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평남녀"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평평남녀"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김수정 감독의 전작 <파란 입이 달린 얼굴>(2015 제작, 2018 개봉)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투병중인 엄마와 장애인인 오빠를 책임져야 하는 여성이 도시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해 벌이는 선악의 경계를 넘어서는 극한의 이야기였다. 한국독립영화에서 사각지대에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건 흔한 경우이지만 극장 개봉까지 진행한 장편 극영화가 설마 하는 관객의 안일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경우는 희귀하다. <파란 입이 달린 얼굴>은 그렇게 독한 면모를 가진 영화였다. 그런 감독의 신작이 이번에는 직장 로맨스의 외피를 한 채 나타났다. 이걸 진짜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고심 속에서 김수정 감독의 신작 <평평남녀>를 보았다.
 
1_신데렐라 이야기의 전형성에서 출발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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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평남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영화의 소재와 전개는 어디서 많이 본 듯, 아주 흔해빠진 이야기 소재처럼 전형적으로 출발한다. 꾸밈노동과는 백만 광년쯤 거리가 있어 뵈는 주인공 영진은 회사에서 독창적 기획 없이 주문 받은 제품 생산에 치중하는 (그래서 별로 주목받을 일도 없는) 디자인2팀을 혼자 짊어지다시피 불철주야 일하는 중증 워커홀릭으로 첫 등장한다. 33살 노처녀 신세 벗어나고자 결혼정보회사 프로필 사진 찍으러 갔다가도 업무 펑크 처리를 위해 공장으로 달려가던 중 지하철 역사 안에서 즉석사진을 찍는 걸로 결국 제출하고 마는 일상의 연속이다.
 
하지만 회사를 위해 그렇게 뼈 빠지게 일했건만 공석이던 2팀 과장 자리는 '낙하산' 준설의 차지가 된다. 디자인 업무의 'A‧B‧C'도 모르는 신임 과장 때문에 영진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남의 속도 모르고 준설은 부하직원들이 자기 대신에 따르는 영진과 기 싸움을 벌인다. 이거 너무 빤한 전개인데? 하던 참. 그러나 첫날 업무정보 수집을 위해 티격태격 속에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전형적인 21세기 신데렐라 또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짬뽕 스토리다. 자신에게 숨어있던 매력을 깨닫지 못하던 여주는 조건 좋지만 짝을 만나고 성장기에 겪은 열등감이나 상처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던 남주와 서로 상이한 환경 때문에 갈등을 겪어가면서도 결국 시련을 뚫고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는 사랑에 골인해야만 한다. <평평남녀>는 그런 식상할 대로 식상한, (직장생활 오피스 스토리는 그저 배경에 불과한) 판타지 연애사를 따라가는 척 하다 중반 이후 확 뒤집는 이야기를 선보이려 시도한다.
 
천편일률적인 주말드라마 격 이야기 전개 대신에 <평평남녀>가 택한 방식은 좀 더 현대 한국기업의 전형적 면모인 남녀차별 구도에 집중하는 작전이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내밀한 관계를 이어가지만 직장에선 라이벌 관계인 영진과 준설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둘 사이의 달콤한 꿈을 어떻게 현실로 되돌리는가에 대한 첨예한 묘사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랑이 다른 드라마에선 만병통치약 역할을 한다면, 이 영화에선 순간의 묘약과 길고 깊은 후유증을 불러오는 마약 같은 존재다.
 
<평평남녀>에서 로맨스는 모든 갈등과 쟁점을 블랙홀 마냥 송두리째 빨아들이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격의 종착점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재앙이 거길 거쳐 튀어나오는 판도라의 상자 노릇이다. 영진은 무진장 그동안 가슴 한 구석에 감춰왔던 평범한(!?) 여성의 삶을 가져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 주입된 행복은 결코 그녀에게 맞는 옷이 아니었던 것이다.
 
2_"하이퍼" 리얼리즘으로 구현된 오피스 브이로그의 만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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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평남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영화는 홍보 키워드로 '오피스 브이로그' + '비밀 사내연애' 이야기의 조합이라는 것을 어필하려는 듯 보인다. 비밀 사내연애 이야기는 두 주인공 간의 공적 업무와 사적 관계 사이의 타협할 수 없는 긴장관계에서 결정적 요소로 설정되긴 하지만, 타 작품의 코믹 멜로 색깔과는 좀 많이 상이한 코드로 활용된다. 막판에 슬쩍 둘 만의 숨겨왔던 연애 비밀이 다른 동료들에게 허물어지는 지경에도 극중 누구도 문제를 삼거나 놀라워하지 않는다. 꽤 특이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감초 같은 효과를 써먹는 익숙한 활용법에 전혀 미련이 없어 보이니.
 
