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세계 다크투어>의 한 장면.

JTBC <세계 다크투어>의 한 장면. ⓒ JTBC

 
존 레논과 마이클 잭슨, 현대 대중음악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거장들이자, 갑작스럽고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비운의 뮤지션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0월 19일 방송된 JTBC <세계 다크투어>에서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글로벌 레전드 뮤지션 존 레논과 마이클 잭슨의 삶과 죽음에 얽힌 의혹을 조명했다. 국제정치와 미국사 전문가인 김지윤 MIT 메사추세츠 공대 정치학 박사가 이날의 다크 가이드로 나섰다.
 
전설의 록밴드 비틀즈는 현대 대중음악의 상징으로 불리운다. 비틀즈의 리더인 존 레논은 누구보다 평화와 뉴욕을 사랑했던 인물로 '이매진' 등 여러 주옥같은 명곡들을 남겼다. 레논은 1957년 폴 매카트니와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으로 1960년에는 비틀즈 완전체를 탄생시키며 활동을 시작했다.
 
한 세대 이전인 1950년대 톱스타인 엘비스 프레슬리나 기존의 록밴드들이 '마초적이고 강인한 남자'의 콘셉트를 강조했다면, 비틀즈는 정장을 차려입고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꽃미남 모범생의 이미지로 수많은 소녀팬들을 양산했다.
 
비틀즈는 본고장인 영국을 넘어서 대중문화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미국까지 진출하여 큰 성공을 거뒀다. 비틀즈는 'I want to hold your hand'로 1964년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1위에 등극했다. 비틀즈의 첫 미국공연에서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무대에 난입하거나 실신하는 열성팬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비틀즈를 중심으로 영국 록 음악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시기를 가리켜 '브리티쉬 인베이전(영국 침공)'이라고 부른다.
 
매니저의 사망과 멤버들의 불화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비틀즈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비틀즈의 정신적 지주이자 댄디한 이미지 메이킹을 확립하며 '제 5의 비틀즈 멤버'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매니저 브라이언 앱스타인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부재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갈등을 그나마 중재할 수 있있던 인물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소박하게 시작했던 비틀즈는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성장하면서 각자의 정체성을 찾아 멤버들간의 갈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레논은 본래 대학동기였던 신시아와 결혼하여 아들 줄리안까지 낳았으나 미국 활동을 시작하면서 만난 일본인 출신의 행위예술가 오노 요코와 사랑에 빠져 각자의 가정을 버리고 재혼했다. 레논이 지금까지도 가장 비판을 받는 부분 중 하나다. 불륜 커플이기는 했지만 요코는 이후 레논의 인생에서 엄청난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인물로 빠지지 않는다.
 
한편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받은 줄리안에게 친아버지보다 더 사랑을 준 것이 바로 폴 매카트니였다. 그가 줄리안을 위하여 선물한 곡이 바로 그 유명한 'Hey jude'다. 달콤한 러브송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 담긴 사연과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를 알고 나면 가사가 더 뭉클하게 다가온다. 'Hey jude'는 빌보드에서 무려 9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지금도 비틀즈의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힌다.
 
비틀즈는 1970년을 끝으로 해체했다. 한 해 전에 발표한 11번째 마지막 앨범 < Abbey road >는 멤버들이 일렬로 나란히 횡단보도를 걸어가는 커버 사진으로도 유명하다. 스튜디오 앞 횡단보도에서 10분 만에 촬영한 것이 전설적인 앨범 커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비틀즈 해체 이후 레논은 요코를 따라 미국에 정착하며 음악적 색깔도 많이 달라졌다. 레논은 비틀즈 해체에 대한 책임론을 둘러싸고 대중의 비난을 들으며 한동안 슬럼프에 시달렸고 5년간의 공백기를 거쳤다. 하지만 레논은 이 기간동안 새로운 가정에 충실하며 나름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11월 레논은 오랜 공백을 깨고 앨범 발매와 활동재개를 선언한다. 전설의 귀환에 언론과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그해 12월 8일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레논이 자택에서 의문의 총격을 당하며 사망한 것이었다.
 
 JTBC <세계 다크투어>의 한 장면.

JTBC <세계 다크투어>의 한 장면. ⓒ JTBC

 
아내 요코도 바로 앞에서 남편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전 세계 팬들도 일제히 경악과 슬픔에 빠졌다. 사망 6일 후 12월 14일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레논의 추모식이 열렸고 10만 명에 이르는 팬들이 운집하며 '이매진'을 합창하며 레논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애도했다.
 
