서 최대 15명 이상 방문해 집안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매년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코로나19 거리두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2020년 설날에는 10명도 채 모이지 않았다. 조카 편으로 음식만 보낸 집도 있었고 아예 연락이 닿지 않은 집도 있었다.

사실 나는 명절에 차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명절마다 지방 쓰는 일을 하고 있지만 연습 시간을 포함해 길어야 20분이면 되는 지방쓰기를 '노동'이라 부르기는 민망하다. 심지어 나는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차례를 지낼 때도 절 대신 묵념으로 대신한다. 사실 나는 이런 것들이 한 번도 '민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어쩌면 차례준비로 고생하는 다른 식구들의 눈에는 하는 일이 거의 없는 내가 '명절 빌런'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친척들에게 연락하기 더 없이 좋은 시기

어린 시절 돌아가신 큰 아버지는 나에게 '우리 눈엔 안보이지만 명절에는 조상님들이 이승에 내려와 후손들이 차린 차례음식을 드신단다'고 설명을 해주셨다. 하지만 평소에 바빠서 모이기 힘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요즘 시대의 명절이 갖는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설날에 모이지 못하면 추석에 모이면 되고 추석이 안되면 다음 해 설날도 있다지만 그 해의 설날과 추석은 매년 한 번 뿐이다.

실제로 요즘엔 명절이나 경조사가 아니면 친척들이 모일 기회가 크게 줄어든 게 사실이다. 나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친척 어른이나 사촌들에게 연락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내 부모의 형제와 결혼을 하고 또 그들이 자녀를 낳아 나와 사촌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우연과 기적이 겹쳐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기적과도 같은 인연으로 만들어진 '가족'이라는 사이를 그동안 너무 가볍게 여겼던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물론 친척들을 친한 친구나 지인, 직장동료들처럼 자주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별다른 일이 없어도 친척들에게 연락하는 건 크게 힘든 일이 아니다. 특히 명절 만큼 친척들에게 연락하기 좋은 시즌은 없다. 서로 연을 끊고 사는 사이가 아니라면 "설날이라서 전화했어(요)"라는 연락에 "용건 없으면 이만 끊어(요)"라고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릴 가족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 설엔 평소 조용하던 내 휴대전화가 조금 바빠질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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