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누가 텔레비전 보나요." 주변에서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과거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50%를 훌쩍 넘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10%를 넘기기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없었던 시절, 우리는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방송 시간에 맞춰 텔레비전 앞에서 손 모으고 기다렸습니다. 그때 그 시절이 기억나시나요? 과거 우리를 즐겁게 만들었던 프로그램과의 추억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편집자말]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지금 내가 여기 니 앞에 서 있는데~'

혹시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를 기억하는가. 아직도 내 입에서 종종 흥얼거려지는 이 노래는 1992년 방영됐던 MBC 드라마 <질투>의 주제곡이다.
 
최수종과 고(故) 최진실이 주연을 맡았던 <질투>는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남녀가 사랑임을 알아차리고 서로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매우 경쾌하게 그려냈다. 4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고 감각적인 소재와 연출로 '한국 트렌디 드라마의 효시'라고 평가를 받았다. 그 때 중3이었던 나는 이 드라마 덕분에 드라마의 맛을 알게 되었고, 4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매주 드라마 1~2편은 보면서 지내게 됐다. 덕분에 <드라마 인물탐구 생활>도 연재 중이다.
 
하지만 <질투>는 드라마의 세계만을 알려준 것이 아니었다. 사춘기의 정점을 찍고 있던 내게 우정의 폭을 넓혀주고,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게 해준 결코 잊을 수 없는 드라마다. 떠올릴 때마다 흐뭇해지는 드라마 <질투>에 얽힌 나의 추억들을 공개한다.
 
 우정과 사랑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려냈던 MBC 드라마 <질투>의 한 장면

우정과 사랑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려냈던 MBC 드라마 <질투>의 한 장면 ⓒ MBC

   
우정의 폭을 넓혀주었던 드라마
 
<질투>가 방영됐던 1992년 여름. 나는 친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춘기 소녀였다. 학교에서 5명의 친구들과 한 무리를 이루었는데, 이 친구들과 늘 점심 식사를 함께하고, 수다를 떨며, 화장실까지 같이 다니곤 했다. 나는 이 친구들을 너무나 좋아했는데, 그 때문에 혹여라도 이들과 멀어질까봐 전전긍긍했다. 친구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친절하지 않다 느껴질 때면 무슨 잘못을 했나 곱씹곤 했고, 친구들에게 말실수를 할까봐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내게 친구들과의 관계에 덜 집착하게 된 계기가 되어 준 게 바로 <질투>였다. 당시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살았는데 <질투>의 여주인공 최진실이 우리 집 안방에서 내다보이는 빌라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친구들은 우리 집에 와서 그 집을 구경하기를 바랐다. 한 번은 드라마에서 최진실의 파트너였던 최수종이 타고 다녔던 것과 유사한 파란색 승용차가 빌라 입구 골목에 주차되어 있었고, 친구들은 그게 최수종의 차라며 흥분했었다(지금은 드라마 촬영용 차를 실제로 배우가 몰고 다니지는 않는다는 걸 안다).
 
그 때부터 많은 친구들이 내게 먼저 말을 건네왔다. 5인방 외의 친구들도 "오늘 너네 집 가서 같이 숙제할까"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번은 친구들과 함께 하교해 같이 숙제를 하고, <질투>에 관한 수다를 떨면서 최진실이 오가지는 않나 창 밖을 내다보며 지냈다. 덕분에 많은 친구들이 생겼고 5인방과의 관계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집착하지 않자 5인방과의 관계 역시 더 편안해졌다.
 
물론 그 때 나와 내 친구들은 최진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질투>가 막을 내리고 얼마 후 한 살 터울인 내 여동생이 그 빌라에 들어갔다가 최진실의 매니저라는 사람을 만났던 적이 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엄마의 사랑을 알게 해 준 드라마

그 무렵 나는 가족 안에서도 사춘기 소녀임을 극명히 드러내곤 했다. 부모님께 큰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툭하면 짜증을 냈고, 부모님이 하는 모든 말은 내게 잔소리로만 들렸다. 특히, 공부 욕심이 많았던 나는 시험 기간이면 더욱 예민해져서 식구들을 못살게 굴었다. 문제는 시험 기간에도 바로 <질투>가 방송된다는 거였다. 6월에 방송을 시작해 7월에 끝났으니 <질투>와 함께 기말고사를 통과해야 했다.

나는 <질투>가 시험에 방해가 될까 봐 걱정이 됐다. 최수종의 열렬한 팬이었기에 드라마를 보고 나면 한동안 최수종의 멋진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보고는 싶었고 보자면 시험을 망칠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시험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던 때쯤으로 기억이 난다. 나는 공부를 하다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질투>가 방영되던 날이었지만, 공부도 못하고, <질투>도 보지 못한 채 그냥 자버린 거였다.
 
