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용 신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박기용 신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취임 후 2개월이 지난 박기용 신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은 한창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얼어붙은 한국 영화 산업이 침체 일로였고, 과거 보수 정권 때 시작된 영화인 블랙리스트 문제 해결도 지지부진한 상황. 부산과 수도권을 오가며 영화계 목소리를 직접 챙기는 모습이었다.
 
지난 24일 서울 홍대 부근인 영진위 영화교육지원센터에서 박기용 위원장을 만났다. 한국영화아카데미 3기 출신인 그는 1997년 영화 <모텔 선인장> 등을 연출한 감독 출신이면서 제작과 영화 교육 등 두루 현장을 경험했다. 영화계에선 현장 출신인 박기용 감독에 기대가 높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하며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대에 우수한 인력을 꾸준히 배출해 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로나19 피해, 국가 차원 지원 필요"
 
박기용 위원장은 영진위가 직면한 시급한 과제로 우선 코로나19 팬데믹 피해복구를 꼽았다. 그는 "영화인들의 피해가 현재 몇천 억 규모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건 영진위의 범위를 벗어난 국가 차원의 문제"라고 운을 뗐다. 같은 시기 극장 업계와 달리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여러 OTT 플랫폼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생각이 많았다.
 
"지난해엔 (영진위 예산으로) 극장 중심의 지원을 했는데 현장에선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정부가 나서야 할 때다. 당선인 공약에 소상공인 지원이 있으니 거기에 영화인들도 포함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OTT를 포함해 영화를 보는 플랫폼의 대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여기에 맞는 영진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민 중이다.
 
결국 여기엔 영화란 무엇인지, 그 정체성을 묻는 질문도 연관돼 있다. 제가 위원회에 들어와서 가장 처음 읽은 자료가 BFI(영국영화협회)가 2017년에 발표한 5개년 발전 계획이었다. 이미 그때 영국은 영화라는 게 '움직이는 모든 이미지를 포함한 스토리텔링'이라 선언했더라. 게임이든 OTT든 다 포함할 수 있는 개념이다. 영국과 우리 상황이 다르기에 더 고민하고 연구해서 선언적인 공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OTT에 대한 좀 더 구체적 생각을 물었다. 근 3년간 영화발전기금이나 영화 관련 지원을 받은 콘텐츠들이 극장이 아닌 넷플릭스 등의 OTT 플랫폼으로 직행하면서 상대적으로 관객의 선택권 침해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극장 푯값에 포함된 영화발전기금이 애먼 타사 플랫폼 성장에 기여했다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교한 해석과 계획이 필요하다"며 박 위원장이 말을 이었다.
 
"새 정부 조직개편 이야기도 있고, 부처가 신설되는데 거기에 방송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을 담당할 거라 예측하고 있다. 개인적으론 OTT 콘텐츠로 영화의 개념을 확대한다는 게 의미가 크지 않다는 생각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결국 위드 코로나19로 가야 하듯 뉴 미디어와 공존하는 건 필연이기 때문이다. 어떤 플랫폼을 택할지는 관객이 판단할 문제지, 영진위가 극장에 가라 TV를 보라 할 수는 없다.
 
전 OTT 콘텐츠도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미 많은 영화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영진위에서도 그 부문을 담당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영화 인력이 이미 그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만큼 영화계가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반대로 영화계도 그쪽 플랫폼에서 어떤 급부를 얻어야겠지."

 
"예산 다각화 적극 동의, 영비법 전면 개정 필요"
 
결국 영진위가 보다 확장된 영화 개념을 적용하고, 진흥 기구로서 역할을 적극 수행하려면 예산과 재원 확보의 안정화가 필요하다는 게 영화계 중론이다. 현재까지 영진위 예산은 전적으로 극장 입장권의 약 3%를 징수한 영화발전기금에 의존해왔다. 2019년 1년 누적 관객 수가 2억 명까지 넘은 결과로 1000억 원 이상의 예산 편성이 가능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관객 수가 평균 70% 이상 급감한 상황이다. 올해는 1000억 원대가 깨진 978억 원이 예산으로 책정됐다. 2021년에 비해 약 7% 감소한 수준이고, 이마저도 공공자금관리기금 800억을 차입한 것이라 이자 부담을 안게 됐다.
 
