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배트맨> 포스터

영화 <더 배트맨>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더 배트맨>이 개봉된 지 45일. 4월 14일 자 기준으로 전국 관객 90만 2680명이 보고 갔다. 유니버스란 이름이 붙으며 몇 개의 캐릭터로 재탄생한 배트맨은 동일한 장르 형식에 여러 의미를 담아왔다. 이번 <더 배트맨>은 부패한 사회 속에서 법이 아닌 스스로 정의를 만들어낸 두 남자의 모습을 그렸다. 타락한 정·재계 인사들을 살해하며 짓밟힌 삶에 대한 복수를 자행하는 리들러와 법망을 벗어나 자경단으로 활동하며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는 배트맨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불안정한 시대상이 만든 한 끗 차이의 영웅과 악당을 선사했다.
 
그렇다면 맨 처음 영화화되었던 배트맨은 어땠을까? 1943년 배트맨 말이다. 배트맨은 그 존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조커나 펭귄없이 배트맨은 존재할 수 없다. 빌런 없는 영웅은 없는 법. 영화 <조커>의 주인공은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미국 시민들의 삶을 통째로 갈아 넣었다. 모든 배트맨은 악당을 설계한 후 탄생한다. 배트맨이 싸우는 '악'이 배트맨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1943년 배트맨의 악당은 2차 세계 대전 전범국, 일본이다.
 
전쟁 영웅 배트맨

지금도 전쟁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미국 국방부는 영화 산업에 주요한 투자자이다. 이것은 자본의 문제를 넘어 국가 이데올로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2차 세계 대전 때문에 태어난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에는 미국의 별이 박혀있다. 전쟁영화는 미국의 '애국심'을 드러내는 가장 쉬운 수단이다.
 
1943년 미국은 전쟁을 겪지 않은 국민들을 영화라는 가상 체험을 통해 2차 세계 대전으로 몰아넣어야 했다. 청년들의 참전을 독려하고 전시 경제와 물자 동원에 대한 거부감도 줄여야 했다. 그리고 '부정 못 할 악마와 싸우는 미국'이라는 이미지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전쟁 전에 유행했던 만화는 그 양상이 달랐다.

DC코믹스의 주역인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은 모두 1930년대 전후로 탄생했다. 만화는 대공황 때 삶의 재미를 잃어버린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유흥거리였다. 국가가 공동체의 삶을 책임지지 못한다는 신호는 코믹스를 통해서 자신을 구원해줄 영웅으로 재탄생했다. 악당과 거침없이 싸워나가는 영웅들이 그려진 만화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소소하게 분산시켰다. 그 후 전쟁이 시작되면서 만화는 본격적으로 영화화되며 프로파간다의 매체가 된다.
 
DC코믹스의 슈퍼맨은 일왕을 잡아 온다. 원더우먼은 아마조네스 전사의 몸으로 참전한다.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는 아예 2차 대전에 참전한 군인이다. 그리고 1943년 배트맨은 미국 정보부 소속의 에이전트가 된다. 그는 미국 내에서 일본이 벌이려고 하는 위험한 계획을 저지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이 있다. 배트맨이 경찰과 공조를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범인을 잡는 배트맨 1943년 영화 배트맨의 한 장면, 범인을 잡아 묶어두는 배트맨

▲ 범인을 잡는 배트맨 1943년 영화 배트맨의 한 장면, 범인을 잡아 묶어두는 배트맨 ⓒ 루돌프 C. 플로토

 
대부분 시리즈에서 배트맨은 자경단이다. 폭력을 독점한 국가와 법을 뛰어넘어 악당과 싸운다. 그 때문에 배트맨은 경찰의 검거 대상이다. 보통 배트맨은 국가 권력의 무력함에서 태어나 그 경계 밖에서 활동한다. 그런데 1943년 배트맨은 국가 권력을 대행한다. 이런 배트맨이 생겨난 것은 사실 할리우드 제작사의 자율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영화를 검열하고 영화 제작에 가이드라인을 정해두었다. 그것이 '헤이즈 코드'(hays code, 할리우드 영화 제작 코드라고 불리기도 한다)다. 영화 검열 본부인 '헤이즈 오피스(hays office)'의 영향으로 배트맨은 자경단이 아닌 정부 요원이 되었다. 정부 기관 혹은 경찰을 제외한 이는 법을 이용하거나 대신 심판할 수 없다는 국가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브루스 웨인'은 정보 요원의 신분으로 활동했다.

배트맨은 일본 박사를 무찌르는 국가 권력으로 상징되었다. 그의 사이드 킥인 로빈 역시 그와 비슷하게 설정되었다. 꼬마 영웅 로빈은 당대 청소년들에게 '반일' 정서를 깊게 심어주었다. 어떤 10대에게는 이 영화가 2차 세계 대전 참전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악당에서 시작된 동양인 혐오

1943년 배트맨은 전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요즘 배트맨처럼 개인사와 연결되어 부모의 복수를 위해 싸우거나 자신의 행동이 선하고 옳은지에 대한 고민부터 시작되는 심리적 갈등도 없었다. 자신이 수배자가 돼도 정의를 위해 악당과 싸우는 큰 결심도 필요 없었다. 오직 적국 일본의 음모를 꺾고 미국을 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악당 캐릭터는 눈여겨 볼 만하다. 일본인 '다카 박사'는 고담시에 공급되는 라듐을 훔쳐 광선총을 사용해 미국을 위험에 빠트리려고 한다. 다카 박사는 찢어진 눈과 칠한 피부로 당시 미국인이 생각하던 '동양인'의 모습을 재현했다. 미국은 서부 개척 시대 철도 건설 현장에 중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면서 동양인에 대한 적대적 이미지를 씌워왔다. 노동 현장에서 학대뿐 아니라 린치와 학살은 서부 개척 시대 내내 존재하고 있었다. 동양인은 존재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이다.
  
