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 양> 포스터

영화 <애프터 양> 포스터 ⓒ ㈜왓챠

 
영화가 시작된다. 아늑한 숲에서 한 가족이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중이다. 백인 아빠. 흑인 엄마, 동양계 딸이다. 한 명이 더 있다. 그들을 카메라 프레임 안에 담고 있던 누군가다. 가족은 그를 '양'이라 부르며 얼른 와서 사진을 함께 찍자고 거듭 권한다. '양'이 예약 촬영을 설정 후 넷은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다. '찰칵!' 상하가 반전되면서 촬영이 끝난다.
 
화면이 바뀐다.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에 한데 모인 이들 가족은 매월 열리는 증강현실을 활용한 4인 가족 댄스 시합을 준비한다. 5팀의 각기 다른 인종과 성별 구성을 가진 가족이 서로 뚜렷하게 대비되는 색상과 디자인 복색으로 화면에 등장한다. 음성으로 지시되는 댄스 요건에 맞춰 즉석에서 합을 맞춰가며 다양한 동작을 선보이며 평가를 받는다. 동시에 3만 가구가 접속한 댄스 경연에서 이들 가족은 꽤 오래 버티다가 탈락한다. 그 순간 화면에 영화의 제목이 큼직하게 아로새겨진다. "애프터 양". 증강현실 표현을 위해 사이버펑크 풍의 조명과 디자인을 선보이던 화면은 이제 근 미래 주택 풍경으로 돌아와 있다. 결과는 아쉽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해본 것 중 가장 오래 남아 있었다며 그들은 자축한다.
 
백인 남편과 흑인 아내, 동아시아계 딸로 이뤄진 가족에 포함된 또 하나의 식구. "양"이란 이름을 가진 그는 중국에서 입양된 딸의 가족 내 적응을 돕고 중국계 혈통의 정체성을 가르치는 오빠이자 교사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 중이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메타버스 댄스 시합은 그들의 절묘한 팀워크가 완벽하진 않아도 보통의 가족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란 것을 (그리고 현란하게 구현된 비주얼을 통해 영화 속 배경이 미래란 사실을 주지시키며) 상징적으로 각인해낸다.
 
하지만 그 직후 사건이 발생한다. 양이 말 그대로 '정지'해버린 것이다. 이제 그의 정체가 관객들에게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한다. 양은 외형은 완벽한 아시아계 남성의 형상이지만 사실은 가족이 구입한 "문화 테크노", 즉 안드로이드였던 것이다. 그의 내부는 기계이지만 겉은 인간과 동일한 유기체로 이뤄져 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주역인 T-800 모델과 유사한 개념이다.) "문화 테크노"는 단순노동이 아니라 고도의 학습과 사고 체계를 수행해야 하는 미션 때문에 무척 고가에 거래된다. 그래서 맞벌이하는 제이크 가족은 정품이 아니라 며칠 잠깐 사용했다는 리퍼 제품으로 양을 구매했었다. 그게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양을 구입했던 대리점은 사라져 버린 상태. 제조사 AS센터에서는 수리 규정 외 문제라며 신품 구입이나 재활용을 권한다. 양의 특성상 기능 정지 상태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인간의 사체처럼 부패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상황. 시간은 점점 흘러가는데 딸 미카의 정서도 점점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제이크와 키라는 머리를 싸매지만 그저 양을 대체할 다른 무엇인가를 사온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데는 뜻을 모은다.
 
가족은 쉽게 대안을 정하지 못하고, 미카는 '오빠'를 빨리 낫게 해달라고 부모에게 계속 매달린다. 아빠 제이크는 사방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양을 수리할 방도를 찾는다. 이후 많은 일이 일어난다. 그 와중에 이들 가족이 모르고 있던 양에 대한 비밀스러운 것들이 차례로 밝혀진다.
 
선배들의 성취를 열정적으로 흡수하다
 
 영화 <애프터 양> 스틸

영화 <애프터 양> 스틸 ⓒ ㈜왓챠

 
<애프터 양>을 연출한 한국계 미국감독 코고나다는 2017년 작업한 장편 데뷔작 <콜럼버스>로 로스앤젤레스 아시안퍼시픽 영화제와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는 등 작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본 작품은 현재 왓챠에서 서비스 중이다) <콜럼버스>는 미국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로 불리는 소도시 콜럼버스에서 한국계 남성과 토박이 여성 간에 벌어지는 늦여름 찰나의 에피소드를 다뤘다. 공간적 특성과 인종 간 로맨스를 접목한 작품성으로 국내에도 입소문을 탔다.
 
