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과 두 번째 평가전에서 활약한 최준용과 라건아

필리핀과 두 번째 평가전에서 활약한 최준용과 라건아 ⓒ 대한민국농구협회 제공

 
'농구학자' 추일승 감독의 농구학개론 1교시가 성황리에 마감했다. 추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6월 17, 18일 이틀간에 걸쳐 열린 KB국민은행 초청 '2022 남자농구 국가대표 평가전' 필리핀과의 2연전을 기분좋은 연승으로 장식했다. 대표팀은 1차전에서 96대 92로, 2차전을 106-102로 이틀연속 다득점 공방 끝에 4점차 역전승을 거뒀다.
 
조상현 감독이 이끌던 지난해 6월 필리핀 원정에서 열린 FIBA(국제농구연맹) 아시아컵 예선에서 두 번 연속으로 필리핀에 패배했던 한국은 1년만의 리턴매치에서 깔끔하게 설욕하는데 성공하며 역대 전적에서도 28승 17패로 우세를 이어갔다. 국가대표팀 데뷔무대를 성공적으로 장식한 추일승호는 내달 7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FIBA 아시아컵 본선에 대한 전망도 밝혔다.
 
'비주류의 신화'로 꼽히는 추일승 감독은 학연과 인맥이 중시되는 보수적인 한국농구계에서 무명에 가까운 현역 시절을 보냈음에도 구단 프런트를 거쳐 지도자로 뒤늦게 성공한 이색적인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
 
프로농구 부산 KTF(현 수원 KT)-고양 오리온(현 데이원) 사령탑을 역임하고 대한민국 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장, 방송 해설위원 등으로도 활동했던 추 감독은, 지난 5월 프로농구 창원 LG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조상현 감독의 뒤를 이어 공모를 거쳐 대표팀 사령탑에 선임했다. 오리온에서 지휘봉을 놓은 지 2년 만의 현장 복귀이자, 대표팀 전임감독제가 도입된 이래 사상 최초로 무명선수 출신이자 국가대표 경험이 전무한 인물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추 감독은 취임 일성으로 "대표팀 감독은 정말 명예로운 자리"라면서 "한국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엘리트 농구팀에서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성과를 내고 싶다. 국제무대에서 내가 해보여주고 싶은 농구를 마음껏 시도해보고 싶은 열망과 자신도 있다. 팬들에게는 한국농구도 '잘한다,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선수들도 아무나 달 수 없는 태극마크에 대한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한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추 감독은 7월 1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2022 아시아컵을 시작으로 내년으로 미뤄진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까지 대표팀을 이끌게 됐다. 하지만 데뷔무대인 필리핀과의 평가전을 앞두고 첫 소집부터 이승현(전주 KCC) 전성현(고양 오리온) 김선형(서울 SK) 등 주전급 핵심 선수들이 잇달아 부상으로 낙마하여 불안감을 드리웠다. 선수들 대부분이 프로선수들이다보니 장기레이스를 마치고 몸상태가 정상이 아닌 경우가 많았고 손발을 맞출 시간도 부족했다.
 
하지만 추일승 감독은 핑계를 대기 보다는 변화와 열정에 무게를 뒀다. 추일승호는 필리핀이라는 만만치않은 강호를 상대로 첫 공식 경기이자 부족한 훈련시간에 대한 우려가 무색하게, 예상을 뛰어넘는 경기력으로 농구팬들을 열광시켰다.
 
승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첫 경기부터 이전의 대표팀과 차별화되는 추일승호만의 색깔을 보여줬다는데 의미가 크다. 추일승 농구는 이른바 '빅포워드'와 '무한 로테이션'으로 요약된다. 사이즈와 활동량을 겸비한 장신 포워드를 활용한 빅 라인업, 특정 선수들에게 의존하지않고 엔트리에 있는 선수들을 최대한 골고루 활용하는게 추 감독의 장점으로 꼽힌다. 그리고 이는 농구팬들 사이에서도 추일승의 농구가 국제대회에서 더 잘통할수 있다는 기대를 모은 이유이기도 하다.

