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원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이건 축구경기일 뿐인데, 졌다고 인생이 망하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경기의 하나일 뿐이야. '노력하면 된다, 노력하면 이긴다'는 각본있는 드라마예요. 노력은 했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힌 거고 그게 리얼리티다. 현실이 원래 잔인하죠. 자비가 없어요."
 
스포츠에서 감동은 승패라는 결과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덧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SBS 축구예능 <골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의 결승 진출 팀이 가려졌다. 22일 방송된 <골때녀>에서는 FC 국대패밀리와 FC 구척장신의 4강전이 펼쳐졌다.

전력상 국대팸보다 열세로 평가받은 구척장신은 주장 이현이를 중심으로 독기를 품고 승리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구척장신 감독 백지훈은 국대팸 에이스로 부상한 이정은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다양한 맞춤형 전술을 준비했다. 이를 예상한 국대팸 조재진 감독은 이정은을 최후방 수비에 깜짝 배치하여 상대의 허를 찌르고 수시로 자리를 바꾸는 포지션 스위칭 전술을 들고 나왔다.
 
경기 초반 국대팸은 전방 압박 대신 패스 길목을 미리 선점하여 차단하는 수비를 펼치며 구척장신을 당황시켰다. 패스가 제대로 돌지않아 공격전개에 어려움을 겪은 구척장신은 결국 김진경을 한 칸 아래로 내려서 빌드업을 맡겼다. 그러자 국대팸은 이정은을 2선으로 전진배치시켜 바로 공세로 전환했다.
 
이정은은 뛰어난 드리블과 슈팅능력을 발휘하여 여러 차례 구척장신의 문전을 위협했다. 김병지-하석주-최진철 등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축구 레전드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정은은 공격 쪽에 배치하는 게 훨씬 낫다"라고 호평했다. 
 
국대팸의 파상공세가 이어지며 구척장신은 좀처럼 공격을 시도하지 못하고 수비에 급급했다. 구척장신은 아이린의 슈퍼세이브로 여러 차례 위기를 넘겼고, 이정은이 공을 잡으면 차수민을 비롯한 수비수들 여럿이 동시에 에워싸는 조직적인 샌드위치 마크로 대응했다.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구척장신이 행운의 선제골을 뽑아냈다. 전반 10분 측면에서 이정은이 내준 공을 전미라가 다소 먼 거리에서 과감한 중거리 슈팅을 날렸다. 포물선 궤적을 그린 로빙슛은 골대 상단을 맞고 튀어나오다가 다시 골키퍼 아이린의 몸에 맞고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득점은 아이린의 자책골로 기록됐다.
 
반격에 나선 구척장신은 전반 종료 직전 절호의 동점찬스를 잡았다. 아이린의 골킥이 김수연의 백헤딩에 이어 국대팸 문전에서 경합하던 이현이 쪽으로 연결됐다. 골키퍼 양은지가 캐칭에 실패한 틈을 타 이현이가 절묘한 발등슛을 시도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아쉽게 골문을 벗어났다. 전반은 1-0 국대패밀리의 리드로 끝났다.
 
후반들어 구척장신은 적극적인 공세로 만회골을 노렸다. 하지만 국대팸은 본격적으로 몸이 풀린 이정은의 원맨쇼가 펼쳐졌다. 후반 1분만에 전미라의 리턴패스를 이어받은 이정은이 볼처리를 서로 미루다가 우왕좌왕한 구척장신 수비벽을 순간적으로 드리블로 돌파하며 골키퍼까지 제치고 추가골을 뽑아냈다. 이정은의 3경기 연속골이었다.
 
불과 1분 뒤에는 코너킥 상황에서 이정은이 중앙으로 낮고 빠르게 깔아준 패스를 전미라가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하며 세 번째 골을 뽑아냈다. 전미라 역시 2경기 연속골이었다. 국대팸의 압도적인 실력에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상대팀 출연자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경기가 3-0까지 벌어진 시점에서 분위기는 급격히 국대팸 쪽으로 기울었다. 백지훈 감독은 작전타임을 부르고 선수들을 독려했지만, 이후로도 오히려 국대팸의 일방적인 공세가 이어졌다.

수비조직력이 급격하게 무너진 구척장신을 상대로 이정은은 후반 3분과 7분에 연속골을 터뜨리며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이어 후반 10분에는 박승희마저 중거리슛으로 쐐기골을 터뜨렸다. 후방 빌드업을 통하여 7-8번의 패스가 한번도 끊기지 않고 골까지 연결되는 수준 높은 플레이에 상대팀은 모두 경악했다.
 
