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포스터 이미지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포스터 이미지 ⓒ 영화사 진진

 
1_율도국의 꿈, 파주에서 실현되는 과정을 담다
 

파주 출판도시라 불리는 곳은 첫 느낌이 퍽 특이한 동네다. 휴전선 접경 지역이자 서울에서는 한없이 북쪽 끝 변경으로 느껴지는 격오지. 하지만 생각보단 거리가 멀지 않은 곳. 이곳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 느낌은 참 넓다는 것. 서울의 번잡함에 익숙해진 이들이라면 휑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외부자로서의 입장에선 이국에 온 듯 고독해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이곳에서 일을 갖고 있거나 상당한 시간을 머물렀다면 꽤 달랐을 테다.
 
이곳의 공식명칭은 '파주출판문화정보국가산업단지'다. 국가산업단지와 출판이라니 뭔가 어색한 조합이지만 분명히 공식 산업단지가 맞다. 다른 산업단지와 이곳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 보이지만 그 규모나 집합성에서 어릴 적 배웠던 '콤비나트'의 어원과 비교해보면 얼추 어울리기도 한다. 오히려 출판+도시라는 조합이 곱씹어볼수록 더 기묘한 느낌으로 돌아온다.
 
영국 웨일즈의 한적한 시골에 위치한 헌책방 마을 헤이온와이, 그리고 이와 흡사한 형태의 유럽 곳곳 책 마을(프랑스의 몽튈리에, 네덜란드의 브레드보트, 벨기에의 레뒤 등등)은 관광객들 입소문과 관련 서적 출간으로 그 낭만적 인상과 함께 야금야금 국내에 알려졌지만, 산업단지 형태의 도시 규모로 건설된 경우는 아마 파주 출판도시가 유일하지 않을까. 책을 매개로 구성되고 유지되는 공간이지만 파주 출판도시의 규모와 기능은 분명히 유럽의 그곳들과는 상이하다. 전자가 고풍스러운 헌책방과 독립서점의 군집이라면 이곳은 미래지향적 계획도시의 형태다. 이름을 듣고 지나다녀봤지만 정작 파주 출판도시의 기원과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건축 관련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부부 공동감독은 전작 <이타미 준의 바다>에 이어 다음번 장편 프로젝트로 바로 그곳, 파주출판도시의 기원과 역사를 어마어마한 압축률로 담아낸 본 작품을 선보인다. 두 감독은 2008년에 비엔날레 전시용으로 관련 인터뷰 아카이빙 영상을 제작한 바 있고, 이 공간의 30년사를 기념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의뢰받아 10여 년 만에 재도전할 기회를 얻었다. 국내에선 보기 드물게 건축 영상을 전문으로 하는 감독들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영화에는 30년의 시간이 온전히 담겨질 수 있었다. 한 세대를 관통하는 장대한 과거 회고는 물론, 이제는 번듯한 소도시가 형성되고 지금도 계속 변이 혹은 진화중인 공간을 관객이 (미니어처 버전일지언정) 간접 체험하는 순간을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를 통해 만끽할 수 있다.
 
2_'위대한 계약'의 탄생설화를 엿보다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스틸 이미지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영화는 (원래 기획의도에 충실하게) 하나의 영상화된 역사 총서를 보는 듯하다. 시작과 함께 직지심경과 훈민정음, 규장각 등이 한국사 연표와 더불어 언급된다. 현존 세계 최고 오래된 금속활자, 우리 고유의 문자, 도서관의 기원들이 줄줄이 소개되는 건 출판의 가치와 존재감을 관객들에게 고취하려는 웅장한 선포식에 가깝다. 일제강점기 주시경 선생과 조선어학회의 의기와 사명감 또한 연상되는 순간들이 속속 이어진다.
 
