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는 성녀인가 마녀인가. 시대와 권력은 그 필요에 따라 한 사람의 이미지를 영웅으로 미화하거나 혹은 악마로 왜곡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아는 역사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인가, 아니면 누군가 만들어낸 이미지의 산물일까.

4월 12일 방송된 tvN 역사-교양 예능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임승휘 선문대학교 역사-영상콘텐츠 학부 교수가 강사로 출연하여 '잔 다르크와 프랑스-영국 백년전쟁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강연했다.
 
서구의 가부장적인 전통 사회에서 이른바 '전투하는 여성' 이미지의 시초가 된 잔 다르크는, 지금까지도 세계사에서 상당한 논란과 미스터리를 남긴 인물이다. 읽고 쓸 줄도 모르던 시골의 양치기 소녀가 어느날 갑자기 전쟁터에 나가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등극하는 영화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잔 다르크가 활약했던 무대는 중세 유럽의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프랑스와 영국(잉글랜드)간의 백년 전쟁이었다.
 
영화같은 스토리의 주인공 잔 다르크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이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16년간 걸쳐 벌어진 양국간의 패권 경쟁이었다. 그 결정적인 두 가지 계기는 왕위계승과 영토분쟁이었다. 1328년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유력한 후보이자 왕의 조카였던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3세를 제치고, 사촌인 프랑스 발루아 백작 필리프 6세가 프랑스 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다.
 
현대적인 국가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중세 봉건제에서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에서는 왕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왕의 신하(공작)라는 기묘한 신분에 놓여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일단 굴욕을 참고 필리프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이후로 갈등은 점차 깊어진다. 잉글랜드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프랑스 정권에 저항하던 플랑드르 봉기를 필리프 6세가 강경 진압하면서 악화된 양국의 갈등은, 에드워드 3세의 양모 수출 중단-필리프 6세의 잉글랜드 소유였던 본토의 기옌 영지 몰수 등 연이은 보복으로 맞대응하며 돌이킬 수 있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에드워드 3세는 결국 1337년 프랑스의 진정한 왕위 계승자는 자신이라고 선언하며 필리프 6세에게 전쟁을 선포하며 이는 백년전쟁의 시작이 된다. 초기에는 잉글랜드가 프랑스보다 국력에서 크게 열세였지만, 소규모의 병력을 활용한 약탈전에 이어 전면전이었던 1346년 크레시 전투-1356년 푸아티에 전투의 연이은 대승으로 잉글랜드가 주도권을 가져가게 된다.

필리프 6세의 뒤를 이은 장 2세는 잉글랜드군에게 전투에서 패하여 스스로 포로가 되는 수모를 당했다. 양국은 이후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을 통하여 프랑스왕에 대한 잉글랜드왕의 모든 봉건적 의무를 면제할 것,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아키텐을 넘길 것. 대신 잉글랜드왕은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는 데 합의한다.
 
하지만 전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장 2세의 뒤를 이은 샤를 5세는 잉글랜드에 반격을 가하며 한때 빼앗긴 영토를 거의 수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샤를 5세가 요절하면서 뒤를 이은 샤를 6세는 심각한 정신착란 증세로 나라를 통치하는 게 불가능한 미치광이 왕이었다. 여기에 혼란한 정국을 틈타 프랑스의 권력 실세로 부상한 부르고뉴파는 수장인 부르고뉴 공작의 암살을 계기로 배후에 프랑스 왕실이 있다고 판단하여 적국인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적한다. 당시 잉글랜드 왕인 헨리 5세는 아직 지급되지 못한 장 2세의 포로 몸값 환수를 구실로 프랑스를 다시 침공한다.
 
