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첫번째 아이> 포스터

영화 <첫번째 아이> 포스터 ⓒ ㈜더쿱디스트리뷰션

 
한국 사회에서 일과 육아의 양립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모성애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던 과거에 비해선 꽤 개선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그 최종적인 책임은 아이를 낳은 여성에게 떠맡겨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아이는 엄마 품에서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한다!'는 속내를 품고 분위기를 살피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적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나 자신 또한 그런 생각을 부지불식간에 품고 있었다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허정재 감독은 그의 이름을 알린 단편 <밝은 미래>에서 현재 우리 사회 내에서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대의명분과는 판이하게 다른 동정 없는 냉혹한 실상을 실감나게 재현해냄은 물론, 그 시스템 질서 내에서 개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타인을 배제해야 하는 주인공의 고뇌를 실감나게 형상화한 바 있다. 그랬던 감독은 자신의 장편 데뷔작인 <첫번째 아이>에서도 그런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모호한 긴장관계에 천착하는 이야기를 펼친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주인공이 직면하는 상황
 
정아는 패션관련 규모 있는 회사에서 능력을 제법 인정받아온 커리어우먼이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임신과 출산으로 1년간 육아휴직을 가졌다가 이제 막 복직한 상황. 오랜만에 직장에 복귀한 정아는 의욕이 넘친다. 지난 휴직 기간 정지된 상태였던 것을 얼른 만회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다. 마침 정아의 팀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중이라 일복이 넘쳐흐르는 중이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정아는 야근을 하기 힘들다. 근무 중에 14개월 막 된 서윤을 맡길 곳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는 정아의 어머니가 서윤을 보살펴줬지만 영화 도입부에서 시장 통을 다니다 갑자기 쓰러진 후 줄곧 병원 신세다. 급히 위층 이웃에게 임시방편으로 서윤을 며칠간 맡겼지만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다.
 
정아는 보모를 들이자고 남편과 의논하는데 남편인 우석은 직장 다녀봐야 버는 돈 보모에게 나갈 바엔 우리 귀한 아이를 엄마가 돌보는 게 맞지 않겠냐며 은근히 정아의 퇴사를 권한다. 은근슬쩍 우석은 언젠가부터 정아를 '서윤엄마'라 부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정아는 직업소개소에서 보모를 구해 면접을 본다. 한국인을 원했는데 막상 도착한 이는 조선족 출신 중년여성 화자다. 한국인 다수의 선입견에 의거해 정아는 화자를 일단 돌려보내지만 꼼꼼하고 아이를 좋아하는 그녀를 생각 끝에 받아들인다. 이제 문제도 일단 막았으니 일에 집중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정아가 휴직하는 동안 업무공백을 메우기 위해 임시 계약직으로 팀에 들어온 지현에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복직을 했으니 대타였던 지현은 이제 곧 계약종료가 임박한 상황이다. 지현은 자기 또래에선 쉽지 않은 겨우 얻은 번듯한 자리에서 물러나길 원치 않는다. 하지만 정아는 그런 지현이 안쓰러우면서도 본인의 자리를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점점 의도치 않게 둘 사이에는 불안한 긴장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물론 둘 다 바라던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믿었던 보모 화자에게도 서서히 의혹이 생긴다. 그로 인해 남편과의 갈등도 고조되어간다. 우석은 이럴 바엔 아이를 잘 돌보는 게 최우선이 되어야하지 않느냐며 정아를 조여 대기 시작하고 그녀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과연 정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너무나 평범한 우리들 각자의 불행(들)
 
 영화 <첫번째 아이> 스틸 이미지

영화 <첫번째 아이> 스틸 이미지 ⓒ ㈜더쿱디스트리뷰션

 
감독은 누가 봐도 극단적인 설정(빚을 떠안는다거나 사고를 일으켜 보상해야 한다거나 보이스피싱으로 사기를 당한다거나 등)을 전제로 깔고 극중 상황에 등장인물들을 끼워 넣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그런 안일한 선택 대신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불운을 모사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런 부류의 사건들은 내가 아닌 타인들에게 닥칠 때는 우리가 무심코 쉬 지나치거나 방관하곤 하는 상황들에 가깝다. 그렇게 재수 없으면 터질법한 수위의 상황을 배치하는 대신에 이를 조밀하게 해부하는 방식을 택한다.
 