곧이어 1970-1980년대 현대사가 등장할 시간이다. 독재와 맞선 민주화의 시대, 출판이 변혁을 꿈꾸는 사회운동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에 대한 역사서술이 진행된다. 언론탄압 과정에서 발생한 해직기자, 대학에서 자의반타의반 밀려나온 학자, 주류 제도권에서 소외된 문화예술인, 단체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출판업에 뛰어든 재야활동가들이 생계 해결 겸 활동범위 확대를 꿈꾸며 출판사를 차리거나 필자가 되던 이야기가 하나둘 소개된다. 엄혹한 정치적 시련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행동의 시간이 흐르고 출판사들은 민주화 열망과 경제호황 속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1990년대 초중반 정권의 문민화+건설경기 붐이란 변화를 포착한 몇 명의 출판인들이 일종의 '이데아' 건설을 도모한다. 1980년대 중후반 출판업은 호황을 맞았고, 출판에 사회운동 성격을 강하게 반영해왔던 진보적 출판인들이 등산모임 등으로 자주 어울리던 중 삼국지 제갈량의 융중대계를 방불케 하는 원대한 전망이 제시된다. 이어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 못지 않은 의기투합 후 그들은 꿈꿔왔던 책의 도시를 만들고자 당대의 의식 있는 건축가들과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군부대의 반대나 여러 구성원들 간 의견조율 문제 등 난제가 한가득 펼쳐졌지만 출판인과 건축가 집단은 '위대한 계약'을 상호 체결한다. IMF 구제금융 등 산 넘어 산 같은 산적한 숙제를 푸는 과정에서 위대한 계약이 아니라 '위험한 계약'이란 자조도 해봤지만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을 견뎌내고 출판운동의 정수를 꽃피운 것처럼 오랜 시간 협동을 유지하며 위대한 계약은 약속의 땅 파주 50만 평 가까운 습지대에 계획도시를 세워나간다.
 
영화와 영화를 만든 이들은 느릿느릿 더디더라도 우직하게 정공법으로 최대한 많은 내용을 관객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결의에 가득 차 보인다. 100분 전후 분량이라 물리적 상영시간이 요즘 극장 개봉영화 평균치로 따져보면 아주 긴 러닝타임은 아니다. 하지만 체감분량상의 문제는 좀 다른 편이다. 처음 듣고 보는 놀라운 일도 적지 않게 등장하고 흥미로운 지점들이 이 영화에는 아주 많은 편이긴 하지만, 작품의 진행속도는 느리고 관련업계 전문가나 종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온전히 다 소화하기도 쉽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지적 호기심이 충만하거나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에 평소 관심 있는 이라면 솔깃할 법한 정보가 한 가득이란 건 보증할 수 있다.
 
'위대한 계약'의 당사자들은 갖은 지혜와 노력을 짜내고 쉴 틈 없이 터지는 내부적 실수와 시행착오를 견뎌내며 꿈의 실현을 향해 나아간다. IMF 상황에도 미리 토지구입 자금을 대출에 의존하지 않고 차곡차곡 적립해둔 덕분에 오히려 형편이 더 좋아졌다는 전화위복 '운빨'을 회상하며 쓴웃음을 짓는 노 출판인의 회고는 실물경제 정공법을 밀고 나간 현자의 지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휴전선 접경지역이다 보니 건설과정에서 군부대의 반대를 돌파하기 위해 온갖 인맥과 지원을 가동한 이야기도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조명하는 '비화'의 향취를 물씬 풍긴다. 노태우 대통령의 200만호 신도시 건설계획이나 김영삼 대통령의 군 내 사조직 척결 같은 전혀 파주 출판도시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사건들이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살펴보는 과정은 그 자체로 역사 이야기보따리 역할로 다가온다.
 
물론 그런 숨은그림찾기가 본 작품의 본령은 아니다. 결국 주인공은 출판도시 그 자체이기에 어떤 고심과 중점을 갖고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만들어져 왔는지에 대한 고찰이 영화의 중심 골격을 구성한다. 앞선 지점들에서 국내 유수의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를 이끌어온 출판운동 원로세대들이 활약했다면 이제는 공공성을 중시해온 건축가들이 활약할 시간이다. 승효상, 김영준 등 출판도시 디자인 프로젝트의 1/2기를 총괄한 이들을 비롯해 국내외에서 참여했던 쟁쟁한 전문가들이 잔뜩 등장해 출판도시 디자인을 둘러싼 고민과 구상들을 하나둘 소개한다. 공동감독이 건축 영상 전공자들이기에 국내에서 정재은 감독의 건축 아카이브 연대기 정도 외에는 보기 드물던 다큐멘터리 장르의 매력을 마음껏 만끽할 기회이기도 하다.
 
건축가 집단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추진되었던 과거 계획도시의 실용적 측면 매몰(즉 고층화와 획일적 구조)을 벗어나려는 야심찬 기획을 추진한다. 세운상가 프로젝트 등 이전 대규모 건축들은 일면적으론 개발독재 시절에 가능했던 자원집중과 행정 지원을 통해 동 시기 사회주의 미래파 건축 프로젝트에 비견되는 독특한 면모를 선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산업화 시대의 전형에 머물렀다는 것을 반성하고 인문학적 가치와 공존의 철학을 담는 과정이 차례로 소개된다.
 
