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배우 이기우 인터뷰 이미지

ⓒ 네버다이 ENT

 

견딜 수 없이 촌스러운 삼남매의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운 행복 소생기를 그린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6.7%(닐슨코리아 유료가구 플랫폼)이라는 준수한 시청률과 함께 유종의 미를 거뒀다. 경기도 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산포시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매일 서울로 출퇴근을 하느라 하루 서너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인물들의 공허한 일상을 현실감 있게 보여주면서 많은 이들의 연민과 공감을 얻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이기우는 염미정(염지원 분)의 직장 동료이자 기정(이엘 분)과 잔잔한 로맨스를 그려나가는 '싱글 워킹 대디' 조태훈으로 분했다. 지난 5월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모처에서 이기우를 만났다. 

그는 작품의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시청자들로부터 사랑 받을 작품인 걸 예상했었다며 "사람 냄새가 났다"고 회상했다. 드라마 속 "이빨 하나하나에 '못됐음, 못됐음'이라고 쓰여있다"는 대사를 인용하며, "글자 하나하나에 '친절함, 착함'이 쓰여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분명히 평면으로 된 텍스트를 읽고 있을 뿐인데 입체적으로 눈앞에 그려지더라. 심지어 (글에) 냄새가 다양해서, 대본을 안 쉬고 후룩 읽었다. 전체적으로 대본의 느낌이 구체적이었다. 쉽고 재미있게 읽혔다. 그게 박해영 작가님의 매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에 대한 냄새가 나는 대본이었고, 재벌 2세의 러브스토리나 자수성가한 영웅 이야기가 아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와 닿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본을 처음 읽을 때 뒷페이지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입장인데도 (극 중 인물들과) 친한 느낌이 들었다. 텍스트가 착했다. 드라마 속 대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빨 하나하나에 못됐음이라고 쓰여있다는 것처럼, 글자 하나하나에도 '친절함, 착함'이 쓰여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극 중에서 조태훈은 아내와의 이혼 후, 딸 유림(강주하 분)을 누나들의 도움으로 키우면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누나 가게와 집, 회사를 오가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 지친 그는 감정을 드러내기 보다는 꾹꾹 눌러담는다. 자꾸만 신경 쓰이고 눈길이 가는 염기정에게도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이기우는 감정을 숨기는 조태훈을 연기하면서 고민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조태훈이 말이 없지 않나. 자기 의견을 표현할 방법이 표정 밖에 없었다. 짧은 말로 표현해야할 때 되게 어려웠다. 감독님도 '조태훈은 일단 표현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절제하고 표현하지 않고 지켜본다는 느낌으로 가자고 하셨는데, 배우 입장에선 내 캐릭터를 설명하고 싶은 욕심도 있어서 처음에는 어려웠다. 조태훈은 싱글대디, 이혼남이라는 프레임 안에 스스로 갇혀 살기를 허용한 캐릭터다. 그런 것들을 표현하는 것도 어려웠던 것 같다."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배우 이기우 인터뷰 이미지

ⓒ 네버다이 ENT

 
드라마 말미에 결국 조태훈은 꾸준히 애정을 보여주는 염기정과 따뜻한 로맨스를 완성한다. 두 사람의 잔잔한 멜로 스토리에 열광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이기우는 염기정의 마음을 외면하는 신에서 주변 지인들에게도 짓궂은 타박을 듣기도 했단다. 시청자들의 반응도 확인하고 있었다는 그는 "'기정이 매력적인 여자인데 왜 받아주지 않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 그 마음은 고마워도 태훈은 표현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딸도 있었고 누나들도 있지 않나"라고 조태훈의 마음을 적극 해명했다. 이어 이기우는 조태훈을 최대한 건조하게 표현하려 했다고 부연했다.

