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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전골은 그때 처음 먹어봤다. 눈발이 약간 날리는 이맘때쯤 겨울이었다. 6명 가족이 한 냄비에서 조금씩 덜어서 먹었던 소고기 전골. 소고기보다는 몇 가닥의 굵은 우동면과 전골 속 배추가 먼저 기억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소고기 전골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글 식당상호 밑에 영어로 코리안 레스토랑이라는 알파벳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고급식당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아버지는 가족이 6명인데 전골을 4인분만 시켰다. 나는 그게 창피해서 일단 주눅부터 들었다. 번듯하고 고급스러운 식당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다. 인원에 맞지 않은 주문에도 종업원은 친절하고 깍듯했다. 과연 고급식당이구나 했다. '손님이 왕이다'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거구나 싶었다. 맛의 기억보다는 조심스럽게 먹었던 기억이 더 생생하다.

1970년대 가족 나들이는 연중행사정도로 귀했다. 어린 기억에도 늘 넉넉지 않은 살림 살이었기에 그날의 외식은 어린 시절 모든 외식의 기억을 그 하나로 축소시켜 놓았다. 아마도 그날의 나들이는 영화에 이은 외식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영화를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영화배우가 수잔 헤이워드라고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주말의 명화를 함께 봤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살고 싶다'에서 마지막 사형장으로 향하던 여배우의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내게 가장 강력한 오락은 온 가족이 함께했던 주말의 명화 시청이었다.

엄마보다는 아버지와의 기억이 더 선명하다. 사택에 살았던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오가며 아버지의 일터를 지나갈 때가 많았다. 그러면 한두 번쯤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가 당신 키보다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외국인과 뭐라 뭐라 말하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손짓이 컸던 것으로 보아 거의 바디 랭귀지에 가까운 대화였지만 그때처럼 아버지가 자랑스러워 보일 때가 없었다. 내 눈엔 아버지가 그 외국인보다 더 크게 보였다.

환절기에 감기를 앓으면 물수건을 차갑게 적셔 이마에 얹어 주셨고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며 순두부를 사다 주시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선생님과의 상담에도 직접 오셨다. "담임선생님이 젊고 의욕이 넘치시더라", "네 이름을 말하니 너를 대번에 기억하시던데"라며 긍정적인 후기를 전해 주시곤 했다.

어려운 집안의 장남으로 부모와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아버지는 평생을 성실이라는 단어 하나로 살아내셨다. 간당간당한 살림살이에도 간혹 했던 외식은 최선을 다하고 싶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성실이었고, 당시의 나에겐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닌 문화체험이기도 했다.

소고기 전골을 사 주셨던 아버지는 올해 89세가 되었다. 아버지가 나이가 드실수록 내 안부는 '아버지 식사 잘하시느냐'는 물음으로 시작된다. 갑자기 임종하신 시어머니의 노년을 지켜보며 따뜻한 밥 한 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했다. 평생 아버지의 삼시 세끼를 마련해주신 엄마를 볼 때면 "아버지는 정말 장가를 잘 드셨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버지와 함께 나이가 드신 엄마는 몇 년 전부터 부쩍 주방 살림을 힘들어하신다. 평생 차려 주는 식사만 하시던 아버지가 식사 준비를 돕는다고 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다. 오래전 지방 소도시로 이사 한 나는 친정 방문이 드물다.

'시집갔으니 친정 생각 말고 시부모 봉양에 최선을 다하라'는 아버지 말대로 부모님께는 효도를 미루며 살아왔다. 시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친정 부모님을 바라보니 아버지는 팔십이 넘으셨다. 함께 자주 맛있는 외식을 하고 싶은데 아버지는 멀리 계시다. 게다가 코로나로 친정 방문이 더 어렵게 됐다.

뒤늦은 효도로 아버지께 보내 드릴 음식을 만들어 보았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소고기 전골, 가까이 산다면 따뜻하게 해 드렸을 소고기 전골, 국물을 뺀 소고기 전골을 생각하니 소고기 장조림이 떠올랐다. 쇠고기 양지에 간장, 설탕, 생강, 표고버섯, 통후추, 마늘을 넣고 푹 졸였다. 메추리알도 삶아 같이 넣고 졸였다. 식힌 장조림의 기름을 제거하고 손가락으로 결대로 쪽쪽 찢었다. 달달한 국물이 흐르지 않게 잘 포장해서 다른 반찬 몇 개와 함께 보냈다.

장조림을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로부터 문자가 왔다. "장조림이 아주 맛있구나. 단백질 식품으로도 좋고, 간혹 해서 보내주면 좋겠다." 몇 글자의 문자를 확인한 순간 울컥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잘 멈추지 않았다. 산책 도중 길 한쪽으로 비켜서서 우는 나를 남편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간혹 해서 보내 주면 좋겠다"라는 글자가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나에겐 늘 크고 완벽하기만 했던 아버지. 모든 것을 묻고 의지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이제는 키가 줄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기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장조림 선수가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장조림을 할 때면 기운이 났다. 뜨거운 여름에는 맛이 변할까 봐 시판 장조림을 부치기도 했지만 직접 하는 장조림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제 연로하신 부모님 집에는 언니가 들어와 돌봐 드리고 있다. 언니가 늘 따뜻한 반찬을 하니 이젠 장조림 하는 일도 중단되었다. 나는 이젠 엄마에게 다른 안부를 전한다. "엄마 아버지는 정말 복이 많아. 언니가 이렇게 옆에서 돌봐 드리니까."

요 며칠 강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따뜻한 국물 음식이 당기는 날씨다. 6명이 함께 먹던 4인분의 전골이 다시 떠오른다. 그것은 아버지의 맛이고 추억을 만들어 주셨던 아버지의 멋이다. 아버지가 식사를 잘하신다는 소리에 안심하다가도 아버지의 나이를 떠 올리면 마음을 졸이게 된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조바심이 든다.

효도를 미뤘다는 후회, 그리고 아직은 아버지에게 의지하는 딸로 남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영화를 좋아하고 새로운 외식 문화 체험을 열어 주셨던 그 젊었던 아버지와의 시간으로 자꾸만 마음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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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일상안에 숨어있는 선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문장을 짓습니다. 글쓰기는 일상을 대하는 나의 예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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