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 TVN

 
연기로는 두말할 필요 없는 배우 김혜수가 <슈룹>에서도 유감없는 아우라를 뿜고 있다. 1화 시작부터 주색에 빠진 아들을 찾아 나서며, "이 새끼 어딨어"라는 걸쭉한 입담으로(중전이라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체통을 집어던진 욕설과 협박만 본다면 저잣거리에서 싸움 좀 하는 아낙네로 오인할 정도다) 시청자의 관심을 잡아챈다.
 
김혜수를 필두로 도열한 후궁들은 저마다 가득 찬 야심으로 눈이 번들번들하다. 게다 후궁들의 '워너비'이자 이들을 쥐락펴락하는 대비(김해숙)는 어떠한가. 서자인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힌 그야말로 무서운 여인이다. 이쯤 되고 보면 이 드라마가 펼칠 서사가 궁중 여인들의 권력 다툼일 것이 자명해진다. 특히 만나기만 하면 두 눈에서 불을 뿜는 대비와 중전의 무기만 안 들었지 유혈 낭자한 팽팽한 권력 쟁탈전은 드라마 초반부터 긴장을 고조시키며 긴박감 있게 나아간다.
 
보통 사극에 등장하는 궁궐의 여인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만 존재한다. 살벌한 궁 안에서 저렇게 쑥맥으로 순하기만 해 살아남겠나 싶을 정도로 선량하기만 한 여인, 아니면 가공할 권모술수를 발휘하며 권력을 위해서라면 인면수심 정도는 껌인 사악하기 짝이 없는 여인. 이렇게 극단의 두 유형은 궁의 여인은 천사 아니면 악마라는 이분법을 재생산해왔다. 아무리 구중궁궐이라도 사람이 사는 곳일진대, 궁의 여인이 어찌 두 종류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궁에서 살아남는 법
 
궁의 여인들은 분주하다. 세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지만 아직 용상에 오른 것은 아니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만들기 위해 던지는 대비의 미끼는 너무나 유혹적이다. 말만 잘 들으면 네 아들을 왕을 시켜줄 수도 있다는 대비의 희망 고문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욕망이 들끓는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들도 대비가 되지 말란 법 없다는 야망을 살아 있는 롤 모델이 이미 구현해놓지 않았는가. 보이면 현실이 된다고 믿는다.
 
궁중의 여인들을 묘사해온 관습대로 보자면 이 여인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왕위를 넘보는 역적들이다. 하지만 대비라는 산증인이 바로 "역모가 역사가 되기도 한다"는 잠언을 몸소 현실로 실현했기에 이들의 야망은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이 아니다. 이들이 아들에게 쏟는 교육열은 현재의 'SKY 캐슬'을 방불케할 정도로 극성인데, 모던하게 가는 사극이라지만 어쩐지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들은 지금 아들 왕 만들기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아들이 왕이 되고 안 되고에 이들의 생존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 TVN

 
대비는 아들이 왕이 되는 바람에 귀인의 신분으로 대비 자리에 앉았다. 중전이 아니라면 아들이 왕이 된다고 대비가 되지는 않을 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바로 이 비밀 아닌 비밀이 후궁들이 대비를 추앙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이유다. 대비는 자신의 아들만 왕으로 세운 게 아니라, 세자였던 왕자를 없애고 중전을 폐서인했던 장본인인 것이다. 이 왕실 잔혹사는 궁의 여인들의 내면을 공포와 경외로 길들이기에 적합했다. 아들을 왕으로 세우지 못한다면 그 운명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시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예시의 강력한 자장 안에 중전 역시 벗어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대비의 계략을 모르지 않는 중전은 초조하다. 세자의 병증이 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자가 왕이 되지 못한다면 세자는 물론 나머지 아들들의 명운도 어둡다. 세자를 보좌하는 배동 선발로 궁이 들썩이는 가운데, 중전은 병약한 세자를 돌보고 제멋대로인 왕자들을 단도리 하느라 몸이 열이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 와중에 중전은 뜻밖의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넷째 아들인 계성대군(유선호)이 궁인들의 눈을 피해 스며든 폐전각에서 여장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광경이다. 이 사실이 발각된다면, 꼬투리만 잡히면 잡아먹으려 입을 벌리고 있는 야수의 먹잇감이 되고 말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극에 등장한 성소수자의 존재는 신선하고 반갑다. 큰 인기를 끌었던 TVN 드라마 <철인왕후>의 중전도 알고 보면 현세의 남자 몸이 트랜스된 성소수자이지 않았는가. 물론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고, 타임슬립으로 벌어진 트랜스가 어서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라지만, 그의 트랜스된 몸은 뜻밖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트랜스된 중전에게 매력을 느끼는 왕의 애정과 남자인 영혼으로 남자인 왕에게 끌리는 중전의 마음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계성대군은 트랜스된 몸이 아니지만 사극에 등장한 성소수자의 존재는 매우 의미 있다. 극중 그의 성 정체성은 불분명하나 그는 여자로 꾸민 자신을 사랑한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는 소중한 밀실 아지트를 불태운 엄마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아들을 나무라지 않고 "니가 어떤 모습이든 너는 내 자식이야"라며 딸에게 물려주려던 비녀를 건네는 엄마의 모습은 함의하는 바가 크다.
 
성소수자가 성 정체성으로 감당해야 하는 고통 중 가장 큰 부분은 타인에게서 받는 혐오보다 가족 내에서 승인되거나 수용되지 못해 겪는 고통의 비중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성소수자가 겪는 곤경을 생각할 때, 옛날 엄마가 성소수자 아들에게 보여준 포용과 인정은 혐오의 세상을 견뎌내야 하는 지금의 성소수자들에게 시대를 횡단한 위로와 지지가 되어 줄 것이다. 기존의 사극에서 보이지조차 않던 성소수자를 드러낸 젠더 감수성이 돋보이는 연출이다.
 
 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 ⓒ TVN

 
또한 서촌에 퍼진 전염병을 다루는 드라마의 면모도 코로나19라는 신종 전염병을 겪은 우리에게 무심히 넘길 수 없는 지점을 제공한다. 전염병이 돌자 화근을 없애겠다고 방화를 저지르는 극악한 일부 백성과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병든 백성이 죽거나 말거나 감염 지역을 철통 봉쇄해야 한다고 강경히 대처하는 관리의 태도는, 전염병조차 전혀 평등하지 않게 강자의 논리로 관철되는 의료 불평등과 부정의를 드러낸다.

자신도 감염될 것을 알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으며 병자를 돌보는 의료인들의 모습은 코로나19를 떠받친 의료인들의 헌신과 고관대작의 겁박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그냥 죽게 두는 것은 정치의 책임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미래의 지도자 성남대군(문상민)의 저항은 질병 재난을 겪은 현실을 강하게 은유한다.
 
다시 궁궐의 여인들로 돌아와서, 중전과 대비를 중심으로 여인들의 암투는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세자의 병증이 위급해지면서 세자의 자리를 노리는 야망도 본색을 드러낼 테니 말이다. 여자에겐 왕위도 벼슬도 주어지지 않던 조선의 여인들은 그들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대리자를 세워야 했다. 때로 주렴을 드리우고 때로 베갯머리 송사로 권력을 행사해야 했을 것이다. 이는 여인들을 권력에서 격리시킨 시대의 한계이고 부정의이지 여인들 자체의 악덕이 아니다. 모던 사극을 지향하는 <슈룹>이 이들 여인들의 시대적 한계를 어떤 파격으로 그리며 넘어설지 자못 기대가 크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슈룹> 김혜수 궁궐 잔혹사 왕권다툼 여성 서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