영화는 오피스 브이로그를 표방하지만, 한국의 권위적/위계적 회사 내 환경과 조직문화를 겪어본 이들에게 작품 속 디자인 2팀 풍경은 판타지로 다가올 법하다. 아무리 낙하산 '빽'을 가진 '노답' 과장이라지만 뒤에서 조롱하거나 뒤 담화를 하면 했지 감히 정식회의에서 무시하거나 반론을 펴는 직장이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싶을 정도다. 오히려 초반 2팀 풍경은 신임 간부 길들이기에 고참 들이 담합하는 병영부조리 느낌에 가깝게 묘사된다. <평평남녀>가 선보이는 오피스 브이로그 풍경은 단순 리얼리즘적으로 본다면 비현실적인 면모가 짙다. 세상에 저런 회사가 어디 있어? 같은 즉자적 반응이 나오기 딱 좋다. (반면에 어찌 되었건 과장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권력이 기우는 묘사는 꽤 현실적이다)
 
그 대신에 영화를 오직 다큐멘터리 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상징-표현주의 방향으로 접근해 본다면 현실 비판 측면에서 <평평남녀>가 이야기하려는 바는 보다 또렷하게 다가온다. 영진의 도전과 좌절, 그로 인한 폭주는 한국의 기업문화가 여전히 전근대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여성 직장인 앞에 유리천장이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절절하게 구현해낸다. 영진은 어떻게든 일과 연애 둘을 다 포기하지 않으려 자신을 인간개조라도 할 각오로 도전한다. 그렇게 자신을 양보하려 해보지만 그럴수록 상대는 영진의 헌신을 당연한 듯 받으려할 뿐이다. 결국 자신의 열등감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한 채 사회적 성공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상대는 영진에게 대등한 파트너를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출세를 위한 현모양처의 내조를 그녀에게 기대하게 되는 역전현상이 벌어진다. 그런 배반감에 마침내 영진은 한계를 넘어버리게 된다.
 
그 감정의 분출로 이어지는 중반 이후 일련의 과정이 썩 매끄럽게 연결되는 것 같진 않다. 영화 중반에 함께 사는 언니 가족과 동반한 피크닉 부분의 경우 다른 영화라면 대개 주인공의 휴식이나 전환에 쓸모 있게 활용되지만, 이 영화에선 그저 잠깐 국면전환 대기시간에 불과해 보이는 느낌이다. 뜬금없는 '잠시 휴식' 시간처럼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전직 배우인 여성 택시기사의 구속되지 않는 삶의 태도는 이후 영진이 궁극적으로 선택하는 방향과 넓게는 통하는 구석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 순간을 전환점으로 둘이 결정적으로 충돌하기 직전 남녀 각자의 모습도 관습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성대결을 조성하기 위해 갈등을 강제 추출해 끝까지 몰아붙이는 방식이 아니다. 각자 나름의 노력과 고민을 적지 않게 기울였음에도 환경의 제약과 인습의 한계를 넘어서기란 (특히 한국남자들에겐) 무척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재료로 활용된다. 영진에게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깨닫게 하는 (작품 속에선 다소 희화화된 코드로 활용되지만) '까르띠에 1캐럿' 사건 역시 그로선 선의의 표현이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3_장렬한 패배와 사회적 몰락 이후 남겨진 건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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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평남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영화의 결론이 다소 과도하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형태이긴 하지만, 영진의 분노가 폭발하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비극의 순간은 그래서 더 강렬하다. 타협과 봉합으로라도 어떻게든 자신의 존엄과 가치를 지켜보려던,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는 걸 어느새 깨닫고 있던 영진의 모든 노력이 무산되자 그녀는 장렬한 자폭을 시도한다. 이미 권력의 추는 기울어졌고 '낙하산' 백그라운드를 등에 업은 상대가 현지상황 파악이 다 끝나고 (훔친) 실적까지 갖춘 상황에서 영진의 정의를 회복할 길은 사방이 막혀 있었던 셈이다.
 
그 절망의 순간 영진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상대를 향해 말 그대로 '육탄전'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 장절한 격돌의 순간은 시트콤 드라마의 '슬랩스틱'과는 차원이 다른 체험으로 관객을 이끈다. 물론 육탄전이라고 해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걸파이트>처럼 남녀가 펀치를 주고받는 스포츠의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처절한 Dog Fight의 찰나는 슬픔과 처연함을 물리적 에너지의 파열음과 함께 쉽게 잊히지 않을 기억으로 관객의 뇌리에 박힌다.
 
그 카타르시스의 찰나는 눈부시게 강렬하지만 금방 종결된다. 언제 그랬냐는 듯 육탄전이 벌여졌던 공간의 기억은 마치 장예모의 영화 <황후화>에서 수만의 군사가 제위를 둘러싼 쿠데타 결과로 황궁 마당을 피로 물들인 흔적이 내관들에 의해 공포감이 엄습할 만큼 순식간에 청소되던 장면 전환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워진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예상하던 종말이 도래한다. 그런 격전을 치렀는데 계급이 아래인 자가 무사할 리 없다. 그렇지만 회사의 노예도, 연애의 포로도 둘 다 내려놔버린 영진에겐 이제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도래한다.
 