망연자실한 아이린의 모습을 지켜보던 김병지는 "네덜란드전이 생각난다"라며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김병지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에서 주전 골키퍼로 나서서 무려 22개의 슈팅을 선방해내며 고군분투했으나 한국은 일방적인 경기 끝에 0-5로 완패한 바 있다.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자 훗날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 사령탑이 되는 거스 히딩크 감독도 김병지의 기량을 극찬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김병지는 "몇 개의 슛을 막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그저 5골을 먹었다는 좌절감만 남았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김병지로서는 같은 골키퍼인 아이린의 모습에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 것.
 
승리의 수훈갑이 된 이정은은 "첫 경기때는 저도 경험이 없으니까 혼자 잘하기에 급급했다. 이제는 언니들과 호흡이 잘맞아가는구나. 이 순간을 위하여 우리가 열심히 했구나 느꼈다"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파일럿시즌 3위, 지난 시즌 준우승을 기록한 국대패밀리는 이번 시즌 들어 심하은과 한채아 등 일부 멤버들이 하차했지만, 핵심전력이었던 운동선수 출신 전미라-박승희가 건재한 데다 이정은까지 가세하며 전력이 더욱 탄탄해졌다. 축구 국가대표 이강인의 친누나인 이정은은 기존 <골때녀> 세계관 최강자였던 박선영(불나방)을 능가하는 월등한 개인능력을 과시하며 단숨에 리그 판도를 뒤흔든 존재로 급부상했다.

반면 완패를 당한 이후 이현이는 "상대팀에게 월등히 잘하는 선수(이정은)가 있다는게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적대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는 아니다. 상대가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와 벽 때문에 멘탈이 무너졌던 거다"라고 자평했다.

구척장신 멤버들은 0-6 완패로 경기가 끝나고 조용히 대기실로 돌아가 모두 눈물을 쏟아냈다. 심지어 백지훈 감독조차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현이는 오히려 그런 백지훈과 팀원들을 "괜찮다"라고 위로하면서 "이런 경험도 저희 구척장신을 성장하게 하는 요소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저희는 지금도 성장 중이고 완성형이 아니다. 후회를 남기지 않은 경기를 하고 싶다"라고 미래를 기약했다. 
 
백지훈 감독은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안좋았다. 본인들도 얼마나 잘하고 싶었겠나. 그런데 안 될때는 죽어도 안 될 때가 있다"면서도 "그럼에도 감사하고 고마웠던 것은, 끝까지 어떻게 해서든 발버둥 치는 모습이 너무 짠해서. 진심으로 선수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라고 고백했다. 
 
패자의 관점에 좀 더 주목하고 따뜻한 애정을 보여주는 것은 <골때녀>가 기존 스포츠 예능과 가장 차별화된 지점이기도 하다. <골때녀>는 비록 이기지 못했거나 큰 점수로 패했다고 해도 후회없이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한다면, 패자라도 충분히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주 방송된 액셔니스타와 월드클라쓰의 준결승 1차전 경기도 비슷했다. 재한 외국인들로 구성된 월드클라쓰는 수비수 라라와 골키퍼 캐시의 부상 공백을 이기지못하고 액셔니스타에 석패했다. 경기 후반에는 교체선수가 없어서 가뜩이나 뒤지고있는 가운데 4대 5로 수적열세까지 안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최진철 월드클라쓰 감독은 캐시가 경기 출전에 대한 의지를 보였지만 선수보호를 위하여 수적열세를 감수하며 단호하게 교체를 지시했다. 또한 상대팀인 이영표 감독이 "우리도 선수를 한 명 제외해서 균형을 맞춰야할지"를 고민하자, 최 감독은 단호하게 "그냥 하라"며 규정에 맞는 정정당당한 플레이를 끝까지 고수했다. 정작 최 감독은 이전 시즌 개벤져스와의 경기에서 상대팀에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사오리를 제외하며 조용하게 4대 4로 균형을 맞춰주는 배려를 한 바 있다.

월드클라쓰는 비록 패배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감동을 줬다. 진정한 스포츠의 매력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이 주는 감동이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골때녀> 결승전은 국대패밀리와 액셔니스타의 맞대결이 성사됐다. 구척장신과 월드클라쓰는 지난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3.4위전에서 마주치게 됐다. 지난 시즌에는 월드클라쓰가 구척장신을 물리치고 3위로 동메달을 차지한 바 있다. 다음 회에서는 두 팀의 치열한 3.4위전을 예고하며 기대감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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