"태훈은 '상대방을 헷갈리게 하면 안 된다'는 프레임을 스스로 씌웠던 것 같다. 그런 걸 연기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감독님이랑 굉장히 얘기를 많이 했다. LP판을 전달받았던 신에서 태훈은 (기정의 마음을) 진짜 몰랐을 것이다. OST도 '설레네요'가 깔리다가 없어지지 않나. (웃음) 태훈도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뒤에 짊어진 환경 때문에 표현을 못하는 인물이다. 그걸 표정으로 항상 건조하게 보여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다. 그래도 엔딩 즈음에는 초반부와 비교하면 태훈의 색과 온도가 많이 달라졌다."

이기우는 표현을 절제하는 조태훈 대신 염기정과 조경선(정수영 분) 등 주변인물들이 캐릭터를 많이 채워줬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현장에서도 배우들의 도움을 많이 얻은 덕분에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말 장난도 하고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했다. 이엘씨와는 또래이기도 하고 동물도 좋아하더라. 그래서 카메라가 돌지 않을 때는 거의 친구처럼 지냈다. 그리고 카메라가 돌면 완벽하게 기정으로 변해주니까, 저도 캐릭터를 잡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 조경선은 사실 적당히 미워보이려고 하는 게 배우의 보호본능일 수도 있는데 너무 과감하게 (미운 연기를) 잘해줬다. 태훈이 100마디 표현할 걸 10마디밖에 못하는 인물이니까, 주변인물이 그 90을 채워준거다. 제가 주어진 10%의 대사만 가지고 태훈을 표현하라고 했다면 보이지 않는 존재였을 수도 있다. 다들 너무 잘해줘서 감사한 마음이었다."

'해방'은 <나의 해방일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였다. 극 중에서 조태훈을 비롯한 인물들은 억압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마음으로 '해방클럽'을 만들기도 하지만, 마지막까지 완전한 해방을 찾지는 못한다. 다만 좀 더 편안해진 모습으로 엔딩을 맞이한다. 이기우는 최근 미국 여행을 다녀와서 자신만의 해방구를 찾았다고 고백했다.

"연예인은 남들이 볼 땐 화려한 옷을 입는 직업이니까, 그걸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는 나름의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경제적인 것들로부터 해방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최근에는 해방구를 찾은 기분이다. 얼마 전 한 달 넘게 미국 여행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작은 행복을 자주 접하려고 노력하는 삶의 태도 자체가 제게는 좋은 해방구인 것 같다."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배우 이기우 인터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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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재벌 3세, 건축사무소 소장, 백화점 팀장 등 세련되고 멋있는 역할을 주로 맡아왔던 그는 단정하고 정제된 이미지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바람도 전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이민기가 연기한 염창희 역할의 자유로움이 많이 부러웠단다.

그는 "제게 주어지는 역할에 비해 실제의 저는 동네 형 같고 소박한 사람이다. 그런 역할이 더 제게 맞는 옷같고 현장에서도 편하게 느끼는 것 같다. 극 중에서 염창희를 '다말증 환자'라고 말하지 않나, 그런 캐릭터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급스러운 양복 보다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헐렁한 연기를 하는 게 더 많은 걸 보여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3년 영화 <클래식>으로 데뷔한 이기우는 올해로 정확히 20년 차 배우가 됐다. 그는 이번 작품에 임하면서 "20년을 지나는 시점에 뚜렷한 이정표를 만난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20'이라는 숫자에 쑥스러워 하면서도 그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처럼 노심초사 했던 것 같은데, 함께 출발선상에 있었던 친구들을 돌이켜 보면 지금도 현장에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그동안 그래도 열심히 해왔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열심히 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소회를 전했다.

"<해방일지>를 촬영하고 나서 제 연기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다고 10년 뒤에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작품으로, 연기로 깨달은 것 이외에도 인간적으로 얻어온 게 너무 많았다. 어떤 어른이 멋있는 어른인지도 많이 배웠고 그게 저한테 분명히 큰 자양분이 될 것 같다. 그동안 '나는 왜'라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던졌던 것 같다. 20년 연기 생활을 했다고 해서 꼭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연기하고 싶다. 스스로를 다그치지 말자. 작품에 대한 고민은 철저하게 하되, 건강하게 연기하자. 나이도 먹고 연기 경력이 쌓이면서 철이 든 게 아닌가 싶다."
해방일지 이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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