국내 유수의 출판사 대표들이 전설 같은 무용담을 푸는 동안 건축가들은 원래 목표했던 취지와 기준을 사수하기 위해 급속히 변화되던 출판도시 건설과정의 주변 조건을 견디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 파주 출판도시 프로젝트는 부동산 물신주의가 종교화된 한국사회에선 기적처럼 보일 만큼 건축주들이 하나의 원대한 청사진을 지켜내며 내부의 욕망을 억제해온 정말 휘귀한 사례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출판 산업에 뛰어들고 사회운동과 보조를 맞춰왔던 역전의 출판인들이 우직하게 끌고나간 덕에 '아주 특별한 실험'이 지속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화면에서 하나 둘 선보이는 출판도시의 건축들은 계획과 실행의 주역들이 상상했던 비전이 크게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구현되었다는 것을 관객에게 확인시킨다. 책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가슴 두근거릴 국내 대표적 출판사의 사옥과 출판도시의 '랜드-마크' 구조물들이 차례로 눈을 즐겁게 한다. 무조건 높게 더 높게, 무미건조하게 복사하듯 찍어내 만든 대도시 빌딩들만 늘 보다 (군부대 인근이라 높이 규제가 있는 걸 활용한) 도시 전체가 개성을 유지한 개별 건물들이 마치 거대한 물결처럼 조화를 이루는 풍경과 함께 개별 출판사 사옥 디자인에 얽힌 각자의 사연이 순차적으로 소개된다. 은근히 출판사의 비전과 건물의 모양새가 닮아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욕심 같아선 좀 더 하나하나 뜯어보면 너무나 매력적인 주요 건축물의 성과와 가치가 더 조명되었다면 좋겠다 싶지만 필자의 과욕일 테다. (아마 그렇게 만들었다면 본 작품은 미드처럼 시즌제가 되어야 했거나 단일작품이라면 반지의 제왕 급 상영시간으로 탄생했을 것이다) 연대기적 구성이다 보니 필연적 구성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텍스트 화면해설과 인터뷰 위주라는 점이 그래서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이미 작품 속에서 충분히 드러낸 정보량과 비주얼 이미지만 해도 한 번 봐서는 미처 눈으로 다 따라가기란 솔직히 쉽지 않다. 그런 엄청난 데이터 분량은 요즘처럼 긴 글 독해를 어려워하는 시절에 호오가 나뉠 만한 지점이기도 하다.
 
3_변화와 확장을 향한 도전의 시간은 계속된다!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스틸 이미지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영화는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1차로 터전을 닦던 시기에 대한 조명을 끝내고 파주 출판도시가 당면한 변화와 도전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초기 건설과정의 한계와 시행착오를 재조명하고 안타까움만 토로하는 것을 넘어 진단과 개선이 속속 진행된다. 그리고 출판도시에서 영역을 확장하려는 야심찬 2차 계획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도전 과정에서 출판도시는 영화와 예술까지 문화산업 전반을 아울러 포괄하려는 시도로 면모를 일신해나간다.
 
더불어 산업단지를 넘어 도시기능을 갖추기 위한 고민들도 추가된다. 주거문제나 교육 관련 기능 확충, 생태/환경 분야 접근에 대한 고민들이 속속 소개된다. 접경지대란 위치조건을 살려 통일과 평화 관련 남북교류 통로로서의 역할론도 슬쩍 얹어진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바람 잘 날은 없다. 2차, 3차로 입주하기 시작한 단위들과의 이견이나 갈등, 어느덧 1차 완공 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기에 유지보수 관련 이야기도 자연스레 섞여든다. 이 부분들은 파주 출판도시 프로젝트가 과거회고담을 넘어서 현재의 관객과 소통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일단 파주 출판도시는 제조업이 아닌 산업단지로 분류되는 특수한 유형이다. 산업단지로 허가받은 공간이다 보니 주거문제는 별개로 취급되었다. 퇴근하고 귀가하는 걸 전제로 하면 되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곳은 파주다. 실제 이곳을 왕래하는 이들이라면 '2200번 버스'란 이름만 들어도 삶의 애환이 절절히 전해질 테다. 도시의 형태로 기획되고 탄생했지만 이곳은 통상적인 퇴근시간이 지나면 적막강산이 된다. 주거단지 조성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허허벌판이던 이 구역에 일하러 와야 되는 출판노동자들을 수송하기 위해 출판사들은 셔틀버스를 자체적으로 운영해야 했다.
 
