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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구두를 즐겨 신지 않는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주로 굽 없는 단화를 신는다. 평생을 작은 키를 보완하느라 하이힐을 신었던 나와는 달리 보여지는 것보다 편한 것을 우선한다. 그런 남편에게 변변한 구두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이 사실을 결정적인 순간에 알게 되기 전까지 남편의 구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구두를 싫어하는 남편에게 생긴 일

딸의 결혼을 앞두고 새 양복을 장만한 남편은 "신지도 않을 구두를 사서 무엇 하겠느냐"는 내 말에 구두 구입은 생략했다. 일 년에 몇 번 신지 않아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구두가 몇 켤레나 있었으니 그 중 하나를 신으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이런 무신경함은 뜻하지 않는 때에 복병을 만난다.

결혼식장에서 하객과 인사하던 남편이 구두 밑창이 불편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래 신지 않아 딱딱해진 구두 바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결혼식 1시간도 채 남기지 않은 때였다. 급하게 지인에게 구두를 부탁했다. '240센티의 검은색 남자 구두' 요구 조건은 단 한 가지였다.

간단한 조건이었지만 240센티라는 일반적이지 않은 크기의 구두는 몇 군데의 구두점을 거친 후에야 겨우 구해졌다. 남편의 애타는 마음과 달리 구두는 반짝반짝 광까지 낸 지인의 손에 들려 결혼식 직전에야 겨우 도착했다. 결혼식을 앞둔 신랑 신부보다 더 떨리는 마음이었다.

나는 정확히 딱 한 번 남편의 구두를 샀다. 남편과의 결혼식 때였다. 이후론 남편의 구두를 샀던 기억이 없다. 자칭 타칭 멋 좀 부리는 남편은 모든 것을 스스로 고르는 구매 결정력이 있었다. 손수건부터 양말까지 내 도움 없이 자신의 취향대로 골랐다. 반지, 시계 등 세세한 악세사리도 좋아하는 남편 수집 품목 중에 예쁜 단화는 있었지만 구두는 몇 켤레 되지 않았다.

구두의 시대는 끝났다
 
새벽 산책을 하는 아버지의 발을 지키는 낡은 운동화
▲ 아버지의 운동화 새벽 산책을 하는 아버지의 발을 지키는 낡은 운동화
ⓒ 오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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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구두를 샀던 기억도 딱 한 번이었다. 전달하지는 못한 구두였다. 구두 티켓을 주며 구두를 부탁하셨는데 지하철을 기다리며 앉아 있던 의자에 그대로 두고 온 것이다. "구두를 놓고 왔다"는 말에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그 후에라도 한 켤레 사 드렸어야 했는데, 결혼을 해 친정을 떠난 이후론 친정을 향하는 몸도 마음도 굼떴다.

"내가 죽으면 수의는 준비하지 말고 깨끗한 종이에 싸서 장례를 치르라"는 아버지는 옷도 신발도 모든 것이 너무 많다 하신다. 각막을 기증했기에 되도록 백내장 수술도 안 하시겠다는 아버지는 자신에 관한 물건 구입을 극도로 꺼리신다. 그런 아버지의 신발장에는 아버지의 운동화 몇 켤레가 있다. 평생 새벽 산책을 해 오신 아버지의 발을 지켜주는 일등 공신들이다.

올해 구순을 맞으신 아버지는 평생 새벽 운동을 해오셨다. 아버지가 사는 아파트 안에 아버지의 걷기 길이 있다. 아버지가 동 대표를 하던 해에 직접 호미를 들고 박혀있는 돌과 발에 걸리는 방해물들을 캐내어 흙 바닥 길 300미터를 걷기 좋은 길로 만들었다. 그 전엔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이 아버지의 걷기 길이었는데 아파트 안에 걷기 길을 만든 후에는 그 길을 걸어 새벽 걷기를 하신다. 몇 켤레의 운동화를 친구 삼아 새벽 산책을 하는 아버지에게 구두는 무용지물이다.

아버지에게 구두의 시대는 조기 퇴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50대 중반에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5년 전 명예 퇴직을 한 남편도 심리적인 구두의 시대는 끝났다. 나 역시 키가 줄어드는 나이가 되니 관절과 걷기 건강을 염두에 두고 구두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아버지에게 구두 한 켤레 사드리지 못한 나는 아들이 취업됐을 때 양복 2벌과 구두 2켤레를 한 자리에서 샀다. 자식에게는 즉각적인 이 마음이 아버지에게는 왜 속도가 늦는 것일까. 아버지의 낡은 운동화를 보며 부모에게 게으른 나의 마음을 본다.

구두의 시대가 끝난 아버지와 남편. 이제는 남편에게도 산책용 운동화가 늘어난다. 단화의 멋스러움을 추구하는 시대도 끝나고 관절을 보호하는 밑창이 튼튼한 런닝화의 시대를 열고 있다. 그래도 아들이 장가 들 때는 남편의 구두 한 켤레는 사야겠다.

태그:#구두, #운동화, #아버지, #운동화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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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일상안에 숨어있는 선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문장을 짓습니다. 글쓰기는 일상을 대하는 나의 예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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