하지만 아무래도 코고나다 감독의 인지도는 근래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애플 티비 대하드라마 <파친코> 공동 연출가라는 것이 큰 지분을 차지할 것이다. <파친코>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국내 관객에게 어필하게 된 <애프터 양>인 셈이지만, 본 작품은 데뷔작의 건축 + 로맨스 조합을 SF 코드를 전면 활용해 확장한 형태에 가깝다. 그의 작품들은 일관되게 환경에 의해 큰 영향을 받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또한 상당히 다른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로 평범한 이들이 경험하기 힘든 체험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타인과 접촉하고 관계성을 형성한다. 이민자로서 감독의 정체성과 고민을 이야기로 단순히 옮기기보단 확장하는 방식인 셈이다.
 
형식적으로만 따져보면 일단 영화는 무난하고 잔잔한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가족 드라마 형태를 취한다. SF 설정 역시 해당 장르를 즐겨보던 이들에겐 특별히 새로울 건 없는 익숙하고 전형적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 과학소설과 이를 기반에 둔 영상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이들이라면 <애프터 양>에서 수십 편의 연관목록을 금방 줄줄 열거할 법하다. 오마주와 클리셰가 교차하는 순간들은 관객에게 이해를 돕는 동시에 식상하게 느껴질 위험도 불러온다. 장르영화로서 파격적이거나 신선한 도전은 그리 많지 않다.
 
제목 그대로 영화는 양의 정지 혹은 죽음 이후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다. 양은 영화 극 초반을 제외하곤 내내 정지 상태로 말은커녕 움직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양은 그걸로 종결되고 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감독이 관객에게 시종일관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가 된다. 가족은 양을 추억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위험한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처음엔 정지되기 이전 (가족들과 행복했던 순간들 위주로) 양의 행적을 회상하고 기억을 공유하려는 시도였지만 그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던 양의 내면을 알게 되면서 화면 속 가족의 고심은 고스란히 바깥 관객들에게 옮겨지게 된다.
 
영화는 신예 감독 특유의 패기나 과욕과는 담을 쌓은 듯 분위기다. 비범함과 파격을 뽐내려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전하고픈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심지를 굳게 하되 모나지 않는 형태로 관객에게 스며들듯 접근하려는 태도를 선보인다. 감독은 영화 한편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는 위력시위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 대신 감독은 지독히 모범생다운 학구열로 선배들이 선보였던 장르 물의 설정과 법칙, 장치들을 꼼꼼히 선별해낸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요소들만 추출 후 정교하게 조합해 재구성하는 위업에 도전한다. 감독의 성실한 태도로 완성된 결코 작지 않은 야심은 상당히 성공적인 형태로 세상에 드러났다.
 
'이름을 불러주는 자', 부활하다
 
 영화 <애프터 양> 스틸

영화 <애프터 양> 스틸 ⓒ ㈜왓챠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 <유년기의 끝> <라마와의 랑데부> 등의 걸작을 남긴 SF 소설가이자 미래학자 아서 클라크가 말했던 것처럼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현재와 작품 속 배경의 간격이 멀수록 SF 장르라도 점점 판타지로 변한다. 굳이 시간 간격 뿐 아니라 원거리가 될수록 더 비/초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마련인 것처럼. 반면에 근 미래를 배경으로 설정하게 될 때는 고증의 난이도, 현재와의 기시감 등으로 인한 풍자의 성격이 한층 더 짙게 추가된다. (둘 다 제대로 만들기란 만만치 않다.) <애프터 양>은 후자의 사례 전형에 가깝기에 관련 난이도도 함께 공유한다.
 
양은 영화에서 "테크노"라는 명칭으로 호명된다. 대개 안드로이드, 혹은 로봇으로 불리게 마련인 관련 장르에서 생소한 이 명칭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그 의미를 추적하는 것은 영화를 소화하는데 첩경이다. 특별히 명칭을 붙였다면 그 이름에는 구분을 위한 개별성을 넘어 표상하는 차원의 개념이 녹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양의 공식 명칭은 "문화+테크노"인데, 앞부분의 "문화"는 관객에게도 금방 이해가 될 대목이다. 양의 역할은 자신이 입양아임을 철이 들자마자 알게 될 미카가 백인 아버지 제이크와 흑인 어머니 키라와 가족 공동체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양은 미카에게 자신의 기원이 되는 문화 정체성을 학습시키고 동시에 정서적 의지가 되는 '오빠'로서 기능해야 한다. 양부모가 모두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공적 교사 + 사적 (의사)가족 형태를 둘 다 맡게 된 것이다. 혼란에 빠지기 쉬운 입양아에게 출생의 비밀과 함께 가족의 안정성에 익숙해지도록 '연착륙'의 관제를 맡은 셈이다. 이런 지극히 '인간적'인 역할을 로봇이 맡는다는 것부터 <애프터 양>이 고전의 요소들을 '활용'하지만 '답습'하진 않는다는 자세를 짐작케 만든다.
 
