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펜서>의 한 장면.

영화 <스펜서>의 한 장면. ⓒ (주)영화특별시 SMC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별장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복싱데이까지 삼 일간의 연휴를 보내기로 한 영국 왕실. '다이애나 왕세자비(크리스틴 스튜어트)' 역시 왕실의 일원으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별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그녀의 크리스마스는 시작부터 편안하지 않다.

새롭게 별장을 담당하게 된 지배인 '그레고리 소령(티모시 스폴)'의 눈을 빌린 시어머니와 남편의 집요한 감시 속에서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였던 앤 불린의 환영을 볼 정도로 강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다이애나. 그녀는 유일한 말벗인 의상 담당자 '매기(샐리 호킨스)'와 두 아들에게 의지하며 간신히 예정된 행사들을 버텨내지만, 과거 어린 시절의 자유로운 기억은 그녀의 답답한 현재와 상충하며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힌다. 

다이애나 스펜서. 20세기의 신데렐라로서 전 세계의 눈이 집중되었고, 대인지뢰 제거 운동과 같은 수많은 선행으로도 기억되었던 그녀. 동시에 그녀는 보수적이고 비밀스러운 영국 왕실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로서 수많은 가십을 만들어 냈기에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수없이 재현되고 있기도 하다. 당장 최근에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크라운>의 네 번째 시즌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사실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소재로 한 작품은 신선함을 담보할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

이에 파블로 라라인 감독과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만난 <스펜서>는 역사가 되어버린 그녀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다양한 상징을 토대로 15년에 걸친 왕실 속 그녀의 삶을 단 삼 일 내에 농축적으로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특히 영화는 작중 다이애나의 대사처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서로 다른 타임라인을 스크린에서 교차시키며 그녀의 삶을 요약한다. 이를 토대로 <스펜서>는 새로운 미래를 그려내기 위해 살아 숨 쉬는 과거에 맞서 싸우는 현재를 살았던 한 개인의 고통을 생생히 전달한다.

'살아있는 과거'와 싸웠던 다이애나
 
 영화 <스펜서> 관련 이미지.

영화 <스펜서> 관련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스펜서> 속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의 불륜을 묵과하고 오히려 인내하지 못하는 자신을 압박하는 영국 왕실과 맞서 싸운다. 중요한 것은 이 싸움을 개인과 과거라는 시간의 싸움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영국 왕실이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과거이자 숨 쉬고 움직이는 의례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에밀 뒤르켐에 따르면 의례는 종교의 내용에 깊은 의미와 활력을 주며, 종교가 목적하는 바를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행위다. 의례는 믿음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신앙을 창조하고, 또 주기적으로 재창조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례는 역사적으로 권위가 인정된 행동 양식을 반복하며 종교의 의미와 상징성을 표현하고 강화한다. 

영국 왕실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군주제는 과거 영국의 영화를 기억하게 해주는 상징이자 영국인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과거의 관습을 유지하며 자신의 상징성을 유지하려 하고, 일원들 개개인의 개성과 삶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보수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처럼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현존하는 과거인 영국 왕실의 본질을 왕실의 일원들을 통해 영리하게 포착한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엘리자베스 2세가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이 단적인 예시다. 카메라 앞에 모인 가족 중에 다이애나와 그녀가 두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표정의 변화조차 전혀 없이 마치 인형처럼 보인다. 대화 중에 다이애나를 이해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이나 예법에 따라 불편하고 복잡한 식사 시간에 다이애나가 강한 스트레스를 토로하는 것 역시 존재 자체가 의례인 영국 왕실을 잘 보여준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스펜서>가 영국 왕실이라는 액션보다는 그에 대한 다이애나의 리액션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보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 사투를 펼치는 그녀의 고통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당장 엘리자베스 2세와 찰스 왕세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초반부에 등장하지 않는다. 또 설령 등장하더라도 영화는 그들을 상당히 원거리에서, 뒷모습 위주로 비춘다. 이야기의 전개나 다이애나의 감정선 변화를 위한 최소한의 순간을 빼면 왕실 관련 인물은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식사 시간이 되었거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족들이 다 같이 열어보는 시간이 되었을 때, 행사의 순간은 건너뛰고 곧장 다이애나의 반응을 보여주는 식이다. 대신 영화는 오히려 의상 담당자나 셰프처럼 그 외의 인물들과 그녀 사이의 대화에 집중한다. 