레논은 사망 당일날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아내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사망 당일날 잡지 <롤링스톤>지와의 촬영에서 전라의 레논이 유코에게 키스하는 강렬한 장면을 담은 사진은 훗날인 2005년 미국 잡지편집회에서 꼽은 '지난 40년 최고의 잡지표지'로 꼽힌 바 있다. 자연스럽지만 파격적이었던 두 부부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컷이기도 했다.
 
레논은 같은날 오후 1시에 라디오 인터뷰에서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나는 내가 죽어 묻힐 때까지 내 작업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레논의 이 인터뷰는 그가 공식석상에서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됐다.
 
오후 4시 반에 레논 부부는 녹음실로 이동하다가 한 팬의 사인요청에 응했고 그 장면을 포착한 한 사진작가의 사진은 레논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때 레논에게 사인요청을 한 남자가 바로 몇 시간 뒤 레논을 살해한 범인이었다는 것이다.
 
채프먼은 왜 존 레논을 죽였냐는 질문에는 "그를 죽이면 내가 유명해질 거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채프먼은 레논을 살해한 후 도망가지 않고 현장에 남아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책을 읽는 기행을 보였다.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젊은 세대의 저항과 허무주의를 다룬 <호밀밭의 파수꾼>에 심취했던 채프먼은, 세상은 전부 가짜이고 존 레논도 위선자라는 몽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살인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현재까지 복역중이다.
 
마이클 잭슨, 불행의 그림자
 
 JTBC <세계 다크투어>의 한 장면.

JTBC <세계 다크투어>의 한 장면. ⓒ JTBC

 
레논 사후인 1980년대, 또 한 명의 천재 뮤지션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다. 1969년 11살의 나이에 형제들과 함께 '잭슨 파이브'의 리드싱어로 활동을 시작한 잭슨은 솔로로 전향한 후 1982년 '스릴러', '빌리 진' 등의 연이은 대히트에 힘입어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
 
잭슨은 '듣는 음악'과 '보는 음악'을 넘나드는 대중음악 퍼포먼스의 개념을 바꾼 기념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무대에서 토스트처럼 튀어올라 등장하는 토스트 기법, 문워킹-무중력 댄스-우주인 퍼포먼스 등 안무, 음악, 스타일링 전면에 걸쳐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마이클 잭슨의 퍼포먼스는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잭슨이 가장 애착을 드러낸 곡은 바로 'Heal the world'였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세계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가사에는, 어릴 때부터 생계와 일에 쫓겨 유년기를 상실해야 했던 잭슨의 개인적 아픔이 반영된 노래이기도 하다. 뮤직비디오에서는 아예 잭슨이 등장하지 않고 전쟁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며 깊은 울림을 주기도 했다.
 
잭슨은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사람들은 내가 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지 궁금해한다. 왜냐하면 저는 아이들을 통해 제가 한 번도 갖지 못 했던 것 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잭슨은 자선단체 설립과 기부를 통하여 평생에 걸쳐 아프고 가난한 아이들을 보살피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았다. 또한 자신의 자택에 '네버랜드'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놀이공원을 건설하여 아이들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쌓았다. 전 세계에 중계되는 미식축구 결승전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는 전 세계 다양한 국적과 인종을 아우르는 수백명의 아이들과 'Heal the world'를 열창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며 잭슨에게도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잭슨은 나이가 들면서 지속적인 외모변화로 성형중독 의혹에 시달렸다. 흑인인 잭슨이 백인을 동경하여 하얗게 화장하거나 시술을 받았다는 루머가 나오기도 했다. 사실 잭슨은 유전적으로 피부가 탈색되는 백반증을 앓고 있었고, 무대 위 낙상사고 때문에 코수술을 받은 후유증으로 호흡에 어려움을 겪으며 여러 차례 재수술을 해야만했다.
 
잭슨은 1984년 음료광고 촬영 중 잘못 터진 폭죽으로 머리에 불이 붙는 화상사고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잭슨은 두피에 큰 화상을 입었다. 치료 과정에서 극심한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마약성 진통제를 접하게 되면서 훗날 그의 인생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오게 된다.
 
잭슨은 1993년 아동성추문 사건에 휩싸이며 이미지가 추락한다. 잭슨은 두 번에 걸친 재판 끝에 무죄를 선고받기는 했지만 자극적인 논란 속에 이미지 하락은 피할 수 없었고, 본인도 정신적으로 큰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대중의 곁에서 한동안 멀어지는 듯했다.
 