다음 날 아침,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자버린 거면서 짜증이란 짜증을 엄마에게 다 퍼붓고 말았다. 하지만, 엄만 그때 나를 야단치기는커녕 내게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내미셨다.
 
"어제 밤에 못 보고 잠들더라고. 고단해 보여서 깨우지는 못했고, 이거 못 보면 속상해할 것 같아 녹화해두었단다. 시험 끝나고 편하게 봐."
 

당시 내가 어떤 표정으로 그 비디오 테이프를 받아들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후 집에서 나는 짜증을 덜 부리게 됐다. 이 일을 통해 엄마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진심으로 존중해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부모님의 말들이 잔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엄마는 시험 기간이 끝날 때까지 몇 회분을 더 녹화해주셨고, 나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난 날 엄마가 녹화해준 <질투>를 몰아보며 행복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건 단지 드라마가 아니었다. 엄마의 사랑이기도 했다.
  
 드라마 <질투> 속 이응경의 모습. 나는 단아한 아름다움에 반했었다.

드라마 <질투> 속 이응경의 모습. 나는 단아한 아름다움에 반했었다. ⓒ MBC

 
피자의 맛을 알게 해준 드라마
 
<질투>에는 최수종이 최진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른 채 마음을 주는 또 다른 여인이 등장한다. 바로 배우 이응경이다. 드라마에서 피잣집 주인이었던 이응경은 최수종과 최진실의 관계에 해가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단아한 모습을 내심 흠모했다. 그리고 그 때 '피자'라는 음식을 처음 알았다. 피자에 엔쵸비가 들어가고 어쩌고 했던 피자집 요리사의 대사까지 기억나는 걸 보면, 이 음식에 대한 관심이 꽤나 컸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어느 토요일 오후 우리 가족은 '피자'가 과연 뭘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외식이라고 하면 짜장면이나 돈가스가 전부였던 시절 아빠는 "그 피자집 찾아가보자"라고 제안하셨고 나와 동생은 환호성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실제로 그 날 저녁 아빠 차를 타고 그 피자집을 찾아갔다.
 
드라마에서 보던 그 장소가 맞았다. 최수종이 앉았을 거라 추측되는 테이블을 보며 무척 설레했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그 날 처음으로 피자를 맛보았다. 하지만 맛은 별로였다. 피자치즈의 냄새가 역하게 느껴졌던 것. 그날 이후 피자는 내게 '느끼하고 비린내가 나는 음식'으로 각인되었다. 내가 피자를 다시 먹게 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인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이 날의 외식은 너무나 특별하고 재미있는 가족의 추억으로 내 마음에 깊이 저장되어 있다.
 
 <질투>에는 최수종과 최진실이 편의점에서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 드라마의 큰 인기 덕에 이 후 편의점이 문화가 실생활에 자리잡게 됐다.

<질투>에는 최수종과 최진실이 편의점에서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 드라마의 큰 인기 덕에 이 후 편의점이 문화가 실생활에 자리잡게 됐다. ⓒ MBC

   
<질투>와 관련된 기억들을 소환해놓고 보니 마음 한 켠이 뭉클해진다. 아마도 이제는 이런 추억들을 만들기 힘들것 같다. 나는 여전히 드라마를 보지만 누군가와 함께 드라마를 보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스마트기기로 드라마를 보고 예능프로그램을 좋아하는 남편은 자신의 노트북으로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본다. <질투> 방송 당시 내 또래가 된 나의 아이는 TV보다 유튜브를 선호한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땐 서로 방해가 되지 않게 각자 이어폰을 사용하기에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간혹 이웃들과 대화 중 드라마 이야기가 나와도 서로 공감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너무나 많아진 채널과 프로그램 종류 덕이다. 때문에 대화는 늘 "나는 이 드라마가 재밌어" 수준에서 끝이 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도, 명절에 장거리 이동을 하면서도 드라마를 즐길 수 있어 심심할 새가 없지만, 마음이 더 공허하게 느껴지는 건 짙게 풍기던 TV앞의 사람 냄새가 사라져서 아닐까.

드라마 한편에 친구들과 끈끈해지고, 가족의 사랑을 확인했던 그 때가 무척이나 그리워진다. 이번 설 연휴 땐 스마트기기의 도움을 받아 남편, 아이와 '함께' <질투>를 정주행해볼까 싶다. 모처럼 수다도 떨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질투 최진실 최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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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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