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회 체코의 칼로비바리영화제가 한창이던 7월 5일. 영화제를 찾은 취재진들은 일제히 어느 다큐멘터리에 주목했다. 그도 그럴것이 체코와 역사적 관계가 깊은 슬로바키아의 역사를 바꾼 얀 쿠치악(Ján Kuciak) 기자의 살해사건을 다룬 영화 <킬링 오브 저널리스트>가 큰 기대속에 첫 선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다큐를 연출한 매트 사르네키 감독과 얀 쿠치악 기자의 부모및 약혼녀 마르티나 쿠스니로바의 모친도 칼로비바리를 찾았다. 비디오 저널리즘을 전공했던 사르네키 감독은 루마니아에 기반한 국제 탐사보도 단체, '조직범죄·부패 보도 프로젝트' (OCCRP)에서 비디오 제작부장을 맡고 있다.

그는 2017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차량폭탄테러로 살해당한 벨라루스 출신 파벨 기자 사건을 다룬 <킬링 파벨 (Killing Pavel)>로 2018년 이탈리아의 비영리 탐사저널리즘 진흥단체 DIG으로부터 탐사보도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번 작품은 <액트 오브 킬링>< 플리 FEE >등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랐던 덴마크의 저명한 'Final Cut for Real' 프로덕션과의 첫 협업이다.

약혼녀와 함께 숨진 채 발견된 기자
 
얀 쿠치악 기자와 약혼녀 마르티나 쿠스니로바의 생전의 모습  쿠치악 기자와 약혼녀 마르티나 쿠스니로바씨는 결혼식을 두 달 앞두고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 얀 쿠치악 기자와 약혼녀 마르티나 쿠스니로바의 생전의 모습 쿠치악 기자와 약혼녀 마르티나 쿠스니로바씨는 결혼식을 두 달 앞두고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 Final Cut for Real

 
2018년 2월 21일, 27세의 젊은나이에 약혼자 마르티나 쿠스니로바와 함께 자택에서 살해된 얀 쿠치악은 슬로바키아의 탐사보도 매체 Aktuality.sk의 기자다. 스캔들로 얼룩진 재벌 마리안 코치너 (Marián Kočner)를 비롯, 주요 정치인들 및 거물의 탈세·돈세탁 등 부정부패 범죄를 주로 폭로해왔다.

결혼을 두달 앞둔 젊은 커플의 냉혹한 죽음을 접한 슬로바키아 국민들은 분노했다. 살인사건 직후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부패한 정권퇴진을 외치며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이어갔다. 특히 커플의 지인들과 일단의 학생 단체들은 '정직한 슬로바키아를 위해 (For a Decent Slovakia)'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를 주도했다.

총 인구 5백만 명에 불과한 동유럽의 작은 나라에서 6만 명이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공산주의 체제 붕괴로 이어진 1989년 벨벳혁명 이래 최대규모였다. 한달도 채 되지 않아 수상 로베르토 피코와 내무부장관 사퇴를 가져왔고 결국 경찰총장까지 사임하며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2020년에는 살인 주문 혐의로 재판중인 코치너와 유착관계에 있던 13명의 판사, 5명의 검사 및 정치인들이 부정부패 혐의로 체포및 기소됐다. 

사건 20개월 후 국내 거물들의 부정부패 네트워크 관련 제보를 접한 체코출신 탐사보도 언론인 파블라 홀코바(Pavla Holcová)가 슬로바키아의 일간지, 주간지, TV방송국 기자들과 합심해 부패한 국가 및 사법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폭로를 함으로써 정치적 지형을 변화시킨 결과다.

새로운 정치를 열망하던 대중은 2018년 다수의 현지 활동가들을 브라티스라바를 포함한 주요 시의 시장으로 당선시켰고 급기야 2019년에는 환경운동가-변호사 출신의 주자나 카푸토바는 대선에 승리하며 돌풍을 몰고 왔다. 슬로바키아 공공문제연구소를 창립한 정치평론가 그리고리 메세즈니코프는 "1989년 공산주의 붕괴,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와 더불어 "2018년은 슬로바키아 역사의 전환점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필자는 지난 6일 칼로비바리에서 매트 사르네키 감독과 만나 다큐 제작과정과 슬로바키아의 현 상황, 이 사건이 지닌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얀 쿠치악 기자의 죽음, 유산으로 남아"
 
킬링 오브 저널리스트를 연출한 매트 사르네키 감독 <킬링 오브 저널리스트>는 이번 칼로비바리영화제를 통해 유럽에서 첫 선을 보였다.