앞부분에 담긴 의미도 은근히 평범하지 않지만, 뒷부분의 "테크노"는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 어원은 바로 "테크노크라트" 혹은 "노멘클라투라"라는 개념의 기원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개념에 대해 궁금하다면 검색만 해봐도 잔뜩 나온다. 특히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잘 설명된다)
 
고대 로마는 공화정으로 운영되었다. 그렇기에 선거를 통해 공직자를 선출해야 했다. 정치가를 지망하는 이들은 공공건축을 후원하고 자기 이름을 붙이거나, 자주 잔치를 열어 선거구 주민들에게 인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이 당시에는 가난한 이들이 (동사무소 대신) 유력자에게 민원을 청탁하거나 식사를 제공받는 게 당연시되었다. 그래서 늘 유력자들은 지역구 관리에 바빴다. 오늘날의 지역구 의원 사무실+지역 주민 센터와 같은 기능을 개인이 수행한 셈이다.
 
이 숙제를 감당하기 위해 당연히 비서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 비서는 노예가 맡았다. 로마 시대 노예의 직책 중 하나로 '노멘클라토르'라는 게 있었는데 그 뜻은 '이름을 불러주는 자'다. 거리를 걷다가 자신에게 인사하고 청탁하려는 이웃 주민이 다가오면 재빨리 주인에게 이름과 간단한 인적사항을 알려주는 일을 맡았다. 사교와 인맥 쌓기를 위해 유력자들이 자주 열던 연회 때도 초청한 손님들이 도착할 때마다 주인에게 이름과 직책을 알려주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노예 신분이라 해도 우대를 받았고 함부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인이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측근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노예 중에는 가정교사가 이들과 비슷한 지위와 처우를 누렸다. 가정교사가 노예였다니 당황스러울 테다. 하지만 이 노예 교사는 주인집 아들이 게으름을 부리면 체벌까지 가능한 '노예'였고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존재였다. 대개 그리스에서 학식 갖춘 이들이 전쟁포로 등으로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주는 자'들은 심지어 후손들이 유력 정치가이자 황제의 심복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면서 주인과 노예의 처지가 역전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이 특수한 집단은 훗날 전문 관료를 뜻하는 명칭으로 계승되었고, 소련 시절에는 '당 간부' 계층을 호명하는 용어로 자리매김했다.
 
'테크노크라트'도 여기에서 기원되지만 특히 소련의 '노멘클라투라'를 언급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소련의 최고 권력자는 공산당의 '서기장'이었다. 말 그대로 서기들의 대표인 것이다. 거대한 당과 정부 체제에서 복잡한 당 조직과 기구 체계를 분류하고 간부 명단을 숙지해 관리하는 것은 권력을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실제 업무를 처리하거나 생산하지 않는 서기국이 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것이다. 그 요체는 세력균형과 파벌 분포가 숨어 있는 '명단'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애프터 양>에서 양이 속하는 집단은 바로 노예 대신에 그 역할을 책임지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영화 <애프터 양> 스틸

영화 <애프터 양> 스틸 ⓒ ㈜왓챠


공상과학 장르에서는 대개 로봇이 발전하면 인간의 노동 수요를 대신하는 것으로 그려지게 마련이다. 근래까지 기계와 인간의 반목과 대립은 주로 이런 측면을 다뤄왔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로봇이 고도화된다면 기존에 '인간적인 것'들이라 단정했던 영역까지 넘보게 될 것은 자명하다. 현재 인공지능이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들의 일상에 침범하고 개입하는 게 급속도로 심화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애프터 양> 속에서 그려지는 돌봄 케어 분야가 로봇에게 맡겨지는 게 그리 낯설지도 않은 문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이제껏 인간의 전유물이라 단정해 왔던 것들을 로봇에게 공유시켜야 한다. <애프터 양>에선 그런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상태로 설정하고 있지만, 후반에 제이크가 찾아간 연구소 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사회적 논란이 작지 않았으며 누군가는 공권력이 규정한 제어를 벗어나고 싶은 금단의 유혹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로봇의 기능을 일정부분 제한하고 이를 기업의 '정품' 관리로 제어한다는 게 온전히 작동되기 어렵다는 것도 은연중에 내비친다. 결국 제이크는 온갖 경로를 통해 금단의 진실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영화 소개에서 공개된 정보 외에 영화는 후반부에 절반 이상의 쟁점과 생각할 거리를 감춰두고 있다. 하지만 세세한 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한 후의 몫으로 남겨두려 한다. 다만 이 영화가 그저 장르 선배들의 성취를 복제하는 게 아니라 계승하고 심화시키는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는 점은 영화 후반부에서 명백히 확인 가능할 것이다.
 