주인공인 정아는 겉으론 삶에 별 어려움이 없어 뵈는 캐릭터다. 대기업 정규직인데 남편 역시 자신의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중이다. 거기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아이도 건강하게 자라는 중이다. 부부 사이에 특별한 가정불화나 경제적 어려움도 없다. 제법 살만한 아파트도 임대가 아닌 자기소유로 보인다. 거기에 극중에선 시댁과의 고부갈등이나 친정 관련 사건사고도 드러나지 않는다. '헬 조선' 20-30세대 중에선 은수저쯤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겪는 실존적인 위협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걸 영화는 거듭 닥치는 위기와 시련으로 구현해낸다.
 
주인공이 대기업 정규직이기 때문에 남들은 감히 쓰지 못하는 육아휴직도 눈치 안보고 찾아서 쓰는 축복받은 존재라는 냉소는 굳이 <첫번째 아이>를 본 소감에 끼워둘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런 상대적으로 괜찮은 형편에 속한 존재라도 운명의 장난 마냥 한번 일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겉잡을 겨를도 없이 수습이 불가능한 나락으로 추락하게 되는 위태로움이 영화 전체에 감도는 것에 주목해야 할 법하다. 한국사회에서 최고상위 기득권 계층이 아니라면 이제 그런 불안정성은 상시적이 된 상태다.
 
(영화 도입부에서 보여준 것처럼) 친정엄마가 쓰러진다. ⇒ (대인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덕분에) 일단 친절한 위층 이웃에게 의지한다. ⇒ 급한 불 껐으니 신속하게 어린이집 이용을 신청한다. ⇒ 하지만 대기자가 잔뜩 밀려 있는 상태다. ⇒ 보모를 구한다. ⇒ 구하긴 했는데 믿을 수 없다. 정아에게 닥치는 육아의 위기 패턴은 대충 이런 수순으로 진행된다. 직장에 다니는 여성이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선택지의 정석이 차례로 난관에 봉착하고 마는 전형이다.
 
그런 고난을 감수하면서도 포기를 할 수 없었던 정아의 직장생활도 순조로움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지는 중이다. 정아는 자기 일도 척척 잘 해내 인정받고, 곁들여 자기 대타로 들어온 지현도 돌봐주고 싶다. 하지만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던 열혈 커리어우먼에서 육아휴직 복귀 이후에는 야근 대신 칼 퇴근과 반차를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현재의 정아는 눈칫밥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상태에서 애초에 1년 계약직 알바 용도로 채용된 지현을 품는다는 건 정아의 능력과 입지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송 팀장은 정아를 타박하면서도 정아는 지현과 다른 존재, 사실상 상위계급으로 선택받은 이라며 충고한다. 지금 물러나 앉으면 다시 현재의 위치로 돌아오긴 어렵다는 걸 직시하라고 말한다. 이제 그녀 앞에는 회사형 인간이냐 전업주부냐 양자택일해야 할 순간이 강제적으로 다가온다.
 
상황에 지치고 실망스런 정아는 이국땅에서 자신의 아이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된 노동과 인격적인 치욕을 기꺼이 감내하는 화자를 보면서 어떤 감흥을 느낀다. 한편 자신은 이미 놓쳐버린 기회, 즉 비혼주의를 고수하며 일과 자유를 쟁취하고픈 '야망캐' 지현에겐 묘한 질투와 적대감, 그 가운데 아쉬움이 복합된 감정을 체감한다. 과연 지현과 화자 사이에서 정아는 어떤 결단을 하게 될 것인가?
 
