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한 회식자리,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그 자리가 불편한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분명 겉으로는 그 자리에서 잘 어울리고 있지만, 무언가 어색하고 물에 뜬 기름 같은 느낌, 그걸 애써 감추며 시간이 흘러가길 기다리다 "저 막차 시간이 돼서 먼저 일어서겠습니다"라면서 일어섰다.

그때 누군가 "그냥 서울로 이사오지 그래?"라는 말을 무심히 흘린다. "서울 집값이 비싸서요"라며 핑계를 댔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구구절절 무언가 설명하기엔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는 순간이다. 그냥 웃으며 일어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회식자리에서 늘 반복되던 그림이었다.

딱히 상사가 권위적이지 않아도, 동료들이 싫지 않아도, 그렇게 사람 많은 자리는 뭔가 늘 피곤하고 피하고 싶었다. 관계가 힘든 사람에게 사람 많고 떠들썩한 자리는 힘든 법이니까.

오늘도, 내일도 변할 것 같지 않은 일상
 
 나는 막차를 핑계로 늘 먼저 일어서는 사람이었다.

나는 막차를 핑계로 늘 먼저 일어서는 사람이었다. ⓒ tvN <나의 해방일지> 한장면

 
그런 장면을 최근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마주쳤다. 드라마 속 주인공 염미정(김지원 분)은 서울에서 산포시라는 경기도 수원 근처에 위치한 집까지 출퇴근을 한다. 사회생활을 성실하게 반복하며 지내지만, 회사에서 승승장구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말썽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염미정은 적당히 친한 관계 속에서 외롭게 살아간다. 동료들과 밥을 같이 먹고, 커피도 같이 마시며, 적당히 소통하지만 여행을 같이 갈 정도로 친하지는 않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변할 것 같지 않은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 염미정에게는 언니 염기정(이엘 분)과 오빠 염창희(이민기 분)가 있다. 그들도 역시 염미정과 같이 서울로 출퇴근을 하지만, 염미정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상황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오빠 염창희는 아버지에게 전기차를 사서 출퇴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차가 없으면 어떻게 연애하고 키스 하냐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언니 염기정은 사랑에 목마르니 아무나 사랑하겠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모두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욕망과 다른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반면 염미정은 현재가 좋지는 않지만, 큰 욕망도 없다. 그래서 현재에 머문다.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산 넘고 물 건너 회사까지 매일 출근한다. 주말엔 부모님을 도와 밭일을 하지만 불평 한마디 없다. 주말마다 외출로 도망치는 언니, 늑장부리는 오빠와 달리 한여름 뙤약볕에서 땀을 흘려가며 묵묵히 밭일을 돕는다.

지쳐가는 현실 때문에 퇴근 후 카페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울먹이는 인간형이 바로 나였다. 내가 주인공 염미정에게 감정이입 되었던 장면은 동네에서 언니 오빠와 술 마시며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오빠 창희가 여자 친구와 싸우면서 했던 이야기를 전한다. 경기도는 계란 흰자,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같다고, 하고 많은 동네 중에 왜 계란 흰자에 태어났는지 한탄하는 말에 미정이 묻는다.

"서울에 살았으면 우리 달랐어?"
"달랐어."
"난 어디에 사나 똑같을 것 같은데. 어디 사나 이랬을 것 같애."

 
 서울에 살았어도 다르지 않았을 삶, 그래서 경기도에서 이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서울에 살았어도 다르지 않았을 삶, 그래서 경기도에서 이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 tvN <나의 해방일지> 한장면

 
그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 나에게 경기도에서 왜 회사 근처로 이사오지 않느냐고 했을 때, 서울 집값이 비싸다든가,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건 정말 핑계였다. 회사 근처로 이사를 가도 내 삶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왕복 출퇴근 4시간이 2시간으로 줄어든다고 해도 출퇴근은 여전히 싫을 것이고, 나는 회사에서 여전히 수긍하는 인간형으로 살 것이라는 느낌말이다. 나의 욕망은 출퇴근 시간에 있지 않았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힘들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 안에서 조언을 해 주었다. 회사에서는 당연히 집을 회사 근처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반응이었고, 회사 밖을 벗어나면 집 근처 회사로 이직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회사 근처 집을 알아보기도 했고, 집 근처의 회사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선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울에 살고 싶은 욕망도 없었고, 구직사이트를 아무리 뒤져도 가고 싶은 회사도 없었다. 드라마 속의 염미정처럼 나는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할지 몰랐다.

