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에세이 <사건>이 영화 <레벤느망>으로 변환되기까지
 
프랑스의 현존하는 대표 여성작가로 손꼽히는 아니 에르노는 1974년 첫 소설을 세상에 선보인 후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국내에도 적지 않은 저서가 출판됐는데 이 작가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2003년에 출범하기도 했다. 
 
그런 대작가의 젊을 적 은밀히 감춰왔던 체험을 고백한 에세이가 2000년 출판되었다. <사건>이라는 제목의 80여 쪽 남짓한 분량의 고백록인데 작가로서는 가장 집필하기 힘들었던 닥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왜냐하면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에 아니 에르노가 경험한 임신중절의 체험담이기 때문이다. 1940년생인 작가가 1964년 10월부터 3개월 간 겪어야 했던 그 당시 기억들은 공개하기까지 가공할 두려움의 극복과 인고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작가가 실제 상황이 발생했던 때로부터 고백록을 공개하기까지는 무려 36년의 시간이 지나야 했다. 처음 11년은 사회적 규제에 의해서, 다음 25년은 자기 내부의 금기를 넘어서는 데 온전히 바쳐진 셈이다. 그리고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화가 되기까지 20여 년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반세기가 넘는 장구한 시간이 고스란히 숙성된 셈이다. 하지만 그저 과거 회고적이라고 하기엔 원작 <사건>과 영화화된 <레벤느망>이 지향하는 바는 훨씬 더 묵직하다. 여성 작가에 의한 임신과 낙태 체험 소재 작품이 적지 않음에도 이 문학-영화 연계작업은 전혀 식상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 돌 직구에 가까운 맛을 선사한다. 
 
"레벤느망"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레벤느망"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특별시SMC, ㈜왓챠

 
2_<레벤느망>을 만나기 전, 언급하고픈 영화들
 
<레벤느망>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임신중절, 즉 낙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해당 소재는 이미 적지 않은 작품이 다룬 바 있다. 그러므로 작품의 요체라면 기본 줄거리와 흐름을 쉽게 짐작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몰입감과 집중력을 유지하느냐가 될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여 본 작품을 보기 전 떠올려볼만한 작품 몇 편을 언급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로 뇌리에 남아 있는 영화는 1996년 낸시 사보카 감독(1/2부)과, 가수이자 배우로 활약하는 셰어(3부)가 공동 연출한 TV용 옴니버스 영화 < 더 월 If These Walls Could Talk >이다. 같은 집을 무대로 1952년-1974년-1996년이라는 22년의 시차를 설정해 이야기를 진행한다. 시대 배경은 상이하지만 매 에피소드마다 공통적으로 3명의 여성이 낙태 문제를 고민하고 각자의 길을 택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1952년의 주인공은 하룻밤 실수로 인한 의도치 않은 임신을 해결하고자 불법 낙태수술을 시도한다. 하지만 불완전한 과정으로 진행된 수술 실패로 결국 죽음을 맞는다. 1974년의 주인공은 젊은 시절 포기했던 자아실현의 꿈을 향해 재도전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뜻하지 않은 네 번째 임신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그녀는 학업 재개와 엄마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1996년의 주인공은 대학생활 중 부적절한 관계의 결과를 정리하고자 임신중절을 결심하지만 룸메이트와 뜻하지 않게 갈등을 겪는다. 그 다툼은 사회적으로 첨예한 낙태 찬반 논쟁 한가운데로 주인공을 끌고 들어간다. 명확한 주제의식과 관련 쟁점을 시대 변천상과 함께 다룬 본 작품은 저예산 영화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성찰을 제공했다.
 
