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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국회 앞 농성단을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만들기 유세단'으로 전환했다. 국회의원도 출근하지 않는 국회 앞을 우리만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낮 시간에는 유세 활동을 하고 저녁 시간에는 모여 앉아 영화를 봤다. 옴니버스 다큐 '평등길1110'이다. 30일을 걸었던 기억이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다가 영화를 보면서 행진을 다시 실감했다. 그저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평등길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걷는 이유를 되묻던 시간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인 이종걸 활동가와 함께 부산에서 서울까지 30일을 걷겠다고 마음 먹고 나서도, 솔직히 내가 왜 걷는지 말하기 어려웠다. 내게 차별금지법이 그렇게 절실한가? 내게 차별금지법이 그렇게 필요한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봤지만 행진이 시작되는 날까지도 답을 하기 어려웠다.

인권활동가로서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 추상적이었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주체로 등장할 때 가능할 텐데 누군가 자신을 드러내거나 말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하겠는가, 차별금지법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만드는 법이다, 또는 헌법상 평등권 실현을 위한 법이라는 등의 말들. 반대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 보려 하면 차별 '피해' 경험을 말해야 할 것 같고 '슬픈 얼굴'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언론에서 차별금지법에 접근하는 익숙한 방식인데, 차별금지법을 피해자나 타자를 위한 법에 가두는 이런 방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할 말이 없었다.

답은 길 위에 있었다. 둘이 걷기 시작했지만 둘만 걸었던 적은 없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찾아왔다. 차별금지법을 꼭 만들고 싶다며 찾아온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별로 관심이 없었다거나, 잘 모르지만 함께 걷고 싶었다며 찾아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며 헤어졌다. '그동안 차별을 안 받아본 게 아니고 잘 몰랐던 거네요',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내가 조금 더 당당하게 살았을 것 같아요' … 우리는 자신의 삶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를 기대하며 함께 걸었다.
  
평등길 청주길에 함께 하는 시민들
 평등길 청주길에 함께 하는 시민들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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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온 변희수의 이름

영화를 보고 나서 진행된 이야기마당 시간도 그랬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바라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은 부담 대신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에서 우리가 만들고 싶은 내일을 그려볼 수 있었다. 잘 살고 싶다,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마음으로 내가 내는 용기를 누군가 이어주면 좋겠어서, 누군가의 용기를 나도 이어주고 싶어서. 이야기들 사이로 내 안에 변희수의 이름이 새롭게 찾아왔다.

작년 3월, 변희수 하사의 부고를 접했을 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분노였다. 군대가, 국가가 변희수를 죽였다는 분노와 차별금지법도 못 만드는 나라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다짐 같은 것들이 뒤섞여 많은 일들을 했다. 도보행진 경로를 짜면서 최단거리에서 비껴난 청주를 들르자고 했던 이유도 그랬다. 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행진이 변희수 하사가 잠든 도시를 지나는 것이 어떤 마주침을 기대하는 것인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려웠다. 강제전역이 위법했다는 판결이 나왔지만 당신은 없다는 사실 앞에, 당신과 함께 차별금지법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쩌면 나는 변희수의 이름을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 안에 가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삶과 죽음을 헤아리는 일에서 늘 미끄러졌다. 트랜스젠더가 얼마나 살기 어려운 사회인지를 말하면서도 트랜스젠더로서 잘 살아내자는 약속을 건네야 하는 아슬아슬한 마음을 견딜 말이 없었다.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통해 차별금지법의 부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둘을 이어말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웠다. 차별금지법의 부재가 절망의 이유라면 희망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으므로.

기대와 의지 사이에서

영화에는 대구에서 이슬람 사원 증축 반대에 부딪친 무슬림 유학생 무아즈 라자크가 나온다. 인터뷰 말미에 감독은 한국이 긍정적으로 바뀔 거라 생각하는지 묻는다. "네, 그렇게 기대합니다." 영화를 몇 차례 보는 동안 이 대답의 의미를 되묻게 되었다. 무슬림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는 현수막이 붙어있는 동네에서, 매일같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혐오 댓글을 보면서 살아가는 그의 대답은 근거를 찾기 어려운 희망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낙관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그는 살아가야 하므로 변화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대답은 세상이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라기보다 내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이기도 했다.

