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최근 급격하게 추워진 날씨 탓인지 거리는 한적했고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눈이 녹은 자리엔 빙판길이 생겼다. 누군가 한번쯤 눈을 쓸어낸 것 같은 자국이 보였으나 눈은 기어코 그 자리를 다시 뒤덮었다. 길바닥을 덮은 회색빛 얼음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미끄러질까 조심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중, 처음부터 눈을 맞지 않은 것처럼 깨끗한 거리가 눈에 띄었다.
추운 날씨에도 말갛게 피어 있는 국화와 이젠 너무 먼 곳으로 떠난 희생자들의 사진. '그곳에서는 행복했으면 한다'는 염원이 빼곡히 적힌 접착식 메모지와 그들에게 바치는 음식들은 눈을 맞은 흔적 없이 깨끗했다.
추운 날씨에도 조그마한 촛불들이 빛을 발해 안온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10.29 이태원 압사 참사가 일어난 장소부터 녹사평역 분향소로 가는 길 또한 애초에 눈을 맞은 적이 없는 것처럼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이곳은 거친 눈보라를 피해갈 수 있었던 걸까?
시민들의 소리 없는 움직임
경사진 참사 현장의 아래 부근, 하얀색 비닐을 씌운 천막 법당이 보였다. 제사상과 오색 매트, 뚜껑이 열려있는 쌍화탕이 즐비한 것을 보니 누군가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때 회색 승복을 입고 커다란 나무지팡이를 짚은 스님이 눈에 띄었다. 스님은 자신을 불일 스님이라고 소개하며 "10.29 참사 이후부터 아침 6시에 나와 참사현장을 청소하고 11시까지 기도를 해왔다"고 말했다.
부처님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서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추운 날씨에 매일 나와 기도하고 청소하는 일이 고되지 않냐는 물음에 그는 담담히 "(망자와 유족들이) 잘 치유가 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기도해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했다.
도보로 10분 정도 걷자 녹사평역 앞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가 보였다. 시민들은 영정사진이 걸린 분향소 앞에서 헌화 후 향을 피웠다. 합동분향소 앞에서 시민들을 안내하고 꽃을 나누어주던 10.29 이태원 참사 청년추모회 A씨는 "참사 발생 직후부터 도와주시는 분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그의 손은 빨갛게 얼어 붙어있었다. 추모를 돕는 일이 고되지 않냐는 물음에 그는 "유가족분들이 힘든 것에 비하면 제가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했다.
참사 장소에서 애쓰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10.29 참사가 일어났던 골목 그리고 녹사평역으로 가는 길에는 형광 조끼를 입은 경찰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시민들이 있었다.
막연히 정부 차원에서 그들을 위한 분향소를 운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모에만 관심을 가졌지 추모하는 공간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는 궁금해 하지 않았다. 추모를 계속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추모가 계속될 수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고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