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다이아몬드, 이른바 '보석의 왕'으로까지 불리우는 광물이다. 1캐럿이 한화 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보석인 다이아몬드는,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함께 영원한 사랑을 의미하는 상징으로도 쓰인다. 또한 우수한 물성으로 공학-과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도 빠질 수 없는 귀중한 재료로 여겨진다. 하지만 인간의 끝없는 이기심과 집착이 더해졌을 때, 애꿎은 다이아몬드는 종종 '탐욕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8월 30일 오후 tvN 역사예능 <벌거벗은 세계사> 62회에서는 '탐욕이 불러온 대살육,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주제로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인류의 어두운 역사를 조명했다. 국내 최고의 아프리카 전문가로 꼽히는 황규득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가 강연자로 나섰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란 다이아몬드의 주 산지인 아프리카에서 전쟁의 목적이자 자금원으로 무장 세력들이 현지인들을 착취하여 채취한 다이아몬드를 일컫는 말에서 유래했다. 또한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아프리카 내전를 방관하거나 오히려 다이아몬드 사업으로 이득을 누리고 있는 서구권과 국제 사회의 위선적 태도를 꼬집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아프리카에는 50여 개국이 넘는 나라들이 있으며 대륙 곳곳은 다양한 천연자원들이 넘쳐나는 풍요로운 땅이다. 하지만 이러한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도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빈곤과 낙후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와 관련된 현실을 고발한 한 캠페인 영상과 포스터는 섬뜩함을 자아낸다. 영상에는 수술실에서 눈을 뜨고 참혹하게 사망한 소년의 시신에서 한 남자가 총알 대신 다이아몬드를 채취하는 모습과 함께 '모든 다이아몬드에는 역사가 있다'라는 자막이 뜬다.
 
또한 포스터에는 흑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잘려진 손과 함께 '결혼하는 손을 위해 또다른 손은 잘려나가고 있다'라는 문구가 삽입되어있다. 1990년대 시에라리온 내전을 소재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다이아몬드 때문에 정작 원산지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대영제국은 식민지였던 인도 왕실(무굴제국)의 코이누르, 남아공의 컬리넌 등 많은 유명한 다아이몬드 자원들을 약탈해왔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 이후 코이누르는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보석이 되었는데, 오직 여성들만 착용하고 소유하도록 허가했다. 이는 코이누르를 소유했던 역대 남성 권력자들이 모두 전쟁에 휘말리거나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징크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왕관에는 코이누르보다 더 우수한 원석이라는 평가를 받는 컬리넌 다이아몬드가 사용됐다. 진귀한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나라들이 모두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화려한 대영제국의 영광 뒤에 갈려진 약탈과 야만의 역사를 상징한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가져온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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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보석 사냥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영국은 이로 인하여 손쉽게 다이아몬드를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다이아몬드 채굴은 어려운 작업이었고, 위험하고 혹독한 노동은 주로 흑인 원주민들의 몫이었다.

남아공 킴벌리 광산에서 1871년부터 1914년까지 43년간 약 5만여 명의 노동으로 획득한 다이아몬드 채굴량은 약 2.722kg에 달했고, 대가는 모두 영국이 가져갔다. 현재 킴벌리 광산은 빅홀이라는 이름으로 호수처럼 구덩이에 물이 고여 관광지로 변했는데, 안전사고 위험과 자연 환경 훼손으로 여전히 골칫거리로 남아있다.
 
다이아몬드의 맛에 매료된 영국은 아프리카 전역에 대한 지질조사에 나섰고,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인 시에라리온에서 최상급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한다. 아프리카의 최빈국 중 하나인 시에라리온은 오랜 내전과 부패한 정부로 인한 극심한 빈부격차로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이아몬드의 발견은 또다른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많은 분쟁지역을 취재했던 김영미 탐사전문 PD는 "어느 정도 마음을 먹고 갔음에도, 공항 입국에서부터 팔다리가 없는 사람들이 구걸을 하려 다가오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시에라리온의 탄생 배경은 미국의 독립전쟁과 영국의 노예제 폐지라는 굵직한 두 개의 사건과 맞물려 있다. 노예해방을 조건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영국 병사로 참전했던 흑인 해방노예들은 영국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일자리를 잃고 런던으로 몰려들었다. 난처해진 영국 정부는 해방노예들에게 자유의 땅인 아프리카로의 이주를 권유하며 사실상 추방을 단행했다.
 
