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길우.

배우 강길우. ⓒ 눈컴퍼니

 
 
습관성 음주, 이로 인해 얻은 걸로 보이는 알코올성 치매는 한 남자의 인생을 갉아먹고 있었다. 결국 죽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과거와 연관이 있는 강원도 태백으로 향한다.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는 모인이라는 사내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을 떠나는 중 우연히 또다른 아픔을 지닌 여성 화림(박가영)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친구도 가족도 없고, 도통 어제 일도 기억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인이 왜 죽으려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되진 않는다. 그 이름처럼 영화는 모호함과 묘함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최근 여러 한국독립영화로 부쩍 관객과 만남을 늘려가고 있는 강길우는 자신의 SNS로 온 감독의 메시지를 보고 궁금했다고 한다. 광고인으로 경력을 쌓던 김지석 감독과는 일면식이 없었다. 사비를 털어 5일 만에 영화를 찍겠다며 보내온 글을 보고 그는 궁금증이 들었고, 그렇게 작업을 함께 했다.
 
"처음 받은 글은 소설 형태였다. 글만 보고선 좀 이상한 사람인가 싶더라. 짧은 시간에 자기 돈으로 찍겠다는 걸 제가 다시 생각해보라 말하기도 했다. 광고 조감독 일을 해서 스케줄 맞추는 건 자신 있고, 도와주는 스태프들도 다 있다며 안심하라더라. 처음 글을 봤을 때 모인이 마치 유령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독님이 상업적 광고를 하시다 보니 영화로는 뭔가 새로운 방식의 작업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다소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들,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말들이 영화 곳곳에 담겨 있었다. 강길우는 "죽으러 가는 그의 여정, 동행하는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그들의 속사정이나 과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며 작품을 대했던 자신의 자세를 전했다.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며
 
"작품마다 다르겠지만 주로 전 캐릭터의 과거를 따지기보다는 책을 처음 읽은 뒤 드는 느낌이나 속도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영화가 어떤 분에겐 좀 불친절한 느낌을 줄 수도 있는데 전 제가 받은 느낌을 표현해서 그게 영화로 완성됐을 때 관객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그걸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더라.
 
감독님이 직장인이라 주말을 이용해서 촬영했다. 첫주엔 토요일과 일요일, 다음주엔 금토일을 썼다. 초반엔 이렇게 찍는 게 맞나 싶을 때가 있었는데 강원도로 떠나는 장면을 찍을 때부터는 뭔가 믿음이 생겼다. 그때부턴 즐기며 찍었던 것 같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죽으려는 의지가 강한데 어떤 순간에선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기도 하고, 죽으려 하는 또다른 낯선 사람을 살려내기도 한다. 이런 아이러니한 순간들과 각 캐릭터의 정서가 만나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주변에 충분히 존재할 것만 같은 인물로 느껴진다. 강길우 또한 "아마 마지막 장면 이후 모인과 화림은 서로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다"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촬영 땐 등장인물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구체적 사례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뉴스 등을 볼 때마다 고독사, 혹은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전보다 늘어난 것 같다. 죽음에 대해 제가 뭐라 말하기가 참 쉽진 않지만 분명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 관련 이미지.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 관련 이미지. ⓒ (주)평화사

 
<정말 먼 곳> <더스트 맨> <식물카페, 온정> 등 세 작품이 지난해 연달아 개봉하며 부쩍 부각되는 걸로 보이지만 강길우는 2010년부터 연극 무대를 밝으며 차근차근 성장해 온 배우다. 유년 시절부터 화가를 꿈꾸며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스물다섯 나이에 무대에 대한 갈망을 느끼며 진로를 바꿨다. 급변이라면 급변일 수 있는 선택이었다.
 
"순수미술로는 생활이 어렵다는 주변 말에 휘둘렸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디자인을 전공했고, 뭔가 그 안에서 재미를 찾기 위해 영화 미술을 해보려고도 했다. 유치원 다닐 때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부모님께 떼를 썼다고 하더라. 잘 기억은 안 난다(웃음). 입시 미술을 하면서도 백신스키 같은 환시미술에 꽂혀 있긴 했다.
 
(미술 공부가 연기에 도움이 됐는지에 대해) 막연한 얘긴데 둘 다 나름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감각은 비슷한 것 같다. 연기하면서 제가 찾는 것과 그림 그리며 찾는 감각이 닮아 있다. 도움을 주고받는 영역은 아닌 것 같다. 영화는 제가 아닌 그 작품을 소비하는 분들이 중심이라 관객분들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보폭을 넓히다
 
성소수자, 장애를 가진 노숙인, 그리고 알코올성 치매 환자까지. 그가 한국 독립영화를 통해 연기한 인물들은 모두 기성 상업영화에선 만나기 어려운 소수자들의 면면들이다. 자연스럽게 최근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얼굴로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 그리고 올해 방영될 JTBC 드라마에도 참여했다. 그렇게 그는 보폭을 넓히고 있었다.
 
"처음부터 독립영화에 대한 의무감을 갖고 한 건 아니었다. 제 입장에서 좀 더 다가가기 좋았던 게 독립영화였던 거지. 돈은 없지만 뭔가 말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했고, 영화를 대하는 사람들의 애정이 멋있어 보였다. 제가 어떤 애정을 가졌다고 말하기보단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감사한 일이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적지 않은데 결과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뭔가 본질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편이다. '인간이란 뭘까'류와 같은(웃음). 어렸을 땐 제가 영화를 좋아하는지 잘 몰랐는데 돌아보니 비디오 대여점에 몇 시간이고 서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중학생 때 본 <쉰들러 리스트>로 충격을 받았고, 막연하게 그냥 영화 보는 게 좋았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포레스트 검프>를 말한다. 영화 문법, 개연성도 중요하지만 순수한 본질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활동 영역을 넓혀 가면서 강길우는 기분 좋은 부담, 설렘이 있다고 고백했다. 지난해 초까지 홀로 활동하다 소속사와 계약 후 보다 힘을 받고 있다고 한다. 스물다섯 청년이 어느덧 서른 후반이 되어 외길을 걷고 있다. 연기 경력 10년을 넘기면서 그 또한 스스로 어떤 분기점에 있다고 자각하고 있었다.
 
 배우 강길우.

"연기하면서 제가 찾는 것과 그림 그리며 찾는 감각이 닮아 있다." ⓒ 눈컴퍼니

 
"연기가 제 성격에 맞는지 고민한 적은 있어도 한 번도 그만 두고 다른 걸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연기를 시작해서 다른 직업에 대한 미련이 없다. 연기 말고는 할 게 없기도 하고. 연기가 늘 새롭다. 경력이 조금씩 쌓이면서 여유라는 것도 생기는 느낌이다. 전엔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고민이었다면, 이젠 연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내 마음이다. 여러 현장을 경험하면서 공부가 되고 있는데 그래도 연기의 핵심은 거짓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인 것 같다. 내가 뱉는 소리나 감정이 그 상황에 맞아야 한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건강해야 한다. 요즘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고 있다. 혼자 일할 땐 몰랐는데 같이 일하니 건강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 같다(웃음)."
강길우 온 세상이 하얗다 박가영 독립영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