"현재 영발기금 잔액이 350억 원 정도 남은 상태다. 사실 그간 극장에 신세를 많이 졌다. 관객 수가 많이 준 상태기에 현재로는 내년 사업이 어렵다고 봐야지. 올해 예산도 정부에 빚을 진 것이다. 계속 이럴 수는 없다. 영진위 예산의 다각화가 필요하다. 국고 지원이 필수다. 현재 스포츠 토토 기금에서 일부 지원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운영기금만으로 사업하는 국가 기관이 영진위 말고 없잖나. 관광공사가 관광발전기금을 받긴 하지만 전체 예산에 일부다.
 
차입 이자에 대한 부담도 있어서 내년 예산도 긴축하고 있다. 영화계에서 우려가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당장 내년 예산이 불투명해서 국고나 기금을 요청해야 하는데 설득력을 가지려면 자체적으로 노력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뼈를 깎는 긴축을 보여줘야 우리 주장에 설득력이 생긴다고 본다. 영진위 지원 사업에 기대는 분도 많은 걸 알지만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사용처를 잘 다듬고 계획을 잘 짜서 운영비와 기금 사용처를 분리해 예산 지원을 (정부에) 제안할 생각이다."

 
위원장의 복안이 이뤄지기 위해선 중앙정부의 결단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론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영비법)의 개정이 필수다. 앞서 말한 OTT 플랫폼으로부터의 일부 기금 징수 근거도 영비법 개정으로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전임, 전전임 영진위원장은 물론이고 일부 의원들이 꾸준히 법안을 발의했음에도 국회에선 매번 통과되지 못했다. 박 위원장은 "전면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임을 밝히면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법을 개정할 수 있는 게 아닌 만큼 영화계 의견을 잘 수렴해서 한 번에 개정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
 
 지난 4월 4일 열린 영진위의 대국민 사과와 혁신 다짐 기자회견. 이날 오석근 영진위원장은 "미규명 사건과  자체 별도 조사 통해 배제와 차별 사례를 계속 면밀히 조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문재인 정부로 교체된 이후 영진위(당시 오석근 영진위원장)는 보수 정권 때 자행된 블랙리스트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하는 자리를 가졌다. ⓒ 성하훈

 
"영진위 내부 쇄신도 급선무"
 
영진위 입장에서 아픈 이야기인 블랙리스트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보수 정권으로 바뀐 입장에서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불거진 해당 사건이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년 동안 영진위 차원에서 자체 조사 및 백서 발간을 주요 과제로 꼽았지만 실질 피해자들 사이에선 미온적이고 아쉽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영진위 내부 인사를 보더라도 블랙리스트에 협조했고 연관된 인물이 주요 직책을 맡는 일도 있어서 쇄신 의지가 없다는 강한 비판도 있었다. 박기용 위원장은 "과거사 특위가 재구성돼서 작년 말부터 활동 중"이라며 말을 이었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지난 기간 영진위가 블랙리스트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수동적으로 대처했을 뿐 내부에서 먼저 뭔가 하자고 하질 않았다. (보수 정권 때) 영진위가 어떤 일을 했는지 내부에서 공론화된 적이 없었지. 다들 쉬쉬했고. 이래선 해결이 안되지 않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 일부 우려가 있었지만 제가 적극 참여하고 있다.
 
취임 후 두 달간 나름 파악한 건 그간 영진위 내부 인사 시스템 등 몇 가지가 비정상 운영됐다는 사실이다. 상처받은 직원도 있고 신구 사이 갈등도 존재한다. 이걸 정상화하는 게 중요하다. 일하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굉장히 어렵기도 하다. 순발력과 창의력 있는 조직문화가 필요하다. 제가 확 바꿀 수는 없어도 변화를 위한 토대 마련은 노력하려 한다."
 

영진위원으로 활동한 기간을 고려하면 박기용 위원장의 임기는 약 2년이다. 그는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취임할 땐 큰 계획을 많이 세웠는데 직원들이 여러 조언을 주셨다"며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중단기 계획 중심으로 일단 영진위의 정체성 재정비부터 시작하려 한다"고 나름의 각오를 드러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영화 산업에 또다른 축인 비평의 중요성도 언급했다. "좋은 비평이 있어야 좋은 영화가 나온다는 믿음이 있다"며 그는 "공기관이 할 수 있는 학술 연구, 산업과 영화 비평 지원을 어떤 식으로 할지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박기용 영화진흥위원회 블랙리스트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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