변희수 하사가 기자회견에서 전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사랑하는 군은 계속하여 인권을 존중하는 군대로 진보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군대가 인권을 존중하는 조직으로 변모하고 있는지 신뢰하기 어렵다. 그러나 누군가는 용기를 내어 먼저 그런 기대를 현실의 것으로 만든다. "저는 비록 미약한 한 개인이겠으나, 힘을 보태어 이 변화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차별의 한가운데 서있는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차별금지법이 세상을 바꿔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무아즈 라자크처럼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무슬림 유학생이건, 트랜스젠더 군인이건,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여성이건, 먼저 용기 낸 사람의 기대에 응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누군가 용기를 내거나 누군가 도망치는 것은 우연이겠지만 먼저 낸 용기들이 이어질 수 있는 필연의 구조를 만드는 것은 모두에게 남겨진 숙제다. 그리고 이런 자리는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대구 무슬림 사원 건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북대 학생들과의 연대 기자회견
 대구 무슬림 사원 건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북대 학생들과의 연대 기자회견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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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을 기대한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조금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아요."

부산에서 이주민인권운동을 하는 아이잔의 이야기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 자신감이라면, 자신을 못 믿게 만드는 것이 차별이다. "'더불어 사는 주민이 아니다' 하는 걸 느끼거든요." 차별금지법이 내게로 와서 '너 자신을 믿으라'고 말해줄 것이 아니라면 결국 우리의 자신감은 함께 하는 동료들을 얻는 데서 찾아온다.

작년 가을 법원은 변희수 하사에 대한 강제전역 처분이 위법하므로 취소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판결의 요지는 변희수 하사가 전역 처분 당시 여성이었으나 남성을 기준으로 장애 판정을 했으므로 위법하다는 것이다. 즉 육군은 여성을 여성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판결이다.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일이, 그가 태어날 때 남성이라는 성별을 지정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벌어졌다. 그러나 그만큼 성별을 지정하는 구조가 견고하다는 걸 깨닫게 하는 판결이기도 하므로 우리에게는 다시 한 걸음 내딛어야 할 과제가 생긴다.

아이잔의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읽어, 나는 이제 또 다른 자신감을 기대한다. 우리 개개인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자신감을 갖게 하자고. 지정성별이 남성이었던 사람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관계 맺기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낯선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는 일이 마음 먹는 대로 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방법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우리는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서로 이해하기보다 오해할 일이 더 많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차별을 알아차리는 힘을 통해 동료시민으로서 평등한 관계로 만나는 역량을 키울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우리 몫의 내일
천안에서 열린 상영회에는 2016년 세상을 떠난 이한빛 PD의 부모님이 참석하셨다. 그의 어머니는 '차별금지법이 혼자 남겨두지 않는 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소름이 돋았다"고 말씀하셨다. 누군가의 삶에 이해받지 못하고 응답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쌓여 숨 막히게 두지 말자.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는, 자기를 돌보고 서로를 돌볼 줄 아는 나라다. 말 못하는 이야기들을 누군가에게 꺼냈을 때 받은 응답을 또 다른 누군가의 용기에 잇는 일은, 쉽지는 않지만 그만큼 소중한 일이다. 그걸 먼저 겪어 아는 우리가 차별금지법을 제안하는 이유다. 여전히 우리는 가끔 아프고, 예상하지 못한 슬픔을 마주하며 살아가겠지만, 우리 몫을 넘어서는 후회와 자책에 지쳐버리기 전에 우리 몫의 내일에 도전한다.

이런 걸 알 기회가 없었을 정치인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모르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점,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대한 변화를 시작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쫓아오지 못하는 정치는 낙오할 것이며, 대선 결과가 어떻든 그들 몫의 숙제를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 <평등길1110>상영회. 부산 상영회 모습.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 <평등길1110>상영회. 부산 상영회 모습.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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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


태그:#차별금지법, #평등법, #차별금지법있는나라, #평등길1110, #변희수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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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차별의 예방과 시정에 관한 내용을 담은 법입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행동하는 연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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