영국 해방노예들에 의하여 건국된 나라가 시에라리온, 그 밑에 위치하여 미국의 해방노예들이 건국한 나라가 지금의 라이베이라다. 이는 또다른 비극의 모순을 불러왔다. 얼마전까지 노예였던 이주민들이 기득권 계층이 되어 같은 흑인인 현지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핍박하고 사고 팔며 이득을 취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
 
다이아몬드 광산의 발견은 시에라리온에 또다른 비극의 씨앗이 됐다. 영국의 대표적인 다이아몬드 생산기업인 '드비어스'는 한때 세계 다이아몬드 유통의 90% 이상을 독점할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제국주의가 쇠퇴하고 왕정들이 붕괴하면서 왕실과 귀족의 상징이었던 다이아몬드의 인기도 사그라들었다. 자연히 드비어스도 극심한 경영난과 폐업 위기에 몰렸다.
 
드비어스는 경영전략을 바꿔 이제는 일반 대중을 겨냥하여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라는 슬로건을 제시한다. 오늘날 다이아몬드에게 결혼예물이자 '영원한 사랑'을 의미하는 상징이 된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20세기 최고의 광고 중 하나로 꼽힌다. 심지어 그 영향력은 국내에도 전파되었으나 화제를 모았던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더냐"라는 명대사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다양한 대중문화에서 패러디되고 있다.
 
드비어스는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나서 채굴권을 독점했다. 시에라리온의 원주민은 흔하게 굴러다니는 다이아몬드를 돌멩이처럼 여기고 그 경제적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2차대선에서 영국의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시에라리온 군인들을 통하여 다이아몬드의 가치가 현지인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광산의 채굴권을 독점한 드비어스와 원주민들간에 불법채굴과 밀수문제 등으로 갈등이 깊어졌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1950년까지 쌀 생산으로 자급자족했던 시에라리온은 약 13년 만에 2만 1천 톤에 이르는 쌀을 수입해야 할 정도로 농업이 붕괴된 상황으로 전락했다. 사람들이 농사보다 더 이익되는 다이아몬드 불법 채굴에만 매달리는 현상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시에라리온은 1961년 영국으로부터 영국 여왕을 원수로 하는 영연방 자치국가의 일원이 된다는 조건으로 독립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이는 반쪽짜리 독립에 불과했다. 당시 영국은 해방노예만이 아니라 여러 부족장에게 권력을 나눠줬는데 이는 훗날 시에라리온 내전의 빌미가 됐다.
 
시에라리온의 초대 대통령인 시아카 스티븐스는 1970~1980년대 시에라리온을 일당 독재국가들로 만들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스티븐스는 취임 이후 다이아몬드 광산을 국유화했다. 하지만 이는 다이아몬드 광산의 소유주가 영국에서 스티븐스의 사유화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 다이아몬드로 벌어들인 수익은 여전히 시에라리온 국민들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1972년 코이두 지역 다민코 광산에서 '시에라리온의 별'로 불린 968.9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어 약 250만 달러(2022년 기준 228억 원)에 거래된다. 고무된 스티븐스는 다이아몬드 생산에 더 투자할 것을 지시하지만 1970~1980년대 시에라리온의 공식 다이아몬드 생산량은 해마다 오히려 감소한 것이 드러난다. 많은 양의 다이아몬드가 불법채굴과 밀수로 빼돌려졌기 때문이다. 이 기간 암거래된 다이아몬드는 약 1억 6천만 달러 규모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민들은 열심히 일해도 개선되지 않는 현실과 빈부격차에 분노했다. 포데이 산코라는 인물은 1991년 무장투쟁단체 '혁명연합전선(RUF)'를 결성하여 부정부패한 정부를 타도하겠다고 선언한다. 본격적인 시에라리온 내전의 시작이다. 여기에 리비아의 독재자 알 카다피의 지원으로 라이베리아의 반군 지도자 찰스 테일러는 산코가 이끄는 혁명연합전선과 동맹을 결성한다.
 
반군은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다이아몬드 생산지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다이아몬드로 얻은 수익으로 무기 구입과 병력을 유지하며 반군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할수록 세력이 점점 커지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정규군에게 월급을 지급할 능력도 없었던 시에라리온 정부는 반군 제압은 고사하고, 그나마 남은 광산에서 이득을 챙기기에만 급급했다. 급기야 굶주린 정부 군인들이 오히려 민간인 마을을 약탈하는 막장스러운 상황까지 발생했다. 낮에는 정부군, 밤에는 반군(Rabel)과 다를 게 없는 약탈자라는 의미에서 소벨(SOBEL)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투표하지 못하게 손 자르고...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1992년 4월 당시 조지프 사이두 모모 시에라리온 2대 대통령은 단 6명의 군인들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하여 실각하며 정권이 붕괴된다. 쿠데타 주동자였던 대위 발렌타인 스트라서는 25살의 어린 나이에 세계 최연소 국가 원수가 된다.