2009년 잭슨은 오랜 공백기를 깨고 복귀를 선언한다. 의욕적으로 대중앞에 모습을 드러낸 잭슨은 50회의 월드투어를 약속했고, 황제의 컴백에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러나 잭슨은 그해 6월 25일, 돌연 세상을 떠나며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사인은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공교롭게도 존 레논과 마찬가지로 마이클 역시 오랜 공백기를 거쳐 컴백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 잭슨의 마지막 말
 
 JTBC <세계 다크투어>의 한 장면.

JTBC <세계 다크투어>의 한 장면. ⓒ JTBC

 
생전 녹화된 영상에 따르면 잭슨은 사망 하루 전까지도 월드 투어를 준비하며 열정적으로 리허설에 임했다. 하지만 잭슨은 적지 않은 나이에 공연 준비로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면서도 불면증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잭슨은 생전 마지막 공연 연습을 마치고 촬영 중인 사진작가에게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에요"라고 이야기한 것이 마지막 유언이 됐다.
 
잭슨의 죽음은 수많은 의혹을 불러왔다. 주치의는 잭슨이 극심한 불면증 때문에 오전 10시 40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프로포폴 추가 투약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잭슨이 심정지 상태에 빠진 시간부터 주치의가 911에 연락한 시간은 무려 1시간 반이 지난 후였다.

주치의는 "집에 유선전화가 없었고 정확한 주소를 몰랐다"고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내놓았다. 또한 주치의는 심장전문의임에도 기초적인 심폐소생술(CPR) 응급조치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더욱 의혹을 샀다.

잭슨의 비극적인 죽음은 화려한 슈퍼스타의 삶 이면에 가려진 어둡고 황폐했던 그림자를 보여주며 안타까움을 남겼다. 잭슨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포리스트 론 묘지에 안치되어 영면에 들었다. 잭슨이 거주했던 베벌리힐스의 대저택과 생전 그가 즐겨찾았다는 단골 핫도그가게, 잭슨을 추모했던 영결식이 열렸던 장소 등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잭슨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레논이 요코와의 재혼 후 새 삶을 찾으며 함께하는 행복을 누렸던 것과 달리, 잭슨은 컴백 직전까지 오랫동안 대중과 단절되고 더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다는 차이가 있다. 1990년대에 접어들여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여 대중들이 유명인의 인기만큼이나 자극적인 가십과 루머 등을 소비하는 속도도 더 빨라졌다는 것도 잭슨에게는 불행이었다.

한편으로 레논과 잭슨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대중들은 다양한 음모론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CIA와 FBI가 개입했다는 의혹 등이 대표적이다.
 
두 슈퍼스타에게는 나란히 평생의 뮤즈가 존재했다. 레논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오노 요코다. 실제로 레논은 요코를 만난 이후 비틀즈가 해체됐고, 레논은 사회적 메시지에 관심을 가지면서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요코는 '비틀즈 해체의 주범', '일본에서 온 마녀'라는 악평에서, "요코가 있었기에 레논이 '이매진'같은 감동적인 명곡들을 만들 수 있었다"는 평가까지 극명하게 엇갈린다. 레논은 생전에 자신의 인생을 요약하는 표현으로 '1940년 출생, 1966년 요코를 만남'이라는 글을 남기며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코는 레논 사후에도 여러 가지 논란의 행적들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과 무려 16년에 걸친 유산상속소송이었고, 요코는 레논이 아들 줄리안에게 남긴 편지를 경매에 내놓은 사실이 알려지며 공분을 사기도 했다.
 
레논에게 요코가 있었다면 잭슨에게는 다이아나 로스가 있었다. 잭슨의 첫사랑인 로스는 잭슨이 아직 데뷔하기 전부터 손꼽히는 팝스타였다. 잭슨은 그녀를 자신의 친구이자 평생의 뮤즈로 동경했다. 1986년 로스가 결혼을 하자 잭슨이 실망감과 질투심에 결혼식을 불참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로스를 향한 잭슨의 신뢰는 변함이 없어서 유언장에서 아이들의 후견인으로 모친 다음으로 로스를 지명했을 정도였다.
 
만일 오노 요코와 다이아나 로스,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뀌어서 요코가 레논에게 한 발자국 떨어져서 정신적 영감을 주는 존재로만 남고, 로스가 잭슨과 맺어져서 안정된 결혼생활로 약물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게 했다면 두 슈퍼스타의 운명은 아마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존 레논과 마이클 잭슨은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누리면서도 항상 약자와 평화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았고, 사후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잭슨은 "사랑받고 있음을 알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사랑받고 있음을 알면서 이 세상을 떠난다면"이라는 묵직한 어록을 남겼다. 2022년 현재 음악과 스타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깊은 울림을 남기는 장면이다.
세계다크투어 존레논 마이클잭슨 오노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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