그때 나는 내 삶에 수긍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돈을 벌어야 했고, 팍팍한 현실 사이에 숨어있는 행복을 애써서 찾아내야만 했던 시기였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가까운데 있는 것이라고 출근길에 남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정말 행복해질지도 모르니까. 나에게 행복은 느낌이 아니라 머리로 세뇌시키려 애쓰던 개념이었다.

사랑보단 추앙, '다르게 살아보기'의 시작

경기도와 서울의 거리는 가깝지만 멀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가깝다고 느껴지지만 매일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먼 거리다. 이 거리는 주인공 염미정이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심리적 거리이기도 하다. 가깝지만 먼 사람들, 매일 부딪치고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하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들. 마치 경기도와 서울 같다.

드라마에는 염미정처럼 관계에 힘들어하는 등장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한다. 바로 구씨(손석구 분)라고 불리는 남자.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한 이 사람은 어느 날 산포시로 들어와서 이름도 말하지 않고 사람들과 관계도 맺지 않으면서 술만 마시며 생활한다. 무언가를 견디고 잊으려는 듯. 주인공 염미정은 그런 구씨를 알아본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든 사람, 그래서 스스로 고독의 성을 쌓는 사람.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다가선다. 염미정은 구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라고 말한다.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곧 겨울이 올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해야 한다는 염미정의 대사가 콕 박혔다. 거기에 추앙이라니. 어렴풋이 알지만,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이 단어의 의미가 더욱 생소하게 느껴져서 염미정의 대화를 곱씹게 되었다.

추앙은 사전적 의미로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이라는 뜻이다. 사랑은 주고받는 관계이지만, 추앙은 맹목적이다. 사랑은 관계에서 발생되지만, 추앙은 존재에서 발생된다. 어떤 점이 좋아서, 누군가의 관계 때문에 좋아하기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좋아하고 응원해주는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 그래야만 자신이 충분히 충족될 것 같은 마음, 그런 염미정의 마음이 느껴져 뭉클했다.

미정은 해방클럽이라는 동호회를 만든다. 미정처럼 회사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으며, 동호회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과 모여서 만든 것이다. 그곳에서 미정은 해방되고 싶다고 말한다. 어디에 갇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뚫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넌 할 수 있어. 넌 뭐든 돼. 무조건 응원을 받으면 다음 계절엔 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넌 할 수 있어. 넌 뭐든 돼. 무조건 응원을 받으면 다음 계절엔 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 tvN <나의 해방일지> 한장면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혹시 그게 내가 점점 조용히 지쳐가는 이유 아닐까, 늘 혼자라는 느낌에 시달리고, 버려진 느낌에 시달리는 이유 아닐까. (...)이젠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요."

해방이 도피는 아니다. 미정은 순응하는 인간형에서 적극적으로 뚫고 나가는 사람으로 바뀌기를 갈망한다. 구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라던 염미정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어보기로 한다. 그런 사람을 만들면 자신의 인생도 진짜로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안 해 본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다.

미정의 독백과 시선을 쫓아가면서 그녀의 마음이 내 마음 같다고 느껴졌다. 묵묵히 순응하는 인간형에서 다르게 살아보기로 마음먹기까지 그녀가 거쳤을 수많은 번뇌를 생각했다. 구씨도 다르게 살기로 한 것 같다. 잘못내린 정거장이 아니라, 실수로 내린 정거장이 아니라 운명처럼 내려버린 정거장에서 염미정을 추앙하기로 한다.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나도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퇴사로 출퇴근 4시간에서는 벗어났지만, 뭔가 내 삶에서 해방의 순간을 맞이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염미정의 시선과 독백이 담겨있는 <나의 해방일지>를 추앙하기로 했다. 다음 계절엔 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혜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longmami) 및 브런치(https://brunch.co.kr/@longmami)에도 실립니다.
나의해방일지 방송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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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면서 프리랜서로 글쓰는 작가. 하루를 이틀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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