실험을 하는 악당 영화 배트맨 (1943)의 한 장면, 악당 다카 박사가 여주인공에게 실험을 하고 있다.

▲ 실험을 하는 악당 영화 배트맨 (1943)의 한 장면, 악당 다카 박사가 여주인공에게 실험을 하고 있다. ⓒ 루돌프 C. 플로토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은 분명 역사의 죄인이다.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 동안 일본계 미국인은 수용소에 갇혀 3년을 지내야 했다. 그리고 언론과 영화 등을 통해 형성된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동양인 전체로 퍼져나가며 인종차별의 서막을 알렸다.  

다카 박사가 미국 파괴를 위해 이용하려고 했던 라듐은 미국이 종전을 명목으로 사용했던 핵폭탄의 이미지와 배치된다. 다카의 핵과 미국의 핵은 중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사용하는 자의 도덕성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수단은 목적에 따라 그 선함과 악함을 평가받는가? 수단 자체가 악하다는 것은 전쟁 중에도 사용 금지된 화학무기를 보면 알 수 있다. 핵폭탄은 존재 자체로 악하다. 지금 전쟁을 벌이는 러시아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폭탄을 보유한 미국도 이 원죄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다카 박사는 미국 내 반일 감정과 핵에 대한 인식 재고를 위해 창조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동양인 혐오와, 후자는 언제나 선한 미국은 핵보유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이데올로기와 이어지고 있다.

참전한 군인들의 사망 소식과 그들의 시신이 속속 도착하는 미국 본토에서 당시 미국인들이 연속극처럼 매주 보던 배트맨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크라이나 전쟁화면을 매일 뉴스로 보며 영화처럼 느낄지도 모르는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943년 배트맨을 재밌게 보는 팁
 
붙잡힌 악당 영화 배트맨 (1943)의 악당 다카 박사가 배트맨과 로빈에게 붙잡혔다.

▲ 붙잡힌 악당 영화 배트맨 (1943)의 악당 다카 박사가 배트맨과 로빈에게 붙잡혔다. ⓒ 루돌프 C. 플로토

 
1943년 배트맨은 영화사적으로 여러 의미가 있다. 영화는 지금의 OTT 드라마처럼 제작되었다. 매주 극장에서 상영되는 '시리얼 무비(serial movie)' 형식이다. 관객들은 마치 연속극을 보듯 매주 영화관을 찾아 20분 내외의 배트맨을 관람했다. 이 같은 형식으로 인해 초기 배트맨은 몇 가지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클리프 행어(cliff hanger)'. 한 에피소드를 관람한 관객은 다음 주에도 극장에 와야 했다. 이를 위해 회차마다 마지막에 갈등이나 반전을 제시했다. 주인공의 가족이 납치를 당하거나, 배트맨이 폭발에 휘말리는 장면을 한 편의 마지막에 삽입했다. 또한 한 편의 극은 각각 이전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과 다음 편에 나올 이야기를 예고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배트맨 영화 다음 주 예고 시리얼 무비 형식인 영화 배트맨 (1943). 다음 주 예고를 하는 장면

▲ 배트맨 영화 다음 주 예고 시리얼 무비 형식인 영화 배트맨 (1943). 다음 주 예고를 하는 장면 ⓒ 루돌프 C. 플로토

 
시리얼 무비답게 전반적인 내러티브가 직렬적인, 고착화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는 2시간 동안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담는 영화와는 다르다. 1943년 배트맨은 20분 내외의 드라마를 15편이나 제작해야 했다. 또한 각각의 내용은 일본 박사를 물리친다는 큰 맥락과 이어져야 했다. 각 편의 내용은 그 자체로 기승전결이 표현되어야 했기 때문에 '악당의 새로운 계획-계획의 실행-배트맨과 로빈의 활약-악당을 물리치고 다음 단계를 준비'라는 식의 직렬적 구조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극이 단조롭고 진행이 뻔하다는 의견이 많지만, 지금의 드라마도 이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원작인 코믹스 배트맨과 다른 면모가 많다. 먼저 과학기술로 만든 좀비가 등장한다. 배트맨의 본거지인 배트-케이브 (박쥐 동굴)는 악당을 가두는 곳으로 이용된다. 그의 시그니처 운송 수단인 배트-모빌 역시 검은 캐딜락이다. 주인공의 내면적 고뇌는 등장하지 않는다. 지금에서 보면 검은 슈트를 입은 흔한 요원 첩보물에 가깝다.
배트맨 영화 1943 세계 2차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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