물론 현재는 2층 맨션단지와 행복주택단지가 건설되어 조금 나아졌다지만 출판사 대표들은 입을 모아 숙련된 경력자들이 파주로 이전하면서 대거 이직했던 고충을 토로한다. 여기에서 영화는 도시라는 공간이 구성요소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측면들과 함께 수도권 과밀화 현상에 대한 고찰까지 영역을 한껏 넓힌다. 작은 주거구역이 신설되었다지만 현재 한국 출판계의 과반 이상을 점유하는 거대한 신흥도시 출퇴근 인력을 수용하기엔 턱없이 모자라고 주거환경을 위한 인프라도 부족하다. 잠만 잘 수 있다고 주거권이 보장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조건을 돌파해 이주한 이들 역시 전형적 출판노동자보다는 다양한 전문가나 문화예술인들의 비중이 높아 보인다. 파주 출판도시의 유지와 지속성을 둘러싼 중요한 쟁점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출판을 넘어 문화산업 전반으로 도시의 기능과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좀 더 미래지향적이고 가시적 성과를 획득해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콘텐츠 산업에서 문학의 수많은 자원을 후발 문화장르인 영화/영상산업은 넘치도록 활용하는 중이다. 전성기를 지나 디지털 시대에 정체 혹은 쇠퇴를 겪고 있지만 여전히 거대한 잠재력과 원천을 보유한 출판계가 21세기 미래문화산업과 접속하려는 시도는 거대한 도전이다. 국내 유수의 영화제작사인 명필름 관계자들이 전하는 명필름 아트센터의 건립의의와 함께 충분한 가성비로 필요 공간을 확보하기 어렵던 영화산업의 상당수 시설 유치현황이 소개된다.
 
도시형성과 재생 과정에서 비산업적 요소가 차지하는 기능에 대해 근래 도시재생 관련분야에선 연구와 실험이 활발해지는 중이다. 파주 출판도시는 예술계의 이주를 적극 권장하고 이들과의 협업을 통한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도 진행 중이다. 융-복합이라는 현대 문화예술 경향이 출판도시 내에서 실행되는 셈이다. 혁신적 건축 실험의 장이 된 출판도시를 견학하러 순례하듯 방문하는 건축과 학생들은 물론, 작업실을 구하지 못한 디자이너와 미술가들이 속속 드넓은 파주의 대지로 기회를 찾아 모이는 중이다.
 
파주 출판도시는 초창기부터 인적이 드문 습지대를 가능한 보존하면서 도시 기능을 부여하려는 생태건축 요소를 반영하려는 고민을 진행해 왔다. 국내 토건산업 상식과는 정반대로 배치되는 일이다. 대규모 건축물에 방해가 되는 습지대는 무조건 갈아엎고 매립하는 게 출발이란 통념을 뛰어넘어 이 공간은 나지막하게 높이를 맞춘 개성 있는 건물들의 집합구획과 새들이 노니는 천변 습지대가 붙어 있는 모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이런 기본 설계는 개발로 토지 가격이 대폭 상승하는 가운데 내부적 반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지만 초동 주체들의 뚝심 덕에 견뎌낼 수 있었다는 증언이 연이어 소개된다. 건축가들로선 국내에서 거의 불가능한 축복받은 조건이었던 셈이다.
 
초반에 휴전선 접경 군부대 관리지역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파주 출판도시 성립에 많은 질곡이 되기도 했지만 건조물 높이 제한으로 인해 오밀조밀한 주변 환경과 조화로운 도시 형성에 순기능이 되어주기도 했었다. 이런 조건은 또한 향후 남북화해가 정착된다면 가장 북과 인접한 도시로서 파주 출판도시의 가능성을 무한히 상상하게 하는 출발이기도 하다. 또한 다양한 성장 동력을 고민하는 출판인들의 머릿속에서 통합과정에서 상당한 시간과 자원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여타 산업들에 비해 비교적 조속히 남북 협력이 가능한 출판 산업을 내세우는 정책적 고려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렇게 1970~1980년대 한국사회 민주화를 견인했던 사회운동가들이 투신한 출판업의 한 흐름이 파주 출판도시라는 공간에 결집해 다음 세대를 향한 꿈을 전하려 한다.
 