굳이 왕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그려내지 않고 그녀의 리액션만을 보여줌으로써 <스펜서>는 절제된 방식으로 그녀의 아픔을 극대화한다. 그래서 영화는 고통스럽다. 영화 포스터처럼 드레스를 입은 채 구토하는 언밸런스한 그녀의 모습만 보더라도 느껴진다. 찰스가 다이애나에게 선물한 진주 목걸이에는 이 모든 고통이 함축되어 있다. 다이애나는 그 목걸이를 착용한 자신의 모습을 오래전 헨리 8세에게 버림받은 천일의 여인인 앤 불린에게서도 본다. 즉, 이 목걸이에는 과거를 갱신하기 위해 정해진 역할에만 충실할 수 없는 이들이 퇴출되어 오는 역사가 담겨 있다.

앤 불린만 하더라도 왕실에 걸맞은 왕비로서의 자질이 부족해 사형에까지 처해졌으며, 이는 영화에서 앤 불린의 유령이 시간을 넘나들어 나타나며 다이애나를 만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스펜서>는 생명력을 잃고 의례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을 격렬히 거부하는 과정을 다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이애나가 느꼈던 압박감
 
 영화 <스펜서> 스틸컷

영화 <스펜서>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더 나아가 영화는 다양한 연출과 상징을 통해 과거에 억눌리는 삶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알려준다. 왕실 별장으로 가던 중 어릴 적 자신이 자란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길을 잃어버린 다이애나. 아무도 그녀를 돕지 못하는 가운데, 그녀에게는 과거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허수아비와 들판만이 위안이 된다. 어린 시절의 다이애나는 발레리나를 꿈꾸던 자유로운 존재였지만 지금은 왕실이란 공간에 묶인 채 그 압박을 견뎌야 한다. 그렇기에 허수아비에게 다가가 옛날에 입혀줬던 옷을 벗기는 그녀를 지켜보다 보면 허수아비는 다이애나의 현재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한편 영화는 왕실의 강한 법도로 인해 다이애나가 느꼈던 압박감을 관객들이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군인과 요리사들의 모습이 그 중심에 있다. 언제나 왕실과 함께 움직이는 그들은 강한 규율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집단이다. 그렇기에 도입부에서 이들이 교차로 주방을 향하는 모습은 살아있는 과거이자 의례를 눈앞에 만날 수 있는 순간이고, 항상 숨 막힌 채로 지내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이는 저택에 들어간 다이애나가 몸무게를 재는 장면에서도 잘 나타난다. 재미로 시작된 왕실의 규칙이라는 몸무게 재기에 다이애나는 강한 반감을 표한다. 그러다 보니 찰스와 엘리자베스 2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녀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스펜서>는 단지 다이애나의 아픔과 고통을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희망을 노래하며 한 발짝 더 나아간다. 현존하는 과거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과거다. 저택을 벗어나 들판으로 나가고자 하는 다이애나의 투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펜서 가문의 옛 집과 앤 불린을 통해 완성된다. 폐가가 된 옛 집에서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다이애나는 앤 불린의 환영을 본다. 

그 순간 영화는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 현재의 다이애나가 번갈아 등장하며 들판을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나간 과거를 통해 현재의 변화를 이끌어내며 새로운 미래를 암시한다. 앤 불린의 불린 가문과 혈연적으로 이어진 스펜서 가문의 과거,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되기 전에 한 개인으로 살 수 있었던 스펜서의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다이애나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준다. 왕비가 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찾기로 결심한 다이애나 스펜서를 비춘다. 그래서 자신처럼 왕실 안에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할 아이들을 구하는, 억지로 꿩 사냥에 나선 아이들을 구해내는 그녀의 모습은 강렬한 쾌감을 선사한다. 

이러한 희망찬 후반부는 영화의 첫 장면과 대비를 이루며 영화의 균형을 잡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당장 첫 장면에서 영화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교차시키면서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삶을 강조한다. 영국 왕실의 별장으로 향하는 차들이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데, 그 차들이 지나갈 때 도로에 떨어져 죽어 있는 한 꿩의 높이에서 차들을 포착한다. 이 장면에서 현재는 차들이 지나가는 순간이지만, 간신히 차들에게 치이지 않는 꿩의 모습은 영국 왕실 내에서 고통받던 다이애나의 과거를 보여주는 듯하기도 하다. 동시에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을 알고 있다면 도로에 누워 있는 꿩 한 마리는 마치 미래의 다이애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스펜서>의 후반부는 과거를 이겨내고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다이애나를 비춘다. 이러한 대비는 수미상관의 구조 안에서 극적인 안정감을 추구하고, 동시에 그녀의 삶으로부터 비극과 희망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즉, <스펜서>는 희망을 노래하며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한 여성의 삶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비극을 영화적으로 기억하는 장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와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스펜서 다이애나 왕세자비 크리스틴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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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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