▲ 킬링 오브 저널리스트를 연출한 매트 사르네키 감독 <킬링 오브 저널리스트>는 이번 칼로비바리영화제를 통해 유럽에서 첫 선을 보였다. ⓒ 클레어함

 
다음은 감독과의 일문일답. 

- 이 영화가 본인의 첫 장편 데뷔작인가?
"그렇다. 이번이 장편 길이의 다큐멘터리 데뷔라고 할 수 있는데 주류 다큐멘터리 세계와 탐사 저널리즘 세계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하이브리드라고 생각한다. 지난 4-5년 동안 제작한 TV용 다큐멘터리는 지금보다 좀 더 하드코어한 탐사 다큐다."
 
- 본인이 몸 담고 있는 '조직범죄·부패 보도 프로젝트' (OCCRP)와 본인의 역할에 대해 소개해달라. 
"조직범죄·부패 보도 프로젝트 (OCCRP: Organized Crime and Corruption Reporting Project)는 한마디로 다양한 탐사보도 단체들의 컨소시엄이다. 2006년 동유럽에서 시작해 지금은 아프리카와 남미 지역도 함께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모든 나라에 파트너가 있는데 예를 들어 체코에는 Investigace.cz, 우크라이나는 Slidstvo.info, 세르비아는 KRIK이다. 이 모든 단체들이 함께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협력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조직범죄조직이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이태리 마피아는 자국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라 항구를 통해 남미의 마약을 밀수하고 있지 않나. 저널리즘의 시각적 측면이 증가하는 추세에 따라 OCCRP는 9년 전에 비디오부서를 처음 만들었는데 그때 제가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5-10분 단위의 짧은 비디오를 제작했었고 점차 분량을 늘였다. <킬링 파벨>은 50분에 이르렀다. <킬링 오브 저널리스트>는 자료, 이야기, 액세스 모두 고려했을때 장편 (90분-2시간) 분량이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 러시아의 탐사보도 단체와도 협력하고 있나. 국제기자연맹 (IFJ)의 2009년 보고서에 따르면 1993년대 이래 러시아에서 300명 이상의 언론인이 실종되거나 사망했다. 
"이전에는 러시아의 매체 노바야 가제타 (Novaya Gazetta)와 아이스토리 (istory)와 협력했었고 많은 보도를 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출판을 이어가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 당분간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우리는 더 이상 그들과 파트너 관계가 없다. 모두가 안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직 동료 중 일부는 여전히 우리 웹사이트에 기사를 쓰고 있다고 알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해외에서 자금이 들어온다는 이유로 OCCRP를 외국 스파이 단체로 지정했다.   