수도 파리를 함락한 잉글랜드는 1420년 프랑스와 '트루아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의 왕위 상속권을 보장받는다. 샤를 6세의 공주와 자신이 혼인을 맺고 여기서 태어난 왕자(헨리 6세)가 이후 영국-프랑스의 공동 후계자가 된다는 조약이었다. 자연히 이 조약의 최대 피해자는 샤를 6세의 아들이었던 샤를 7세였다. 헨리 6세가 왕위에 오를 경우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속국으로 떨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잉글랜드가 잔 다르크 마녀로 몬 까닭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등장하여 프랑스를 구원하는 인물이 바로 잔 다르크다. 프랑스 동부의 시골마을 동레미에서 태어난 잔 다르크의 구체적인 이력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역사적 사실과 소문이 뒤섞여서 어디까지나 전설이고 사실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잔 다르크는 어린 시절 농부인 부모님 밑에서 평범하게 자랐고, 글은 읽지 못했으나 교회를 독실하게 다닌 시골소녀였다. 잔 다르크는 1424년부터 수년에 걸쳐 '위기에 빠진 프랑스 왕을 구하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천사의 계시'라고 믿게 된다.
 
잔 다르크는 몇 번이나 쫓겨나면서도 끈질기게 샤를 7세를 찾아가 자신이 들은 천사의 계시를 전하려 했다. 잔 다르크를 처음 대면할 때 샤를 7세는 그녀를 시험하기 위하여 신하에게 변복을 시키고 자신은 평민의 옷을 갈아입고 한쪽에 숨어있었다. 그런데 잔 다르크는 홀에 들어서자마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샤를 7세를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가 하늘의 계시를 전했다는 일화가 알려진다. 잔 다르크는 자신을 '처녀 잔'이라고 지칭했고 샤를 7세가 신의 뜻을 받들어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샤를 7세는 반신반의했지만 이후에도 잔 다르크에게 수상한 점을 끝내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그녀를 최전선인 오를레앙에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불과 17세의 잔 다르크는 전장에 출전하자마자 첫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고 이후 프랑스군은 잔 다르크와 함께 연전연승하며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가들은 잔 다르크가 실제로 전투를 지휘한 것은 아니며, 당시 잉글랜드군이 철수한 것도 꼭 잔 다르크 때문이라기보다는 장기간의 포위로 인한 보급문제로 보는 시각이 많다. 다만 잔 다르크는 전쟁 내내 프랑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오를레앙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에 엄청난 희망을 가져왔고, 프랑스인들은 잔 다르크를 자연스럽게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로 믿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오를레앙의 성녀'로 인정했다. 남녀노소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그녀가 나타나면 달려와서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려고 노력할 만큼 열렬하게 추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 갑자기 나타난 소녀에게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던 잉글랜드에서는 잔 다르크를 '마녀'로 간주했다. 과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중세 시대였기에 초자연적인 존재를 그대로 믿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신의 존재를 절대시하는 중세 세계관 속에서 '신이 성녀를 보내 프랑스를 지킨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믿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는 곧 프랑스와 싸우고 있는 잉글랜드는 악마라는 논리가 정립하기에, 잉글랜드로서는 절대 잔 다르크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 잉글랜드의 세계적인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소설 <헨리 6세>에서 잔 다르크가 등장하며 그녀를 저주 내리는 치명적인 마녀로 묘사하기도 했다.
 
대관식 이후 잔 다르크 버린 샤를 7세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잔 다르크는 1429년 6월 샤를 7세와 랭스로 향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왕들은 랭스의 대성당에서 대관식이 열리는 게 관례였고, 이는 곧 프랑스왕의 정통성-명분과 직결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잔 다르크는 적진을 뚫으며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지역에 편지를 보내어 투항을 권유했고, 많은 도시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는 효과를 불러왔다. 마침내 랭스에 입성한 샤를 7세는 대관식을 치르며 정식 프랑스왕이 됐고 적진을 뚫고 내내 그 곁을 지킨 잔 다르크의 명성도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위기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잔 다르크는 수도 파리를 수복하기 위하여 공격을 감행했지만 처음으로 패배를 당하고 다리에 부상까지 입는다. 샤를 7세는 대관식 이후로는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고 잔 다르크에 대한 지원도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1430년 5월, 콩피에뉴에서 부르고뉴군과 전투를 치르던 잔 다르크는 적에게 쫓겨 성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지휘관은 성문을 잠궈버렸다. 적들에게 포위된 잔 다르크는 결국 생포되어 부르고뉴군에게 포로로 잡힌다.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부르고뉴는 잔 다르크를 영국에 넘겼고, 정작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구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당시 샤를 7세는 부르고뉴를 회유하기 위하여 동맹 협상을 진행중이었고, 부르고뉴와 영국을 똑같이 간주하던 강경파인 잔 다르크는 성가신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국왕인 자신보다 더 민중에게 사랑을 받던 잔 다르크에 대한 견제와 질투심도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분석이다. 적국인 영국은 약 1만 리브르(약 50억)의 몸값을 지불하고 잔 다르크의 신병을 확보했다.
 