4_감독의 인장이 새겨지고 배우의 얼굴이 각인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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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평남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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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평남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평평남녀>는 홍보 카피만 들여다본다면 김수정 감독의 전작과 120도 쯤 달라진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영화를 본고 나니 45도 이상은 방향 차이가 나지 않게 보인다. 영진은 준설과 다정하던 시간에 불쑥 가끔 자신에게서는 자기 것이 아닌 듯 흉측한 소리가 튀어나온다고 고백한다. 준설도, 그리고 관객도 영진의 말이 진짜 체험인지 그녀만의 망상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전작 <파란 입이 달린 얼굴>에서 잔혹한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추한 색으로 상징되는 파란 색깔로 물들어가던 주인공처럼 '슈퍼우먼'이 되길 강요당한 (그리고 정당한 보상은 받지 못하던) 피로와 중간관리자로서 겪어야 하는 양면전쟁은 영진 안에 오염되고 부패한 종양 같은 응어리를 곪게 했다 해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감독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모양새는 달라도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더럽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진은 (한국사회 불평등을 강화하는데 지대하게 공헌중인) 노력주의에 자기를 채찍질해가며 부질없는 도전을 되풀이하는 삶을 살아오던 중이다. 자신도 그것이 어렵다는 걸 깨달았을 텐데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 두렵거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엔 안주하게 되면서 서서히 소진되어가던 상태였음을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간파하게 된다.
 
영화 전반에 영진은 다른 우회로를 모색한다. 자신이 줄기차게 돌파하려 해왔던 유리천장을 정면 돌파하는 대신에 바보온달을 사람구실하게 보듬어가며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정작 열과 성을 다해 사람구실하게 만들어놓았건만, 배은망덕한 온달은 낙하산으로 내려왔던 방식 그대로 라이벌을 짓눌러 권력의 서열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영진의 절망적 항전은 이미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다. 그렇지만 철저한 깨짐을 겪어야만 미몽에서 벗어나 새로 출발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겐 애초 맞지 않다는 것을 터득했던) 고통스럽게 자신을 옭아매던 화장과 장신구를 벗어던진 끝에 영진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긴 했지만) 덧없는 회사 형 인간과 신데렐라 스토리 두 족쇄에서 모두 탈출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평평남녀>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영진 역을 맡은 이태경 배우라는 것은, 일단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테다. 단점이라면 영진이, 그리고 이태경 배우가 너무나 러블리하기 때문에 영화 전반에 찌들대로 찌든 직장인의 전형으로 형상화된 캐릭터에 집중되지 않는다는 문제다. 세상에 저렇게 사랑스러운데 왜 싱글인 거냐? 란 비명이 객석에서 들려올 법하다.
 
그런 초반 괴리감 문제가 좀 심각하긴 하지만, 애초부터 감독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직장 잔혹사를 굳이 정교하게 묘사할 의도가 없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연기력으로 이미 정평이 난, 연기 전에 이미 배역을 온전히 소화해내고 도착한다는 이태경 배우의 진가는 사랑에 빠진 한없이 달콤한 순간에 개화만발한 뒤 예정된 배반의 시간에 폭주기관차처럼 돌진한다. 그 장렬한 파멸에 이어지는 (사회적 통념상으로는) 몰락 이후 처연한 달관과 짓밟혀도 꺾이지 않는 풀 더미 같은 질긴 저력까지 종합선물세트 같은 연기력을 선보인다.
 
배우의 힘은 그런 다채로운 단면들을 모두 하나의 얼굴로 품어내는 위력을 작품 전체에 유감없이 발휘한다. 모두가 그녀를 마음 졸이며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끔. 비록 그 앞길이 망망대해에 조각배 하나 띄우는 격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랑에 의존하기보단 모든 걸 잃었다는 걸 인정한 채 새롭게 도전하는 영진의 슬픈 미소가 새벽녘 첫 햇살처럼 더 부드럽게 밝은 빛을 뿜어내는 인상적인 결말이다.
 
작품 정보

평평남녀 Unboxing Girl
2021|한국|드라마/로맨스/멜로
2022.04.28. 개봉|121분|12세 관람가
감독 김수정
주연 이태경(영진), 이한주(준설)
출연 이봄(하나), 김진홍(정민), 양흥주(준설 부)
우정 출연 박종환(모델하우스 남)
특별 출연 서갑숙(택시기사)
제작 브릿지 프로덕션, 냉이영화
배급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공동제공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
 
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아 판타스틱: 장편경쟁
12회 광주여성영화제 한국장편경쟁
23회 부산독립영화제 스펙트럼 부산
9회 바르셀로나아시아영화제 공식초청
 
평평남녀 파란 입이 달린 얼굴 김수정 감독 이태경 배우 이한주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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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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