- 이 프로젝트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파벨 기자의 살해 사건을 CCTV 위주로 재구성했던 전작 <킬링 파벨>이후, 얀과 마르티나가 살해된 슬로바키아의 마을로 현지 언론인들이 저를 초대했다. 그들은 제가 폐쇄 회로 카메라 시스템을 활용해 유사한 분석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하지만 당시 이웃 사람들과 경찰이 CCTV 영상 공개를 매우 꺼려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저는 당시 우리를 도왔던 얀의 친구 에바 쿠바니오바와 계속 연락을 이어갔는데 그녀는 나중에 OCCRP의 체코 파트너 매체에서 기자가 되었다. 그리고 살인 사건 20개월 후 경찰의 사건 파일이 영화의 주인공 파블라 홀코바 기자에게 유출됐다. 함께 일하고 있었던 에바와 파블라는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발견한 것을 저에게 알려주었다. 저는 일련의 이 사건들이 슬로바키아에서 부패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주는 청사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특별히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
"모든 것이 어려웠다(웃음). 7만 테라바이트의 자료와 2만5000페이지의 경찰 보고서를 검토하는 데만 6개월이란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또한 내레이터 없이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를 등장인물의 말에 의존해 전달하는 것은 매우 고난도의 작업이다. 대부분의 경우 인터뷰를 다시 할 수 없기 때문에 전체 이야기가 잘 전달되기 위해 제작 전 조사를 엄청한다. 그리고 이 살인사건은 총 5명 (전직 경찰, 전직 군인, 피자집 주인, 재벌 사업가와 한 여성)이 얽힌 살인 사건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만 인터뷰에서는 명확하고 간결하게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은 항상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은 등장 인물들의 말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연출자는 다소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극영화에 비해 더 어려운 것 같다.
"또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나, 상대방이 관객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명확하게 이끌어 내기 위해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야 할지 계속 자문해야 한다. 왜냐하면 등장인물이 때로는 세부 사항을 너무 많이 소개하거나 사건과 관련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누군가 어느 캐릭터를 소개하면 그 캐릭터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다. 이런 점들이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의 애로사항인 것 같다."

- 2018년 대규모 반정부집회 당시 시민들이 사법 및 경찰 개혁도 요구했나? 퇴진당한 과거 부패세력이 현재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보이는 것은 현 정부의 개혁의지 부족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 
"흥미롭게도 같은 주제에 대해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개혁을 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구체제 속한 판사들과 경찰관을 무조건 해고할 순 없다. 독재정권이 아니라면 그들이 교체되어야 하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사법체계를 민주적으로 개혁하는 것은 느린 과정일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이런 점이 개혁을 가로막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안타까운 것은 다음 선거가 다가올 때까지 시스템을 개혁할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회는 다시 예전 방식으로 돌아간다. 제가 사는 루마니아도 마찬가지다. 루마니아의 다큐멘터리 <컬렉티브 (Collective)>에서도 잘 보여주듯, 정권교체를 이끈 일련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기술 관료들이 집권했다. 변화가 충분히 빨리 오지 않자, 노인들은 '과거에 우리가 집권할 때가 더 좋지 않았냐'라고 말하며 더 많은 돈을 약속하고 재집권했다."

-많은 동유럽 국가에서 신흥재벌 (oligarch 올리가흐)의 사회적 역할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1990년대 공산주의체제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며 현재까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는 단지 슬로바키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로인해 이 지역의 사회 경제적 격차는 크게 벌어지고 있으며, 지배층의 부정부패를 심화시키는데 큰 요인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구 소련, 구 공산주의 체제 국가들은 공산주의 몰락을 경유하며 유사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이 국가들에서 특정 인맥이 있었던 올리가흐들은 국가가 소유했던 것을 개인이 인수하며 부를 축적하게 된다. 러시아나 루마니아의 예를 보면, 극소수의 개인이 국가 소유의 모든 생산수단을 인수하며 극도의 부를 얻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국가에서는 90년대 신흥재벌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들이 슬로바키아만큼 강력한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브라티스라바정책연구소의 사회학자 미하일 바세츠카 (Michal Vasecka)는 얀 쿠시악 기자의 죽음이 갑자기 슬로바키아 사회의 많은 불편한 진실을 드러냈고 정화 (detox)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얀 기자의 부친은 영화제 기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아들의 죽음이 많은 시민들을 일깨워 국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씀했다. 얀 기자와 약혼녀 마르티나씨의 희생이 역사에 남긴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얀 기자와 약혼녀 마르티나씨의 죽음은 슬로바키아 사회 전체에 대한 청산의 계기가 되었다. 살인 혐의로 재판중인 재벌 사업가 마리안 코치너를 비롯해 부패한 판사들 및 고위직 경찰 간부들의 몰락은 모두 이 살해 사건의 결과다. 물론 이 둘의 죽음은 비극적이지만, 슬로바키아 사회 전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기 위한 기회가 됐다. 그것은 큰 유산이 아닐 수 없다."
매트사르네키 킬링오브저널리스트 얀쿠치악 OCCRP 슬로바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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