영국은 잔 다르크를 악마의 추종자로 몰기 위하여 루앙에서 이단 재판을 열었다. 영국은 포로인 잔 다르크를 쇠사슬에 묶고 물과 음식을 제대로 주지 않고 학대했다. 심문관들은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몰기 위하여 5개월간 무려 29번의 심문을 진행했다. 문맹에 교육도 받은 적이 없는 소녀가 적진 한복판에서 당대 최고 지성들을 상대하며 혼자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하는 절대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잔 다르크는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로 맞서싸운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관들은 잔 다르크에게 70여 개에 걸친 죄목을 걸었지만 끝내 마녀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여성이 남장을 했다는 궁색한 죄목까지 덮어씌우며 화형을 선고했다.

잔 다르크는 일반적인 화형과 달리 3번이나 집요하게 불태워졌다. 프랑스인에게 성녀로 남은 잔 다르크가 시신이라도 남아있으면 숭배의 대상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화형 집행 이후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뼛조각은 강에 버려졌고 잔 다르크는 지금도 묘지조차 남아있지 않다. 프랑스를 구한 영웅 잔 다르크는 그렇게 열 아홉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프랑스는 잔 다르크 사후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승리하여 본토에서 잉글랜드 세력을 몰아내면서 무려 116년간 이어진 기나간 백년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서 프랑스는 칼레를 제외하고 잉글랜드에게 내준 모든 영토를 수복했다.

백년전쟁이 끝나고 3년 후 샤를 7세는 뒤늦게 잔 다르크를 복권하며 루앙에서의 이단 재판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사실 이마저도 재판 결과를 그대로 인정할 경우, '이단에 의하여 왕위에 오른 것'이 되어버리는 샤를 7세 본인의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잔 다르크를 이용한 건 샤를 7세만이 아니었다. 잔 다르크는 사후에도 여러 시대와 나라-집단을 거치며 아이콘이자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수단이 됐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는 잔 다르크에 대한 숭배 열기가 고조되기도 했다.
 
프랑스 외에도 전세계로 확산된 잔 다르크 열풍의 대표적인 사례로, 당시 미국에서도 전쟁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잔 다르크가 프랑스를 구했듯이 조국을 구하는 데 앞장서라'는 식으로 기부 캠페인에 그녀의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했다. 또한 잔 다르크의 이미지는 한반도에도 전해지며 한창 일제의 조선침략이 진행되던 1907년 장지연이 번역한 <애국부인전>은 바로 잔 다르크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었다. 3.1운동의 주역 유관순 열사도 바로 <애국부인전>을 읽고 잔 다르크의 일화에 큰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는 왜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을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는 항상 구원자가 되어줄 구심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에게 백년전쟁과 잔 다르크는 어떤 의미일까.

지난 수백년간 사람들은 잔 다르크는 성녀 혹은 마녀로 이미지를 부각하며 자신들이 필요한 영웅(혹은 악마)의 모습을 만들어왔다. 한국 근현대사에서도 군사정권 당시 전쟁 영웅이던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정치적으로 부각시키거나, 쿠데타로 집권한 고려 무신정권을 미화시킨 사례들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낸 이미지에 수동적으로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진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지성을 깨우려고 노력해야 세상을 더 밝아진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벌거벗은세계사 잔다르크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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