기존의 한국농구는 슈터 중심의 농구였다. 이충희, 김현준, 허재, 문경은, 방성윤, 문태종, 조성민 등 뛰어난 외곽 슈터들과, 강동희, 이상민, 양동근, 김선형 등 빠르고 패싱력이 좋은 가드들의 조합을 활용하여 '스몰 라인업-양궁농구'로 높이의 열세를 만회하는 패턴이었다. 하지만 강팀을 상대로는 필연적으로 수비와 리바운드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3점슛이 터지지 않으면 그대로 침몰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하지만 추 감독은 필리핀과의 첫 경기부터 허훈을 원 가드로 기용하고 김종규(DB)-라건아(KCC)-최준용(SK)-여준석(고려대) 등 2미터 내외의 장신들을 동시에 기용하는 파격적인 빅 라인업을 선보였다. 특히 장신임에도 볼핸들링과 운동능력이 빼어난 최준용과 여준석이 스윙맨 역할을 담당하며 추일승 포워드 농구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최준용과 여준석은 전통적인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상황에 따라 공을 몰고 림으로 돌진하기도 하고, 리바운드에 가담하거나 외곽슛을 던지는 등 내외곽을 넘나들며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장신 라인업의 장점은 역시 미스매치를 유발하기 쉽다는 것. 한국보다 평균 신장이 낮은 필리핀은 한국 장신 선수들의 높이와 힘에 밀려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복잡한 패턴 없이도 단순한 스피드와 돌파에 알고서도 당하는 장면이 속출했다.

최근 한국농구에 최준용-여준석 외에도 송교창-양홍석-강상재-이현중 등 기동력과 기본기까지 갖춘 빅 포워드 자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호재다. 장신 포워드들을 활용한 전술은 기존의 한국농구의 스타일을 기존의 양궁 농구-수비농구의 위주패턴에서 벗어나 국제적 흐름에 맞춰 변화시키고 싶다는 추일승 감독의 포부와도 관련되어있다.

또한 장신 선수들의 활약만 돋보였던 것이 아니다. KBL 최고의 인기스타로 부상한 허웅과 허훈 형제는 필리핀전에서 고비마다 화끈한 외곽슛과 돌파 등으로 공격의 활로를 열며 '국내용'이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했다. 특히 전성현이 빠진 이번 대표팀에서 가장 확실한 3점슈터인 허웅은 작은 신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1차전에서 16점 3리바운드 1어시스트, 2차전에서 3점슛 5개 포함 21점 1리바운드 8어시스트 1스틸로 펄펄 날며 특급 조커로 활약했다.

대표팀 부동의 해결사인 라건아는 2차전에서 무려 27점 18리바운드의 원맨쇼를 펼치며 건재를 증명했다. 라건아의 압도적인 골밑 장악력은 한국이 인사이드에서 경기를 수월하게 풀어가는데 큰 영향력을 미쳤다. 다만 이전 대표팀 경기들과 차이점은 무조건 '라건아 GO'만 의존하던 전술에서 벗어나, 동료 선수들의 고른 공수 지원이 뒷받침되면서 부담이 분산된 라건아가 한결 수월하게 손쉬운 득점을 올릴수 있었다는 점이다.

추일승호는 1, 2차전에서 모두 초반 열세를 뒤집고 역전승을 거뒀고, 특히 3쿼터에 폭발적인 집중력을 선보였다. 또한 쿼터별로 해결사가 계속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올만큼, 특정 선수에게 의존하지않고 여러 선수들이 고른 활약을 펼쳐줬다. 추 감독은 평가전의 의미에 걸맞게 여러 선수들을 기용하는 로테이션으로 체력을 안배하고 다양한 조합을 실험했다. 골밑 득점과 속공 성공률이 높아졌다는 것은 이날 경기에서 가장 성공적인 부분이었다.
 
물론 아쉬운 면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기대 이상이었던 공격력에 비하여 팀 수비는 역시 조직력을 맞출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허술한 장면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트래지션과 2대 2게임 수비에 대한 이해도는 좀더 가다듬어야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부분은 선수들이 경기에 대한 의욕과 열정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기나긴 프로 시즌을 마치고 휴식기에 소집되는 대표팀 일정은 선수들에게는 큰 부담인게 사실이다. 몸상태와 부상 우려 등을 이유로 대표팀 합류를 내심 꺼리는 선수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감독교체로 인한 효과를 감안해도, 추일승호는 필리핀전 내내 마치 아시안게임 결승이나 올림픽 경기를 보는 듯한 집중력을 선보였다. 오랜만의 A매치 평가전에서 경기장을 가득 메운 농구팬들의 성원도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최근 몇 년간의 국제대회 성적부진, 프로농구의 인기하락, 스타 부재 등의 악재 속에서 한동안 기대치가 낮아졌던 한국농구가 심기일전하고 새로운 혁신의 출발선에 섰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추일승감독 필리핀농구 농구대표팀 라건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