<레벤느망>은 2021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심사위원 만장일치 결과였으며 심사위원장은 봉준호 감독이 맡았다). 2004년 해당 영화제의 황금사자상 수상작은 영국의 사회파 영화 거장 마이크 리 감독의 <베라 드레이크>였다. 2021년의 영화가 원치 않은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당사자의 이야기라면, 2004년 영화는 주인공 같은 여성들을 돕는 천성이 친절한 낙태시술자 '베라 드레이크' 여사의 이야기다. 베라 드레이크는 1950년대 영국을 살아가는 노동계급 여성이다. 그녀는 역시 임신중절이 공인되지 않았던 시대에 우연한 임신으로 전전긍긍하던 어린 여성들에게 가끔 자신이 가진 기술과 경험으로 도움을 주곤 했다. 하지만 돌발적 사고를 겪으며 선의로 행해지던 그녀의 행위는 제도의 도마 위에 오른다. <레벤느망>과 <베라 드레이크>는 시간차를 넘어 기묘하게 대구를 이루는 느낌이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영화는 2007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루마니아 감독, 크리스티앙 문쥬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 시내의 허름한 호텔에서 비공식 낙태 시술을 받으려는 여학생과 시술자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레벤느망>에서 묘사된 낙태가 불법이던 프랑스의 역사는 1975년에 법령이 개정되면서 끝났지만, 그런 변화가 다른 나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영화 속 배경인 1987년의 루마니아는 악명 높은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터무니없는 출산 장려-인구대국화 정책을 실시하는 바람에 모든 낙태가 원천 금지되는 나라였다. 그 결과 불법 낙태와 그 과정에서 사고사가 수두룩했고, 원치 않은 출산의 결과로 온 나라에 고아가 넘쳐났다. 독재정권은 이 아이들을 국영고아원에 수용했고 이들은 가족 대신 독재자를 섬기는 친위부대로 키워졌다. 하지만 독재자가 몰락하면서 이들 역시 쫓겨나거나 범죄 집단으로 전락하는 비극을 맞는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본다면 더 소름이 돋는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2021년 개봉했던 남궁선 감독, 최성은 주연 작 <십개월의 미래>다. 영화의 기본 이야기 전개구조는 임신한 주인공에게 시간 순서대로 0주차~가 표기되면서 긴장감을 조이는 방식을 취하는 측면에서 동질성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또한 임신한 당사자의 심리묘사에 철저히 집중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 사이의 연상효과가 꽤 깊게 발생하는 편이다. 다만 <십개월의 미래>는 (블랙)코미디 요소를 가미해 (무거운 고민을 과도하게 희석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이 끝까지 몰입을 유지하기 위한 숨 쉴 틈을 제공해주는 편이다. 그에 반해 <레벤느망>은 주인공이 임신 후 겪는 압박과 고립감을 (수시로 내쉬는 긴장된 한숨처럼) 관객에게 가능한 실감나게 전달하는 방향을 취하는 차별점이 뚜렷하다.
 
3_과거가 아닌 현재적 의미로 풀어내기 위한 노력
 
<레벤느망>은 프랑스어로 '사건'을 뜻한다. 그렇기에 영문 제목은 간단하게 "Happening"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안'은 스스로 '여자만 걸리는 질병'에 걸린 상태임을 담당 교수에게 밝힌다. 자신은 언젠가 아이를 낳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임신 때문에 '집에만 있는 여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 영화는 그 저주와 같은 병을 피하기 위해 주인공 안이 필사적으로 낙태를 시도하는 생존기에 가깝다. 원작자의 실제 기억 속 그 시간대, 1964년 10월 어느 날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1960년대 대학 캠퍼스를 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이 영화는 시대배경을 세밀하게 고증하려는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공중전화 같은 몇 가지 소품과 배경들만 화면에서 치워버릴 수 있다면 주인공이 겪는 일련의 상황은 지금 현재, 혹은 (우리는 쉽게 구별하기 어려운) 유럽 다른 나라라 우겨도 그럭저럭 넘어갈 만하다. 물론 이 영화는 당대의 사회변화를 공유하고 있지만 소품을 통한 특정연도의 재현 그 자체에 초점을 두지는 않는다.
 
대신 감독은 요즘 영화들이 주로 사용하는 통상 화면비율(2.35:1, 1.85:1 등)이 아닌, 1.37:1 비례를 채택하고 있다. 이 선택을 통해 영화 내내 관객의 시선이 가운데로 집중되게 만든다. 그 시선의 끝에는 거의 늘 주인공의 불안한 얼굴이 위치한다. 그 때문에 관객은 주인공이 받는 중암을 마주하게 된다. 시대극적 고증에 '쓸데없이 고퀄리티'를 추구하는 대신 주인공의 고뇌가 보편적 공감을 획득하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명확하게 느껴진다. 
 
그런 시각적 집중효과에 추가로 제작진은 주인공의 목표를 향한 영화 속 3차례의 결정적 시도 순간을 최적의 타이밍에 등장시킨다. 전체 러닝타임 속 해당 전환점의 위치 선정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각각 영화 분량 상 1/2-3/4-7/8 지점에 배치된 이 '터닝 포인트'들은 마치 사방에서 다가오는 벽처럼 (주인공과 관객을 같이) 압살될 것 같은 공포로 밀어붙인다. 젊은 여성인 주인공의 육체가 자주 조명되지만 욕망을 드러내는 극히 한정된 장면 외엔 성적으로 비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4_영화 바깥에서 관객이 발견할 역사적 계기들
 
<레벤느망>에서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과 방황은 영화 속 시대상의 반영임은 명백하다. 1960년대 초반, 어느 정도 자유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정착되고 성 해방이 진행되던 시절이다. 섹스는 여남 동등하게 할 수 있는 행위로 공인되기 시작했지만 그 결과로서의 혼전임신 책임은 온전히 여성에게 떠넘겨진 상황이다. 이 불균등한 변화상이 영화의 주된 긴장을 불러오는 배후다.
 
원작자가 자신의 경험을 그저 가슴 속에만 묻어둬야 했던 건, '자유의 나라' 프랑스에서도 1975년 법 개정 이전엔 낙태란 불법으로 처벌받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영민한 문학도인 주인공은 영화 초반 수업시간에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거두인 (공산당 당원이자 레지스탕스의 거두이기도 했던) 루이 아라공의 작품에 대한 의견을 발표한다. 그녀는 겉으로는 연애감정을 다룬 시에서 전쟁과 정치라는 2차 대전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도출한다.
 