속 시원한 결말과는 거리가 멀지만 지독히 현실적인 이야기
 
 영화 <첫번째 아이> 스틸 이미지

영화 <첫번째 아이> 스틸 이미지 ⓒ ㈜더쿱디스트리뷰션

 
영화 속 주인공 정아의 캐릭터는 청순과 단아함의 상징으로 통용되던 배우 박하선이 실제 본인의 결혼과 출산 이후 선보이고 있는 다변화된 연기의 연장선에 서 있다. 중산층 직장여성이라도 여전히 극복하기 쉽지 않은 난제인 일과 육아의 양립을 끔찍할 만큼 현실적으로 구현해낸다. 여기에 덧붙여 정아가 자기 주변의 여성들과 형성하는 관계를 통해 보다 폭넓은 사회적 담론을 제시하려는 욕망이 감독에게서 엿보인다.
 
주인공 정아의 좌우에 자리하는 것 같은 두 캐릭터, 화자와 지현은 각기 다른 연령대와 조건의 여성 계층을 대표하는 존재들이다. 여기에다 정아에게 과거와 현재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떠안는 돌봄과 육아 문제에 대해 성찰하게 돕는 위층 이웃과, (병상에 눕는 바람에 주인공의 위기를 촉발시키는) 정아의 엄마 캐릭터도 고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영화는 임신과 출산이 한국사회 여성에게 갖는 의미를 개별 상황을 초월하는 화두로 형상화해내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주요 여성 캐릭터들은 각자에게 부여된 상징과 역할을 떠맡아 제 몫을 톡톡히 해낸다. 반면에 <첫번째 아이>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 대부분은 여전히 혁파되고 있지 못한 보수적 가부장제 치하에서 이를 지탱시키는 존재로 정형화되어 있는 편이다. 정아에게 남편 우석과 직속상사 송 팀장은 '벽'과 같은 대상이다. 이들은 과거에 비해 본색을 숨긴 채 은폐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을 표상한다. 우석은 정아가 '현모양처'로 행복하게 살기를 종용한다. 일은 자신이 하고 돈도 자기가 벌어 먹여 살릴 수 있으니 정아는 딸 서윤의 양육에 전념하라는 것이다. 물론 때가 되면 둘째도 요구할 분위기다.

정아를 인정해주는 것 같은 송팀장은 철저하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치기하는 건 물론 자신의 자녀들 양육도 돈만 벌어주면 책임을 다 한다는 사고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아마 우석의 미래는 송팀장처럼 변해갈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아쉽게도 영화 속 남성들 중 특별히 개성을 드러내는 이들보단 거의 전적으로 기능적 상징화된 캐릭터 특성이 두드러진다.
 
단편작업에서부터 이어져온 감독의 주제의식은 여전하지만 그 씨줄날줄의 밀도는 단편에서 선보인 밀도에 비교해보면 다소 조임이 헐겁게 느껴진다. 정아가 주위 여성들과 맺는 관계는 풍성해보이지만 그중 일부 관계의 연결고리는 어정쩡하거나 개연성 측면에서 약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 아쉬움과 함께 주인공이 선택하는 결말에 불호를 표시할 의견도 적지 않을 테다. 하지만, 그 결론 부분에 대해선 감독 고유의 문제의식이 견지해온 포커스의 연장선이라 판단해본다. 모든 여성 관련 서사가 승리와 극복으로 귀결될 필요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작품정보>

첫번째 아이 FIRST CHILD
2021|한국|드라마
2022.11.10. 개봉|93분|12세 관람가
감독 허정재
주연 박하선(정아 역), 오동민(우석 역), 박수인(서윤 역)
출연 오민애(화자 역), 안민영(3층댁 역), 임형국(송팀장 역), 공성하(지현 역),
서석규(연홍 역), 전국향(정아 어머니 역), 고관재(종훈 역)
제작 영화사 화원
배급 ㈜더쿱디스트리뷰션
첫번째 아이 허정재 감독 박하선 오동민 밝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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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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