4_영화 외적인 한계까지 포괄하는 논의의 출발점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스틸 이미지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몽상처럼 느껴졌던 '책 도시'는 30년이 걸려 '위대한 계약'을 구현하는 데 상당부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서울 도심에 몰려 있던 국내 유수의 출판사와 인쇄 관련 시설의 과반이 파주 출판도시로 옮겨 거대한 순환계를 형성하고 있다. 교보문고, 영풍문고, YES24, 알라딘 같은 일반인들도 책을 구입할 때 거치게 되는 메이저 서점들의 물류창고가 모두 파주에 자리를 잡고 있고, 파주 출판도시의 기능적 중심으로 출판사들의 책이 최초로 보관되는 거대 물류센터 '북센'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출판도시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출판 산업의 침체와 함께 아직 완성되지 못한 도시의 한계 또한 영화에서 집중 조명되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이 진귀한 공간의 부정적 측면을 비평하는 취지로 탄생하지 않았다. 엄연히 30년간의 도전과 시도를 집대성한 아카이브 사료에 가까운 배경을 갖고 만들어진 작업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하기에 관객의 일부는 자연발생적으로 이 영화가 전부 보여주지 않은 Dark Side of the Moon, 즉 '달의 어두운 면'을 자발적으로 추적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모색하게 될 테다.
 
2200번 버스는 지금도 출근시간대 주요 정거장인 서울도시철도 합정역 인근 정류장에서 수십 미터의 줄을 단 채 대동맥처럼 서울과 파주를 잇고 있다. 초기에 운행되던 셔틀버스는 제도와 행정 규제 문제로 현재는 운행이 중단되었다(현재는 상당수 출판사가 교통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해진 출퇴근은 어찌 대중교통수단으로 해결하고 있다지만 물리적 거리를 초월하는 심리적 간격과 함께 생활권과 유리된 도시의 한계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관광명소이지만 도시 공동화가 진행되는 베니스와 유사한 문제다)
 
2200번 버스에 의존하는 출퇴근 문제는 출판노동과 노동자의 문제로 확장될 것이다. 서구에서 산업혁명 초창기에도 초기 사회주의나 개혁론자들 중심으로 노동자 주거나 복지 문제 고민이 함께 출발했던 역사적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도 파주 출판도시라는 프로젝트가 선보인 한국사회에선 별세계처럼 인식될 법한 미래지향적 고민에서 다수 노동자들의 삶이 미싱 링크로 남아 있다는 점은 고민이 진전되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출판업의 침체 혹은 정체와 함께 21세기 들어 한국사회 문제를 집약한 비정규직-불안정노동 분야에서 출판업계 노동문제는 크게 사건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빙산의 일각처럼 실재하는 요소다. 과거 출판업을 사회운동으로 고민했던 출판도시 건국세대와, 현재 허리와 저변을 이루는 출판노동자 세대는 상이한 경험과 조건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 세대 간 소통 단절과 공유경험의 부재는 여기에도 그늘을 드리울 테다. 과거 사회진보에 기여하는 활동가-지사적 자세로 철야를 거듭하던 세대와 사회적 생존을 위한 경제적 조건에 직면한 세대의 고민은 다를 수밖에 없다. 조금만 뉴스를 검색해도 출판업계 불안정노동의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마 다음 10년, 20년 후 본 작품의 후속 작업이 이어진다면 출판노동자의 삶과 근로조건이 주제 중 하나로 다뤄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이런 비판적 입대기는 보기 드문 기획에 대한 아쉬움의 발로에 가깝다는 점을 밝힌다. 30년이란 시간 동안 수많은 장애물을 돌파해 구축한 미래지향적 도시의 탄생과정을 간접체험으로나마 누릴 수 있다는 건 거대한 지적 호사에 가깝다. 다큐멘터리를 통한 학습과 토론 기획에 중요한 사례로 이 영화는 이후로 자리매김할 게 분명하다. 특히 한국사회에 근래 활성화가 절실하지만 오히려 보기 드물어진 공적 담론의 개화에 영감을 주는 아카이브 텍스트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도시 건설이 토지개발이 아닌 '공동성'에 기반을 두는 프로젝트로 구현된 증명이자, 그것이 가능했던 역사적 원인과 평가를 제대로 담아낸 타임캡슐의 가치를 지닌다. 어릴 적 웅장한 백과사전 전집 앞에 넋을 놓던 기억처럼 다가오는 영화다.
 
<작품정보>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Great Contract: Paju, Book, City
2020|한국|다큐멘터리
2022.04.21. 개봉|101분|전체관람가
감독 김종신, 정다운
출연 [출판인] 이기웅, 김언호, 이건복 외
[건축가] 승효상, 민현식, 김영준 외
[영화인] 이은 외
제작 기린그림
제작지원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사업협동조합
배급 영화사 진진
투자 영화사 진진
 
2020 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예술공헌상
2020 12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초청
2020 46회 서울독립영화제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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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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