'안'이 아직 어리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신적 피로감과 단발마적 행태를 종종 보이면서도 또래 여학생들과는 다른 통찰에 종종 도달하는 것은 그녀의 출신계급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당시만 해도 정규 대학은 중산층 이상이 주로 진학하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주인공은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그리 풍족하지 않은 가정에서 처음으로 대학 문턱을 밟은 존재다.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진 않지만 지난한 노력과 가족의 헌신으로 대학문에 들어섰을 게 분명한 주인공은 수시로 동급생들에게 꽤나 차별을 겪는 것으로 묘사된다. 자신을 임신시킨 집안 배경 좋고 야망도 큰 정치학과 남학생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도 소외된다. 그로 인한 방황과 시련을 이겨내고 1차적으론 자신의 장래를 좌지우지할 임신 문제를 돌파하고, 2차적으론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낙제를 면하고자 시험을 치르는 과정을 경유한다. 이렇게 영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위기와 극복에 더해 인생의 또 다른 통과의례를 이중으로 전개시킨다.
 
5_성실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영화의 성취
 
"레벤느망"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레벤느망"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특별시SMC, ㈜왓챠

 
영화를 연출한 오드리 디완 감독은 불과 두 번째 장편으로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 영화로 크게 주목받은 주인공 역 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는 영화 내내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마력을 발휘한다. 아역 연기자 때부터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아왔지만 본 작품을 통해 쟁쟁한 프랑스 영화계 차세대를 책임질 신성으로 등극했음은 물론이다. 여기에 더해 위르실라 메이에 감독의 <시스터>에서 레아 세두와 호흡을 맞췄던 캐이시 모테 클레인이 성인이 된 모습을 선보이며 당대 시대상을 반영한 동기 남학생을 맡아 밉상과 우정을 오가며 활약한다. 또한 영화 애호가들이라면 아녜스 바르다나 자크 리베트 등 누벨바그 거장들의 작품에서 얼굴이 익은 상드린 보네르 같은 배우들의 캐스팅에도 시선을 빼앗길 만하다. 제작진은 캐릭터에 딱딱 들어맞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각자의 개성과 역할을 적절히 분배하며 서로간의 호흡을 맞춰내 영화 속 세계가 또 다른 거울 속의 세계처럼 작동하게 심혈을 기울였다. 
 
<레벤느망> 영화 속에서 남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무책임하고 자기 욕구만 생각한다. 반면에 여자들은 갈등과 대립 속에서도 (결정적일 때는) 서로 돕는다. 방황하는 청춘은 위험한 욕망에 쉽게 끌리지만 아직 그 결과를 온전히 감당하기엔 시간과 경험이 많이 더 필요하다. 영화에는 이런 군상들이 생생하게 살아서 펄떡이고 있다. 그래서 <레벤느망>의 주인공은 그저 인습에 짓눌리는 가련한 피해자로만 비치길 거부한다. 그 대신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독립된 주체로 변모해가는 성장 형 캐릭터로 훌륭하게 형상화된다. 평범한 구성인 듯 하지만 비범하고 묵직한 영화 한 편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작품정보>
 
레벤느망 Happening, L'événement
2021|프랑스|드라마
2022. 3. 10. 개봉|100분|15세 관람가
감독 오드리 디완
원작 아니 에르노 [사건]
주연 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
출연 캐이시 모테 클레인, 루아나 바야미, 루이즈 셰비요트, 루이즈 오리-디케로,
       피오 마르마이, 상드린 보네르, 아나 무글라리스, 리오너 오버슨,
       파브리지오 롱기온
수입/공동배급 ㈜왓챠
배급 ㈜영화특별시SMC
 
2021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국제비평가협회상 수상
2022 영국아카데미시상식 감독상 노미네이트
2022 세자르영화제 신인여우상 수상&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노미네이트
2022 뤼미에르어워즈 작품상, 여우주연상 수상&감독상, 촬영상 노미네이트
2021 유럽영화상 유러피안 대학영화상 노미네이트
2022 선댄스영화제 스팟라이트 노미네이트
2021 시카고국제영화제 글로벌 커런츠, 우먼 인 시네마 노미네이트
2021 싱가포르국제영화제 마일스톤 노미네이트
2021 라로슈쉬르연국제영화제 관객상 수상
2021 시네리브리국제도서영화제 각색상 수상
2021 생장드뤼즈영화제 작품상 노미네이트
2021 바야돌리드국제영화제 작품상 노미네이트
2022 팜스프링스국제영화제 감독상, 새로운 비전 수상
2022 국제시네필협회상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베스트 브레이크쓰루 퍼포먼스 노미네이트
레벤느망 아니 에르노 오드리 디완 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 베니스 황금사자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