의미심장한 장면이 둘 있다. 영화 도입부, 가족사진 촬영 후 댄스경연 이전에 제이크가 등장하는 짧은 장면이 첫 번째다. 그는 차를 판매하는 일을 한다. 미래시대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마치 구도심 오래된 골동품 가게 같은 지하의 공간에서 제이크는 손님과 상담 중이다. 그런데 손님이 찾는 품목은 그의 가게에 구비되어 있지 않다. 손님은 그것도 없으면서 차를 판매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짜증을 낸다. 제이크는 비슷한 대체품을 준비해드릴 수 있다고 하지만 손님은 싸늘하게 거절하며 나가버린다.
 
차에 관련된 장면은 중반부에 다시 등장한다. 이번엔 제이크와 '생전' 양이 대화하고 있는 과거회상이다. 제이크는 가업으로 차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제이크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차를 마시며 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양은 자신이 차에 대한 지식을 데이터로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 감성적으로 차를 마신 소감을 말할 수 없다며 씁쓸하게 웃는다. 양이 가진 차에 대한 지식은 미카에게 고향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졌을 테다. 하지만 그 지식은 이식된 것이기에 양은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그리고 자신만의 온전한 '기억'을 추구한다. 양의 시간은 인간의 그것과는 궤적 자체가 달랐다.(영화를 보고나면 이해할 것이다) 영화의 핵심적인 복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시퀀스들이다.
 
누군가는 <애프터 양>에서 스필버그의 < A.I >를, 다른 누군가는 로빈 윌리엄스의 <바이센테니얼 맨>을, 또 누군가는 <블레이드 러너>를 떠올릴 테다. 이 영화는 위대한 SF 장르 선배들의 전통을 효과적으로 차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빤한 베끼기는 아니다. 감독은 거기에 더해 자신의 소수자 정체성과 다문화가정의 이야기를 녹여낸다. 이는 자신이 피부로 느끼는 현대 미국 사회의 문제와 직결된다. 정치적인 주제의식을 드러내지 않지만 예술가로서 자신의 사유를 영화라는 캔버스에 그려내는 '개입'의 시도다. 그 일련의 결합작업을 능숙하게 수행한 덕분에 영화는 정치적 쟁점을 소리 높여 외치지 않으면서도 은유와 상징으로 감독의 입장과 소신을 '부드러운 직선'으로 풀어낸다. 말은 쉽지만 도달하긴 어려운 경지다. 그런 감독의 이후 작업이 기대될 뿐이다.
 
에테르의 하늘과 바다를 지나 마침내 하모니를 완성하는 기억의 모험
 
 영화 <애프터 양> 스틸

영화 <애프터 양> 스틸 ⓒ ㈜왓챠

 
수많은 고전 과학소설과 SF 명작영화들의 발자취를 꼼꼼히 되짚어내면서 <애프터 양>은 대단원의 결말로 나아간다. 모든 게 끝나고 막을 내리는 순간. 달콤하고도 쌉쌀한 멜로디가 귓가에 영화의 여운을 속삭이듯 불어넣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어본 듯,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듯 익숙한 곡조다. 생각의 회로를 마구 돌려본다. 왜 이렇게 친숙하지? 대체 이 곡은 뭘까?
 
'유레카!' 국내에서도 한 세대에게 청춘의 영원한 송가로 자리매김했던, 이와이 슌지의 "블랙 이와이" 세계관 결정판, 2001년 작품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대미를 장식하던 바로 그 곡, 사류(Salyu)의 "글라이드 Glide"가 가수 미츠키(Mitski)의 목소리로 리메이크되어 양의 기억을 간직해 달라며 아련함의 미로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던 것이다. 같은 곡이지만 두 영화에 담긴 정서와 세계관이 대비되듯 편곡이 변주되어 다른 결로 다가온다.
 
"나는 되고 싶어. 멜로디가 되고 싶어... 나는 되고 싶어. 하늘이... 바다가..." 반복되는 후렴은 제발 잊히고 싶지 않다는, 부디 잊지 말아 달라는 간절함을 담아 귓가에서 뇌리로 스며든다. 카렐 차페크의 <로봇> 속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필립 K. 딕과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의 "로이 배티", 스티븐 스필버그의 < A.I. > 속 "데이비드", 아이작 아시모프와 크리스 콜럼버스가 창조한 <바이센테니얼 맨> 안 "앤드류 마틴"이 불현 듯 등장한다.
 
그렇게 과학소설/영화 속 100년의 역사 동안 등장했던 존재들, 인간과 로봇의 경계란 무엇인지, 무엇이 인간을 규정하는지, 끊임없는 질문을 거듭하게 만들었던 피조물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으로부터 20년이 흘러 새로운 주제의식과 배경으로, 하지만 그 갈망과 체념의 시린 정서는 온전하게 '에테르'를 통해 전달된 영화의 시간이 저물어간다. 하지만 관객의 머릿속 사색은 이제부터 '막이 오른다.'
애프터 양 코고나다 감독 콜린 파렐 저스틴 민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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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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