하지만 스트라서 군사 정부 역시 이전의 부패한 정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스트라서는 다이아몬드 불법수출로 막대한 이득을 챙겼고, 군사업체인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즈로부터 악명 높은 외국인 용병들을 수입하여 반대파를 탄압하면서 나라의 안보와 평화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데만 급급했다.
 
당시 정부군 부사령관이었던 줄리어스 마다 비오는 쿠데타를 일으켜 스트라서 정권을 무너뜨리고 1996년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계획을 추진한다. 당시 대통령 선거의 슬로건과 포스터가 '손을 맞잡자'로 국민통합을 의미한 것이었다.
 
산코가 이끄는 반군은 선거의 슬로건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민간인들이 투표하지 못하도록 집단으로 신체를 절단하거나 훼손하는 끔찍한 테러를 저질렀다.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주어서 투표를 포기하게 하려는 극악무도한 전략이었다. 반군에 의하여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된 민간인들의 숫자는 2만 7천여 명에 이르렀다. 반군은 사람들의 몸에 투표를 거부한다는 글귀를 문신으로 강제로 새기기도 했다.
 
또한 반군은 모자란 병력을 채우기 위하여 나이어린 소년병들을 강제로 징집했고, 이들을 민간인들의 신체를 훼손시키는 테러에도 앞장세웠다. 놀랍게도 RUF 병력의 80%가 7~14세의 아동이었고, 이들에게 두려움을 없애기 위하여 주입식 사상교육에다가 코카인 등 마약까지 복용시킨 사실이 밝혀져 전 세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반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996년 선거는 무사히 치러졌고 내전 이후 첫 민선대통령으로 UN 변호사 출신의 아흐메드 테잔 카바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런데 내전을 방관해오던 UN은 여기서 뼈아픈 실책을 잇달아 저지른다. 황당하게도 반군의 수장인 산코와 협상하여 새로운 정부에 참여시킬 것을 제안한 것. UN의 지원이 절실했던 카바 정권은 어쩔수 없이 산코와 평화협정을 두 번이나 체결하고 테러단체인 RUF까지 합법화시켜줬다.
 
하지만 산코의 탐욕은 멈추지 않았다. 산코는 다이아몬드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통령까지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산코가 다이아몬드 불법수출과 무기밀매 혐의로 체포되자 그를 추종하는 반군이 1999년 1월 보복으로 수도 프리타운에서 정부군을 지지한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하는 '생물절멸작전'을 단행하며 6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명의 아동이 실종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산코는 한 인터뷰에서 외신기자가 민간인 학살을 추궁하자 "당신 이름이 뭐냐, 우리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위협했고 협정에 따라 무장해제를 해야하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서도 "내가? 전혀"라고 답하며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산코의 만행과 UN의 거듭되는 무책임한 조치에 분노한 3만 명의 시에라리온 국민들은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RUF는 총을 쏘며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하려고 했지만 국민들의 저항은 강력했고 산코는 결국 정부군에 의하여 지도부와 함께 체포됐다. 이들은 2000년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기소한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을 통하여 대부분 중형을 선고받았다. 시에라리온 내전을 지원한 찰스 테일러도 50년형을 선고 받았다.
 
다만 산코는 판결을 앞두고 뇌출혈로 사망하며 죗값을 치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특별법정 수석검찰관 데이비드 크레인은 "수많은 사람에게 비참한 최후를 안겨놓고 정작 자신은 평화로운 죽음을 맞았다"며 비판했다.
 
산코 사후 구심점을 잃은 반군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카바 대통령은 2002년 비로소 내전이 종식되었다고 선언했다. 당시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신체를 훼손당하고 아픔을 겪었던 소년들은 어느새 30대의 성인이 되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전쟁의 아픔과 후유증은 시에라리온인들의 가슴속에 씁쓸한 상흔으로 남아있다.
 
시에라리온의 비극에서 큰 교훈을 얻은 국제사회는 2003년 '킴벌리 프로세스'를 설립하고 반군의 분쟁자금을 위한 다이아몬드 거래 금지에 합의했다. 시에라리온은 현재 민주적인 선거를 통하여 경제성장과 자원 관리의 부패근절 등 다양한 노력이 진행중이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그레그 캠벨은 "평화가 자리잡지 않는 한 우리 곁의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는 한때 무고한 아프리카인들의 피로 얼룩진 물건이었을 수도 있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혹자는 이를 다이아몬드의 저주라고 하지만, 이는 결국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아수라였다. 다시는 피묻은 다이아몬드가 전 세계에 퍼지지 않도록 전 세계의 꾸준한 지원과 관심이 필요한 것은 물론, 시에라리온의 비극을 통하여 국제사회의 진정한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도 우리가 돌아봐야 할 이유다.
시에라리온 블러드다이아몬드 벌거벗은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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